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337)
00337 뉴 웨이브 =========================================================================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마치 어디선가 한 번 만났던 것처럼 익숙한 기시감이 가슴을 어지럽힌다. 말도 안 되는 것은 안다. 이런 기가 막힌 미인을, 우연히 스쳐 지나갔다면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을 터인데.
“반갑습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이제 열아홉이시라니.”
“과찬이세요.”
“연구 환경은 흡족한가요? 최고의 석학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는데, 아직 공사가 미흡해서…….”
“괜찮습니다. 정말 좋은 곳이에요.”
나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남자의 혼을 빼놓을 듯이 아찔한 웃음이었다. 유혹이 아니라 그저 웃었을 뿐인데 심장을 떨리게 한다. 이거 연구원들이 가슴 떨려서 제대로 연구에 집중할 수나 있을까?
“그럼 저는 밀린 프로젝트가 있어서 이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나미는 등을 돌리고 멀어졌다.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는 소녀라기보다는 성숙한 여인의 매력을 어렴풋이 남긴다.
그제야 유지웅은 최윤을 돌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우와……. 정말 엄청난 미인인데요.”
“거기에 명석하기까지 하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저런 인재를 구하셨어요?”
진심으로 감탄을 감추지 않던 유지웅은 문득 불안한 듯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신원 조회는 확실하게 하셨겠죠?”
“물론입니다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글쎄요. 그런 건 아닌데…… 사람이 너무 완벽하니까 괜히 스파이나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현실이 항상 영화 같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그녀의 신분도, 지식 수준도 이미 확실한 검증을 마쳤습니다.”
“저도 그냥 해본 소리예요.”
유지웅은 얼굴을 살짝 펴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어떤 게 큰일이라는 겁니까?”
“저런 기가 막힌 미인이 들어왔으니 젊은 연구원들이 어디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겠어요?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가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네요.”
그 말에 동조하는지 최윤도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그 웃음이 왠지 수상하다.
* * *
또각또각.
하이힐의 굽 부딪치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나미는 하얀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정면만 주시한 채 도도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진다. 거리가 벌어질수록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에도 생동감이 살아난다.
마침내 모퉁이를 돈 순간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하아…….”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손가락의 떨림이 멎지 않는다.
“저 사람이…… 그때 그…….”
숨을 고르며 눈을 감는다. 치열했던 사투의 순간을 떠올리는 순간 조금 누그러졌던 심장의 고동이 다시 빨라진다.
“이 몸은 너무 약해.”
자신을 이겼던 사람. 단지 그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다니.
이렇게나 이 몸은 나약하고, 불편하고, 쓸데없이 겁이 많다.
나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약한 몸,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유용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기에 인간의 사회로 손쉽게 스며들 수 있었다. 인간을 배울 수 있었다. 소통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다. 비명에 죽어간 새끼의 복수를 할 기회가.
* * *
“나미 씨,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요? 걱정했는데.”
“나미 씨, 저번에 보니까 N-4 해체 알고리즘 데이터 정돈에 애를 먹으시는 거 같던데, 그거 제가 해놨어요.”
“나미 씨.”
“나미 씨.”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들이 저마다 반색을 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쳐다보더니 서로 보이지 않게 눈을 흘긴다.
‘모르겠어.’
불과 일 년 만에 유능한 석학 연구원 행세를 해낼 만큼 나미는 빠른 속도로 인간을 습득하고, 인간 사회에 침투했다. 연구원 행세에 필요한 지식도 쌓았고, 신분도 완벽하게 위장했다.
그러나 겉보기만이다. 나미는 아직도 인간의 행동이나 관습 중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 저들이 보이는 행동이 그 중 하나다.
나미가 자리에 앉자 모든 연구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가슴이 떨렸으나 침착하게 모른 체 했다.
‘또 왜들 저러지? 내가 이상하게 행동한 게 있나?’
인간 사회에 잘 침투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처럼 사람들이 추궁하듯 주목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탐색하는 것인가? 대체 어떻게?
“나미 씨, 최 사장님이 찾으시는데요.”
“알겠어요.”
살았다는 듯이 나미는 일어섰다. 연구실을 나서자 동료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미 씨는 참 좋으시겠어요.”
그녀를 부르러 온 여직원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의아해서 반문했다.
“그게 무슨 의미죠?”
“무슨 의미긴요, 말 그대로죠.”
“……?”
이것도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 중 하나다. 인간들끼리는 서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괜히 너무 깊이 물어보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 싶어 나미는 질문을 관뒀다.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최윤은 개인 연구실에 있었다. 그는 회사 사장이면서 제일가는 연구원이기도 했다. N-4 개발의 핵심 내용도 전부 그가 정리하고 추진한 것이다.
“아, 어서 와요. 앉으세요.”
자리를 권하고 최윤이 손수 커피를 내왔다. 나미는 겉으로는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쓰면서, 속으로는 왜 이런 불필요한 물질을 섭취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인간들은 외부에서 영양소 공급이 이뤄져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알지만, 이런 갈색 물은 영양 면에서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고맙습니다.”
이럴 때는 이런 말을 하는 게 인간의 관습이라는 걸 알기에, 나미는 대강 대답하고는 공손히 두 손으로 쥐었다.
“나미 씨가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건 얼마 안 되었지만 제가 유심히 지켜봐 왔습니다. 동료들의 평가도 좋고, 직관력도 대단히 뛰어나고요.”
“감사합니다.”
“입사할 때 N프로젝트에 꼭 참가하고 싶다고 했었죠?”
나미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지금의 몸은 너무 약하다. 왜 또 이렇게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건지 모르겠다.
“예.”
“N-4는 완성되었습니다만 개량이 필요해요. 일단 제조 단가가 너무 비쌉니다. 그 부분에 관한 연구 팀을 신설할 생각인데, 나미 씨도 참가하겠습니까? 물론 책임자로 참가하는 것은 아니니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요.”
나미는 가슴이 놀랄 만큼 차분해졌다. 그녀는 또 다시 일어난 몸의 변화를 분석했다. 이건 인간의 표현을 따르면, 실망했다는 생리 반응과 유사한 것 같다.
효웅산업의 주력 프로젝트인 N-4의 개량 연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회다. 하물며 신입 연구원인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분기점인지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가 인간 사회에 적응한 것, 효웅산업에 침투한 이유는 제조 단가 낮추는 연구 따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참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나미는 기쁜 척 연기를 했다. 이럴 때는 웃는 표정을 지어주면 상대는 안심하게 된다.
“그래요. 나미 씨가 신설팀에 들어와 주면 나도, 다른 동료들도 마음이 든든할 겁니다. 혹시 다른 질문은 있나요? 아무 거나 괜찮습니다.”
“아무거나요?”
“있군요? 해봐요. 뭐든 괜찮으니까.”
“회장님은 어떤 분이죠?”
순간 최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미는 혹시 불쾌감을 느낀 건 아닌지 우려했다. 자신이 무슨 관습 위반 행위를 했는지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지식 내에서는 결례 사항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 묻는 건가요?”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인간의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나미로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적의를 감지하는 데에는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
“얼마나 강한 분인지 궁금해서요.”
“……얼마나 강하느냐……. 정말 강한 분이시죠. 아마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일 겁니다.”
유지웅의 영향력은 이미 아득히 상승했다. 미국도 그의 앞에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는 일개 개인이지만 어느 단체보다 더 뛰어난 영향력, 파워를 발휘한다. 최윤이 말한 강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나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세상의 관습이나 상식은 어느 정도 흡수해서 유지웅의 사회적 서열 관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좀 더 자세한 확인이 필요해서 물어본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길 수 없어.’
어떻게 해서 지금의 몸이 되었는지는 불명이다. 하지만 지금 이 몸뚱이는 연약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끝없는 바다를 누비던 시절에 비하면, 이 연약한 인간의 몸은 수수깡이나 다름없이 나약하다.
인간들이 괴수라고 부르던, 본래의 몸으로도 그를 상대해서 이기지 못했다. 지금의 몸으로는 아예 상대조차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나미는 인간을 배우고, 인간 사회에 침투했다. 관련 학식을 빠르게 흡수하고, 효웅산업에 들어온 것도 때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먼저 알아야 했다.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규명해야 했다. 그래야 원래의 몸, 원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머뭇거리던 최윤이 이상하리만치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미 씨. 이런 질문, 결례라는 건 알지만…… 혹시 회장님 때문에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건가요?”
나미는 흠칫 했다. 설마 자신의 의도가 읽힌 것인가? 위장과 연기는 철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나미는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몸이 변화한 이유를 알고, 본래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지식을 흡수해야만 한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최윤은 납득한 모양이다. 나미는 안심해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는 남겨진 최윤의 쓸쓸한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