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08)
00408 스파이는 팜므파탈? =========================================================================
유지웅은 문득 주먹을 내려다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꽉 쥐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한 번 숨을 고르고 다시 눈을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짜릿한 감촉이 온몸을 간헐적으로 훑고 지나간다.
‘설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몸 속에 존재하는, 반쪽짜리 퍼플 결정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거대한 힘을 직시하면 할수록, 체내를 휘젓는 짜릿한 감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다른 이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한 젊은 과학자가 일군 위대한 업적에 감탄하기 바쁠 뿐이다. 저것이 얼마나 거대한 힘인지, 그러한 힘을 지녀본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유지웅은 달랐다. 그의 몸에 품은 힘이 있기에, 그 커다란 에너지를 마음껏 휘둘러본 적이 있기에, 저 투명 구체 안에 갇힌 힘의 유혹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떠한 보석보다, 황금보다, 물질보다 더욱 탐이 난다. 저 거대한 에너지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걸 만들어낼 발상을 하셨나요?”
차분해진 유지웅이 묻자 최윤은 다소 멋쩍어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그린 결정체를 블루 결정체로 융합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만, 블루를 퍼플로 융합하는데는 실패했죠. 그래서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대학 시절 친구가 했던 장난이 생각나더군요.”
“장난이요?”
“예. 수많은 퍼스널 컴퓨터를 병렬 연결해서 수퍼컴과 비슷한 성능을 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녀석이 급하게 처리할 시뮬레이션이 있었는데, 학교 수퍼컴은 사용 신청이 밀려 있어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거든요.”
유지웅은 순간 피식거렸다. 그 친구라는 인물도 어지간히 괴짜인가 보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만약 다수의 결정체를 연결해서 그 에너지를 하나로 모은다면, 일시적일지라도 상위 결정체의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그럼 저 구체가 퍼플 결정체라는 건가요?”
거기서 유지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퍼플 결정체를 갖고 있고, 또 몸 속에도 보유하고 있기에 그 힘의 크기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것은 아무리 봐도 퍼플 결정체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제가 의도하고자 하는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실패요?”
“네. 원래 실험 의도는 결정체를 병렬 연결해 가상의 상위 결정체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만들어진 결과는 보다시피 전혀 엉뚱합니다. 저것은 결정체라기보다는, 닫힌 공간 안에서 결정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는 관측 모델입니다.”
실패를 인정하는 최윤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결과적으로 더 좋은 성과를 이뤘습니다. 지금까지는 결정 에너지의 흐름이나 패턴을 제대로 판독하지 못했습니다. 관련 기술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저 모듈 장치를 통해, 결정 에너지의 성질을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래 비아그라는 심장병 치료제로 개발하던 중 효과가 미미해서 버려지려던 약이라고 한다. 그러나 발기 촉진에 효과가 있는 것이 알려져 한순간에 사람들의 각광을 받았다.
폐쇄 재현 모듈 장치도 마찬가지. 본래 최윤의 의도와는 빗나갔지만, 오히려 결정체의 기초학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놀라운 장치가 된 것이다.
투명 구체는 하나의 닫힌 공간이다. 그 안에 존재하는 결정 에너지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내부에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그 순환 경로, 이동 패턴을 면밀히 관측함으로써 결정 에너지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알아낼 수 있게 된다.
블루 결정체가 250개나 필요했던 것은 그 닫힌 공간을 재현하기 위해 그만큼 고도의 출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정기적으로 블루 결정체를 갈아줘야 하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결정 에너지는 닫힌 구체 안을 순환하다가 장치를 종료하면 다시 결정체로 되돌아갑니다. 물론 그 방출, 순환, 복귀 과정에서 미미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미미한 수준입니다.”
안슐이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미국은 더 이상 결정체학의 1인자라고 주장하지 못할 걸세. 정말 위대한 업적이군.”
* * *
최윤의 자세한 발표를 들은 연구원들은 너나할것 없이 눈에 띄게 흥분했다. 그들은 이 모듈 장치가 앞으로 결정체 기초과학에 어떤 혁신을 가져다줄지를 알아차렸다.
인류는 결정체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 원리는 거의 깨우치지 못했다. 결정 에너지의 원리를 투영할 기술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듈 장치는 인류로 하여금 결정체 연구에 한 걸음 떼어놓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제니스가 아니고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장치다.”
가렌 박사는 한 마디로 그렇게 평가했다. 과학자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만드는 통랄한 정의였다.
이 모듈 장치를 만드는데 블루 결정체가 무려 250개가 들어갔다. 하나같이 최소 결정도 5,000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총 결정도는 무려 135만에 달한다. 결정체 원가만 따져도 135조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기기를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체 가격만 그렇다는 소리다. 농담이 아니라 웬만한 국가의 예산에 해당하는 장치였다.
블루 결정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유지웅이 아니고서는 감히 제조는 꿈도 꿀 수 없는 장치였다.
“이번 성과에 저는 진정 감탄하고, 또 만족하고 있습니다. 욕심 같지만, 이제 막 건설에 들어간 결정체 전용 입자 가속 장치도 하루빨리 완성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결정체 기초과학 학문이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공리에 발표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유지웅이 투자자이자 오너로서 소감을 짤막하게 전달하며 끝냈다. 연구자들은 모듈 장치를 만든 것이 자신이라도 되는 양 즐거워했다. 뒤풀이로 열린 파티에서 과학자들은 모처럼 짐을 벗어던지고 즐겼다.
“여기가 참 좋은 게 연구비 때문에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 하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말도 말게. 예전에 칼텍에 있을 때 극저온 원심분리기 펌프랑 분자체 살 돈이 없어서 내 친구가 늙은 미망인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었다니까.”
“나도 그 마음 알지. 이미 겪어봤으니까.”
“후원 파티에서 늙은 기부자들 눈치를 안 봐도 좋다는 게 참 편해.”
엄밀히 말해서 눈치를 안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 그것도 무슨 로비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없는 젊은 부자라는 게 축복이었다.
호기심 많은 젊은 거부는 가능성 있는 연구라면 아낌없이 지원을 해준다. 과학을 잘 모르는 이지만 젊어서 그런지 이야기도 잘 통하고, 깐깐하게 따지지도 않는다.
제니스 연구단지가 운영자금으로 20조 원이 넘는 돈을 예치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이야기였다. 연구소가 자금이 두둑하다는 것은 연구원들의 열의를 올려준다.
한창 사람들에 둘러싸여 축하를 받던 최윤은 문득 한쪽에 혼자 서 있는 나미를 발견했다. 너무 아름다운 꽃은 벌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지, 그녀의 주변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만요.”
최윤은 인파를 헤치고 나미에게 다가갔다.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녹색 눈동자는 치명적인 유혹을 자랑한다. 그녀를 대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떨리는 것은, 그도 남자이기 때문이다.
“나미 씨, 오늘 어땠습니까?”
“굉장한 걸 만드셨더군요.”
“아하하,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짤막한 감탄에 최윤은 쑥스러움을 느끼고 웃었다. 그러나 나미는 그처럼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의구심을 담고 최윤을 빤히 쳐다봤다.
‘모르는 거야?’
이 젊은 과학자는, 설마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모르는 것일까?
발표 설명을 들었을 때 나미는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닫힌 공간 안에 결정 에너지의 흐름을 재현해내는 장치라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결정체 자체가 고체화된 형태 안에 결정 에너지를 가둬둔 물질이니까. 그런 개념으로 보면 최윤의 설명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최윤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빠뜨렸다.
‘저건 레드 결정체야. 틀림없어.’
레지나는 나미의 결정체가 퍼플보다 상위 등급으로 진화했을 거라 추론했다. 그 때문에 괴수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모습을 얻었다는 것이다. 지금 나미는 결정도 탐지장비로는 결정도가 검출되지 않는다. 즉 신체 내부의 정밀 촬영을 하지 않고서는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는 게 곤란하다.
모듈 장치를 가동했을 때, 나미는 구체 안에 갇힌 엄청난 에너지의 폭풍을 느꼈다. 그것은 하나의 결정체 그 자체였다. 그것도 나미마저 빨아들이려고 한 거대한 에너지가 응집된 형태. 그것이 레드 결정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최윤은 모르는 눈치다. 자신이 구체 안에 재현한 에너지의 흐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괴물을 만들어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그렇게 당당하게 공개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나미 씨는 특히 결정 입자의 위상 배열 정리 이론 전문가라고 들었어요. 제가 만든 모듈 장치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서는 뛰어난 위상 배열 전문가가 많이 필요합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미력한 힘이지만,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미가 바라는 바다. 그렇게 긍정적인 대답을 하려는데 문득 낯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여기 있었군요, 최 박사님.”
“아, 졔이크 안슐 빈…….”
“그냥 안슐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 또한 위대한 과학자가 그리 불러주는 것이 기분 좋습니다.”
안슐은 어지간히 최윤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래 사귄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최 박사님처럼 뛰어난 과학자를 참 많이 좋아합니다.”
그러고 안슐은 농담처럼 덧붙였다.
“당연히 이상한 오해는 않으시겠지요?”
“아하하, 물론입니다. 안슐 왕자님.”
“그런데 여기 이 분은 누구……?”
“아, 소개를 안 해드렸군요. 이 분은 나미 연구원입니다. 현재 제니스 괴수 통제관으로도 일하시고 있으며, 제니스 공격대원이기도 한…….”
웃으며 눈길을 돌리던 안슐은 나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최윤의 소개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 주변의 시간만 정지한 듯이 모든 감각이 멀어져갔다.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우두커니 굳은 채 나미만을 빤히 바라본다. 나미는 순간 자신의 정체가 들켰나 싶어 속으로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빤히, 그리고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바라본 인물은 지금까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안슐은 충격에서 벗어난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단히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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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왕자님과 인어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