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43)
00443 봄, 봄, 봄 =========================================================================
황금빛 물결이 끝도 없이 넘실거린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금빛 파도가 이리저리 철썩이는 것처럼 보인다. 잘 익은 벼의 행렬은 마치 황금의 바다가 이어진 듯한 착시마저 준다.
“이야, 잘 익었다.”
“그러게. 씨 뿌린 게 6일 전이라고 했지?”
“이 정도면 오늘 내일 수확하면 되겠다.”
CERC는 폐지되고, 가진 모든 연구 자료는 압류되었다. 한국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CERC가 개발한 백신에 관한 자료 공개를 금지했다.
「어떤 숨은 부작용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위험 물질이다.」
CERC는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국제적인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런 기관이 개발한 백신이 진정한 약인지, 아니면 약 행세를 하고 있는 또 다른 병인지는 알 수 없다는 논리다.
일부 자세한 내막을 아는 국가들은 백신의 진정성까지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주장을 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 입장에서는 호남산 곡물의 영향권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CERC가 만든 백신은 사장해야 했다.
수직이착륙기 V-23을 타고 서울을 떠난 유지웅 커플은 30분 정도 걸려 호남평야에 도착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다본 황금빛 물결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저게 다 돈이다.
“오셨습니까.”
V-23이 착지하자 현장책임자가 부랴부랴 마중을 나왔다. 20년을 농업에 종사한 베테랑이다. 나이는 40대로 비교적 젊은 편이지만, 젊음과 연륜이 균형을 이뤄 사고가 유연하면서도 노련한 실력을 지녀, 총괄 책임자로 두기에 충분한 인물로 판단되어 고용한 인물이다. 일반 기업으로 비유하면 전무쯤 될까.
“아버지와 어머니는요?”
“두 분은 잠시 12구역 농지를 둘러보러 가셨습니다.”
“그래요? 참, 생산량은 얼마나 되나요? 적어도 올 상반기 끝나기 전까지 9억 톤은 수확해야 할 텐데.”
“현재까지 6억 톤 이상을 수확했습니다. 수확하는 즉시 정제해서 팔려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창고에 쌓아둘 틈이 없어 전부 놀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바이러스 괴수는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백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호남산 곡물이 공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희생 빈도는 눈에 띌 만큼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백만 명 전부가 바이러스 감염자는 아니다. 그 중 10만 명 정도가 실제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며, 나머지 190만 명은 감염자가 폭발을 할 때 옆에 있다가 휘말려 죽은 이들이다.
80억 인구 전체를 볼 때 이백만 명은 별 거 아닌지 모르지만, 하나의 재앙이 불과 몇 달 만에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거둔 실적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바이러스 괴수가 지구 전체에 퍼져 있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호남산 곡물과 백신을 찾았다.
“적자가 해소되어 두 분 얼굴도 요즘 아주 밝으십니다.”
“에이, 우리가 적자를 본 적은 없죠. 떼일 걱정 없다니까 엄마는 괜한 걱정을 하셔.”
바이러스 괴수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호남산 곡물은 서양 선진국 시장에서는 외면을 받았다. 안전성 문제 때문이다. 때문에 호남산 곡물은 주로 아시아(특히 일본과 중국) 지역을 위주로 소비되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경우, 1억에 가까운 인구 전체가 호남산 곡물에 99% 이상 식량을 의존했다. 당시 곡물의 안전성 입증을 위해 일본 전체를 임상 실험 장소로 이용한 것이다. 물론 국민을 굶겨죽일 수 없다 판단한 일본 신정권의 요청 때문이었다.
과학적으로 곡물은 안전했지만, 그것을 실제 식용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었던 한국은 얼씨구나 하고 수락했다. 곡물을 최소 가격으로 공급을 하고, 대금은 일본이 발행하는 장기 국채로 받는 대신, 유지웅한테는 한국 정부가 지급 보증을 서는 형태로 3자 약속을 맺은 것이다.
“사실 정부 파견자도 이제 슬슬 판매 루트를 확대해야 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운을 띄우고 있습니다. 우리야 일본에 파는 것보다는 WCO에 파는 게 훨씬 남죠. 바로 현찰이 들어오니까요.”
곡물의 효능을 당장 보기 위해서는 150kg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단기간에 먹어치우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제니스 연구단지에서는 저항 성분만을 추출한 알약을 정제했다.
한 정의 알약은 50kg의 곡물을 정제한 것이며, 3정의 알약을 먹으면 150kg의 곡물을 먹은 것과 똑같다.
WCO의 초대 의장 남기철은 호남산 곡물을 복용한 적 없는 60억 인구 개개인에게 3정의 알약을 무료로 공급하는 일을 첫 사업으로 내세웠다. 도합 9억 톤의 곡물이 필요하며 그 대금은 WCO가 유지웅에게 직접 지불한다.
WCO는 그 자원이 어디서 나왔을까?
바로 유지웅과 러시아, 그리고 각국 정부가 로스차일드에서 압류한 재상 중 일부인 10조 2,000억 달러를 WCO에 초기 자금으로 맡긴 것이다. 전액 현찰은 아니지만 그 정도 재원만 해도 9억 톤의 곡물을 매입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렇긴 하네요. 우리야 일본에 파는 것보단 당장 WCO에 파는 게 훨씬 남긴 하는데…….”
“어제도 일본 농림부 장관이 찾아왔습니다. 일 년 치 식량을 선결제하고 돌아갔습니다.”
“설마 현금인가요?”
“전과 같은 방식입니다. 국채 발행입니다.”
일본은 국민 대부분이 몇 년 간 호남산 곡물을 먹어왔다. 즉 바이러스 안전권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달리 말하면 WCO가 알약 혹은 곡물을 공급할 의무가 없는 지역이라는 뜻도 된다.
WCO의 알약 공급 사업은 ‘세계 시민 비면역자 전부에게 무료 예방 주사 놓기’ 업무에 속한다. 불을 끄고 나면 WCO가 더 이상 이 일을 이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애가 탈 일이다. WCO가 곡물을 매입해봤자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은 없다. 그리고 일본은 예방 접종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호남 곡물이 필요했다.
세계의 구호에 의지해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었고,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매입하려니 현찰이 없었다. 헐값이나 다름없는 일본 국채를 받고 식량을 팔아주는 곳은 호남평야뿐이었다.
유지웅은 정효주와 함께 부모를 찾아 제12구역으로 갔다. 현재 호남평야는 제200구역까지 구획을 나눠서 운영 중이었다. 어떤 구역에서는 벼를, 어떤 구역에서는 밀을, 콩을, 옥수수를, 채소를, 이런 식으로 다양한 곡물과 야채를 재배하는 중이다.
제12구역은 사과 구역이었다. 구역을 가득 메운 사과나무들은 탐스럽게 익은 열매가 가지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툭. 툭. 툭.
쉴 새 없이 사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과나무는 다른 단년생 곡식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나무 개체 자체는 금방 성장하지만 오래 생존하여 거듭해서 열매를 맺는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풍성한 사과를 떨어뜨리고 또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을 반복한다.
사과 같은 열매 수확은 벼와 밀과는 달리 사람 손으로 직접 열매를 따야 한다. 그런데 너나 할 거 없이 일주일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
구역 필지 중에서 과수 필지는 5%도 채 안 된다. 하지만 그 조그만 구역에서 생산되는 양이 세계수요 전부를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판을 치는 것이 바로 호남평야의 ‘클라스’다.
열매를 따는 데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다. 부채나 생계 문제로 자영업을 포기한 농민 전체를 고용하고도 모자라서 아르바이트생을 잔뜩 써야 했다. 이건 여담인데, 호남평야 덕분에 국내 농가 지원 문제가 거의 해결되었다고 한다. 호남에는 일거리가 넘쳐나기에.
“저기다!”
유지웅이 먼저 부모를 발견했다. 와이프 손을 잡고 다가가던 그는 멈칫 했다. 작업복을 입은 부모 옆에 웬 중년 남자들이 보였다.
“이, 이렇게 하면 됩니까?”
“여기 바구니 다 찼습니다!”
새것으로 보이는 작업복을 중년남자들이 어눌한 한국어로 열심히 비위를 맞추며 사과를 따고 있었다. 간간히 구슬땀을 흘리며 힘들어 하는 모습이 왠지 애처로워 보인다. 발음을 보면 한국인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지?
“아빠, 아니 아버지. 저희 왔어요.”
“어, 왔냐?”
“아니, 애기는 만삭인데 힘들게 뭐 하러 데려왔어. 저러다 애 잘못 되면 어쩌려고.”
아버지가 반기고 어머니가 나무랐다.
“탱커라서 그냥 돌아다니는 건 괜찮아. 일반 임산부랑 전혀 다르다고.”
“그래도 그렇지, 몸도 무거운 애 쉬게 해야지.”
“아니에요. 저도 같이 오고 싶어서 고집 부려서 왔어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머니.”
“근데 이 분들은 누구야?”
유지웅이 나타나는 바람에 차렷 자세로 경직되어 있던 중년인들은 그의 눈길이 향하자 흠칫 했다. 아버지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어, 일본 농림부 장관이라고 하더라. 성함이……?”
“하가세와 고다카입니다!”
“사과 수확 일일 체험을 꼭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일손이나 도와달라고 했지. 그래서 며칠째 도와주시는 중이다.”
유지웅이 쳐다보자 하가세와 고다카 장관은 더욱 긴장해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오십이 넘은 양반이 저러고 있으니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회장님 소리를 오래 듣다 보니 생긴 능력이 하나 있다. 별 건 아니고, 사람들 간의 서열을 파악하는 눈썰미다. 그냥 척 보면 대강 누가 이 중에서 제일 서열이 높은지 견적이 나온다.
“장관 중에서는 혼자 오신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발음이 조금 엉성한 편이긴 한데 그래도 한국어를 꽤 잘하시네요?”
“외할머니가 한국인, 어머니가 재일 교포십니다!”
“아, 그래요?”
“조국 덕분에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아버지가 며칠씩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사과 수확 체험을 맡기실 분이 아니다 싶었다. 아무래도 동포의 핏줄이 섞였다 보니 정이 조금 간 모양이다.
현재 일본 정계 중역에는 재일교포 출신이 상당수 진출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국가 생존을 위해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일본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한국 정부도 일본 내에 친한 파벌을 형성해두면 여러 모로 편리하기에 그들의 정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결국 타국 고위 공직자다. 그것도 농림부 장관. 그런 인물이 며칠씩이나 시간을 낭비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이유야 뻔하다.
유지웅도 심심해서 사과를 따는 일을 거들고 나섰다. 그리고 딱 20분 만에 지겹다며 포기했다. 정효주는 시부모 일을 도우려고 했지만 기겁을 한 시어머니가 뜯어말렸다. 결국 그녀는 신랑과 함께 그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 * *
“지금까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채무위험이 큰 국채로 대금을 대신했습니다만, 언제까지나 이런 무역 역조 현상을 감당할 수 있을 순 없지 않을까요?”
“그럼요?”
“이제 슬슬 대금 지불 방식을 변경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타국과의 형평성도 고려해야 하고요. 지난 몇 년 간 호남산 곡물의 안전성 임상 실험을 위해 국가 전체가 협조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덕에 일본은 밤 바이러스 피해에서 거의 벗어난 거 아닙니까?”
호남 곡물 판매 루트가 열렸다. 아니, 완전 개방되었다.
예전에야 서구 시장에서 외면 받고 팔 곳이 별로 없다 보니 선심 쓰는 정책으로 국채 따위를 대금으로 받고 팔아줬다. 국채를 받은 것은 유지웅이지만(정확히는 농업법인), 한국 정부가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실질적인 위험을 부담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너도 나도 팔아달라고 애원하는 곳이 널려 있는데, 뭐 하러 현찰도 안 주는 나라에?
“문제가 좀 생기지 않을까요? 일본 현찰 지불 능력도 없을 텐데 갑자기 대금 방식을 바꾸라고 하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른 국가와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하고요. 왜 일본은 현찰을 안 받느냐고 조용히 항의하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안 됐네요. 하가세와 코다카던가? 그 재일교포 출신 장관이라는 분, 여기까지 날아와서 며칠째 땀 흘리고 있던데.”
“교포 출신이긴 하나 결국 타국 정치 인사일 뿐이죠. 국제 관계는 비정한 법입니다.”
청와대 외교수석은 자못 비장한 태도로 말했다. 그에게는 애석한 일이지만 유지웅은 별로 그 일에 관심이 없었다. 알아서 하시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그는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아, 이런 건 어때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제가 일본에 있는 고미술품을 공개적으로 사겠어요. 그 대금으로 식량이랑 결정체 사가라고 하면 되잖아요?”
현재 일본은 모든 식량과 결정체 에너지자원 수입을 전적으로 한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유지웅의 영향권 아래 있는 품목이다.
“일본에 남아 있던 한국 유물은 거의 다 수집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유지웅이 일본에서 ‘밀수’로 한국 유물을 긁어모은 것은 너무 유명해서 이제 그냥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비난하지 않는다.
개인 소장품이긴 했지만 유지웅은 사립박물관을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공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비를 들여 약탈 문화재를 찾아온 공을 치하해서 감사패를 수여해야 한다고 난리다.
“우리나라 유물은 거의 다 수집했으니 이제 일본 고미술품도 한 번 수집해 보려고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의사 타진을 해보겠습니다. 생각하시는 거래 규모는 얼마나 되시는지요?”
말이 의사 타진이지, 그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의 심기를 잘못 거슬렀다가는 백만 불곰이 물어뜯을 것이다.
“그냥 무제한?”
“무제한이요?”
“네. 매입할 수 있는 대로 다 매입할게요. 아, 그러려면 박물관 건물을 새로 하나 더 지어야 하나? 지금 있는 건 한국 유물 전용이니까 일본 유물 전용으로?”
“……알겠습니다. 그리 추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매입 대금은 채권으로 할게요.”
“채권이요?”
“네. 채권 새로 발행해서 그걸로 매입할게요. 얼마 전에 돼지저금통, 아니 은행도 하나 만들었으니 발행 업무는 그쪽 통해서 하면 될 거 같네요.”
외교수석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오간 논의가 훗날 국제 금융 경제 역사에 어떤 식으로 서술될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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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외교수석은 떠올렸다. 새로운 기축화폐가 시작된 그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