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356)
00356 알바 뛰는 회장님 =========================================================================
“보고서 정리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 내가 보는 게 아니라 상사가 보는 거야. 그냥 대강 슥 훑어봐도 내용이 한눈에 보이게 잘 정리를 해야 돼. 원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잖아?”
그렇게 말을 하던 박 대리는 서류를 건네는 척 하면서 슬쩍 손이 닿게 했다. 깜짝 놀란 정효주는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박 대리가 멋쩍은 듯 웃었다.
“왜 그렇게 떨어? 상사가 그렇게 무섭나?”
“아, 아니에요.”
정효주는 신랑한테 토끼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오해다. 그녀는 엄밀히 말해서 여우에 속한다. 그것도 꼬리 아홉 달린 불여우. 24년을 같이 지냈고, 살을 맞대고 산 게 3년인데도 아직도 신랑이 토끼로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말 다 한 셈이다.
당연히 지금 박 대리의 흑심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신랑이 함께 있을 때는 질투심을 자극하고 또 놀릴 겸 이용하면 좋았지만, 신랑도 없는데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귀찮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한 마디로 실익이 없다.
“이건 또…….”
뭐라고 업무 설명을 또 한다. 정효주는 지겨워졌다. 이제 막 입사한 인턴사원한테 저렇게 한꺼번에 가르친다고 알아듣기나 할까? 애초에 정효주는 업무를 그렇게 열심히 배울 생각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위장 취업이었으니까.
“그런데 둘, 단순한 동기 사이야?”
“네?”
열심히 듣는 척을 하면서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정효주는 정신을 차렸다.
“그냥 괜히 궁금해서.”
뭐라고 하지? 잠시 고민하던 정효주는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면 신랑의 암행에 방해가 될까 봐 적당히 무마하기로 했다.
“그냥 단순한 친한 학과 친구인데요. 왜 그러세요?”
“아하하, 그래?”
흡족했는지 박 대리가 밝게 웃었다. 꼭 자기가 승자라도 된 듯한 태도에 정효주는 조금 거슬렸다. 친구 사이라고 했지만, 그게 당신에 대한 호감 표시는 아닌데?
“정혜주 씨는 남자친구 있어?”
박 대리는 파일철을 정리하면서, 마치 지나가다가 가볍게 물어보듯이 질문을 툭 던졌다.
“남자친구는 없어요.”
거짓말은 안 했다. 남자친구는 없다. 남편은 있지만.
“근데 사귀는 사람은 있어요.”
정효주는 딱 그렇게 선을 그었다. 안 그래도 신입생 시절, 호의와 호감을 구분 못하는 남학생들 때문에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2학년 때는 신랑까지 온 오티에서 웬 선배가 공개 고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야, 누군진 몰라도 운 좋은 남자네. 정혜주 씨 같은 미인이랑 사귀고 말이야.”
의외로 박 대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마음의 정리를 한 건가 정효주는 안심했다.
어느덧 시계가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도 다 끝났는데 그만 퇴근할까?”
“네!”
정효주는 좋아서 밝게 대답했다. 박 대리는 재킷을 걸치며 또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한데 가볍게 맥주라도 한 잔 어때? 입사 첫날 기념으로 내가 살게.”
“괜찮습니다. 저는 일찍 들어가 보고 싶어요.”
“괜찮으니까 부담가지지 마. 원래 상사가 술 산다고 하면 거절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정말 괜찮습니다.”
“괜찮대도…….”
그렇게 말하면서 박 대리는 자연스럽게 팔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정효주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 본능적으로 박 대리의 팔을 쳐냈다.
여기서 본능적으로 쳐냈다는 게 중요하다.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탱커의 힘이 그대로 실려 버린 것이다.
“으아악!”
넘어진 박 대리는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게, 고통이 여간 심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정효주는 자기가 한 짓에 자기가 놀라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어, 어떡해…….”
연인 사이, 혹은 아주 친밀한 관계가 아닌 이상 남자가 여자 허리에 팔을 감는 건 잘못된 행동이다. 특히 직장 상사라면 성추행으로 몰려도 사실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녀가 당황한 건 일이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그냥 탁 쳐내고 이러지 말라고 쏘아붙이는 정도면 됐는데, 반사적으로 행동하다 보니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일이 커지면 신랑이 큰마음 먹고 나온 암행 사찰에 방해가 될 텐데…….
* * *
전후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멀쩡한 팔을 부러뜨렸다. 그래서 정효주가 경찰서에 와 있는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유지웅은 버럭 화를 냈다.
“감히 누구 마누라 허리에 팔을 감아!”
“……어떡하려구? 일 커지면 우리 기껏 위장 취업한 거 의미가 없잖아?”
유지웅은 일단 박 대리를 찾아갔다.
근데 팔이 부러졌다고 해서 가벼운 기브스 정도를 생각했는데, 의사 말로는 뼈가 아주 조각조각이 났다고 한다. 어디 차에라도 부딪친 거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 여자가 밀어서 이렇게 됐다니까 의사는 도저히 믿지를 못하는 눈치다.
“자연 치료는 기대하기 어렵고 힐러한테 치유받는 게 후유증이 안 남습니다.”
의사의 설명이었다.
힐러의 등장은 의료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외과 수술이나 외상은 힐 한 방이면 간단히 치유된다.
물론 힐러는 돈 벌이가 안 되는 의료계에는 종사하지 않지만, 보조 힐러만 해도 충분하다. 수술 후 봉합이나 목숨에 치명적이지 않은 외상은 하루 안에 말끔히 회복시킬 수 있다.
다만 환자 수에 비해 보조 힐러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게 문제였다. 치유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는데,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더군다나 몇 년 전 충전장비가 보급된 이후 보조 힐러들 다수가 의료 센터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 간간이 쉬는 날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할 뿐이다. 지금 의료센터는 만성적인 (보조) 힐러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 미친 놈이 무슨 깡으로 내 소중한 마누라 허리에 팔을 댔는지 버럭 화를 내려고 왔는데, 그럴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건 아주 사람 하나를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갑자기 정효주가 조금 무서워졌다. 혹시 침대 위에서 흥분해서 힘 조절 못하면, 자기도 저 꼴 나는 건 아닐까?
“왜 유진석 씨가 여기에?”
부러진 팔에 기브스를 하고 누워 있던 박 대리는 유지웅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뭔가 눈치를 챈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효, 아니 혜주한테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허리에 팔을 감으셨다던데, 그거 엄연히 성추행입니다.”
“가볍게 에스코트를 한 것뿐이야. 그렇다고 사람 팔을 이렇게 만드는 게 말이 되나? 무슨 여자가 힘이 그렇게 세? 난폭하게 사람을 밀어 넘어뜨리다니…….”
박 대리는 넘어지면서 바닥에 부딪쳐서 팔이 부러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가볍게 툭 친 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가해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왜 자네가 찾아왔지? 둘이 무슨 애인이라도 되나?”
“대리님이 허리를 만지니까 혜주가 놀라서 민 거잖습니까. 엄밀히 말해서 정당방위죠.”
“아, 글쎄 그냥 에스코트 하려고 한 것뿐이라니까. 내가 가슴을 만졌나, 엉덩이를 만졌나?”
“직장 상사라고 여직원 허리에 팔을 감아도 된다는 건가요? 좋아요. 그럼 과장님이랑 그 윗선 상사 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죄다 보고해버립니다? 우리야 어차피 하루 밖에 안 된 인턴이니 그만 두고 다른 데 가면 그만이구요.”
박 대리는 움찔했다. 유지웅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수틀리면 그만두면 그만이지만, 자신은 회사에서 쌓은 경력이 있었다. 성추행으로 소문나면 이직에도 애로사항이 피게 된다.
“……이번 일 소문 안 낸다고 하면 나도 팔 부러진 거 문제 삼지 않겠어.”
“허리 만진 거, 사과는요?”
“……하면 되잖아.”
그제야 유지웅은 정효주를 불렀다. 박 대리는 그녀를 보고, 다시 유지웅을 흘끔 쳐다봤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느 학교 동기가 여자를 대신해서 피해자를 대신 찾아와 협상을 벌인단 말인가.
“정혜주 씨, 허리에 팔을 올린 건 미안해. 무심코 에스코트한다는 게 지나쳤어.”
“사과 받아들일게요.”
일단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에 정효주도 풀어진 얼굴로 받아들였다.
박 대리는 순번을 무시하고 보조 힐러한테 우선 치료를 받고 쾌차해서 퇴원했다. 본래라면 며칠씩 기다려야 하지만 돈을 더 내면 우선적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다.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만 안 놔뒀을 텐데, 인생이 불쌍해서.”
처음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아예 매장시킬 마음까지 품었는데, 막상 팔이 조각조각 난 사진까지 보고 나니 그럴 마음이 사라져버렸다. 흡족하지는 않지만 일단 사과도 받았으니, 유지웅은 너그럽게 이 정도에서 묻어두기로 했다.
그 뒤로 박 대리는 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둘을 대했다. 더 이상 정혜주한테 치근거리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일을 그렇게 밖에 못하나?”
“내가 전에 설명했잖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아직도 복사 하나 제대로 못해? 그리고 복사 하면서 딴 생각은 왜 하나? 내가 신입 때는 그 시간에 복사 서류 한 자라도 더 읽고 숙지하려고 버둥거렸는데!”
“회사가 장난인 줄 아나!”
상사의 노골적인 갈굼이 시작되었다. 차라리 박 대리가 그랬다면 대놓고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리가 아니라 입사 1년 된 김석원 사원이 매일같이 못살게 굴었다.
보통 인턴 같으면 상사가 그렇게 갈구면 사색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듣기만 한다. 하지만 유지웅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짖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그런 태연한 태도가 더욱 김석원 사원을 자극했고, 거듭해서 갈구는 악순환을 낳았다.
“김석원 그 사람 왜 그런지 모르겠어. 아무리 봐도 박 대리가 시킨 거 같은데. 자기가 대놓고 못 나서니까.”
그날도 늦게까지 야근하고 퇴근하면서 정효주가 속상한 듯이 그렇게 투덜거렸다.
“우리 꼭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할 필요 있니?”
“왜? 난 재밌는데.”
유지웅은 느긋하게 대답하며 패드컴퓨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근무일지를 이어서 작성했다.
“어제 박 부장이 업체직원들한테 룸 접대를 받았고……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일주일에 4번이나 야근을 시켰고……. 이야, 회사가 아주 막장으로 돌아가네. 일반 사원들도 문제야. 사소한 비리는 비리라는 인식 자체가 없어.”
인턴 생활을 한 것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유지웅은 업무를 배우는 것은 뒷전이고,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나 관행 같은 것만 살폈다. 애초에 입사 목적이 평범한 직장인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만 들어도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보였다. 접대나 리베이트 등 가벼운 비리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직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나누었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알았으면 절대로 그런 이야기는 입에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는 볼 만큼 봤으니까 이제 그만 두자.”
분위기 파악은 충분히 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유지웅은 문득 박 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먼저 잘못한 주제에 팔이 부러졌다는 것만으로 큰소리치다가 마지못해 사과했으면서, 뒤에서는 김석원 사원을 종용해 한 달 넘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그를 괴롭혔다.
사실 화가 나지는 않는다. 워낙 격차가 크다 보니까 가소롭고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들이 누구를 상대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 우리 부서 회식 중이라던데. 가야 하는 거 아니니?”
“뭐 하러 가? 내일이면 관둘 건데. 어차피 너나 나나 박 대리 때문에 부서에서 왕따잖아.”
그 사건 이후 둘은 부서에 원만한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배후에서 박 대리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지만, 둘 다 일부러 말은 안 했다. 어차피 이제 관둘 때가 되었으니까.
다음 날 사직서를 내려고 출근한 둘은 부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무거운 것을 느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직원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 있나?”
둘은 곧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박 대리가 회식 자리에서 김정애 씨 다리 만지고 뺨에 뽀뽀했대. 그래서 김정애 씨가 사내 성희롱으로 부장님한테 직접 말씀드렸다던데?”
“김정애 씨면, 그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인턴?”
유지웅은 오늘 내려고 했던 사직서를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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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패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