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68)
00468 끝나지 않은 습격 =========================================================================
‘이 사람은?’
‘이 남자들은?’
‘저 시계는?’
세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 얽혀 서로를 탐색했다. 최윤과 장태준은 구면이지만 데면데면한 사이. 서로 접점이 거의 없다 보니 전에 한 번 인사한 거 빼고는 친해질 계기가 없었다.
칠드그린은 두 남자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사적으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EIS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지웅에게 미국을 약속받은 남자로서, 장태준과 최윤을 모른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 남자가 세계 최강 공격대 전술가…… 그리고 이 남자가 세계 최고의 결정체학 연구자…….’
칠드그린은 묘하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세계 최고. 그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 비록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양지로 드러낼 수 없는 첩보계에서 일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남자로서의 본능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법.
최윤과 장태준은 물론 칠드그린이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묘한 익숙함을 강하게 느꼈다. 바로 그가 왼손에 차고 있는 시계였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저거, 공대장님 시계 아니야?’
시계를 잘 모르는 최윤은 왠지 눈에 익은 디자인에 갸웃했다. 반면 장태준은 한 번에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저게 도대체 왜 저 남자에게?’
날카로운 눈빛이 불현듯 칠드그린을 쏘아 보았다. 바위도 꿰뚫을 기세에 그는 흠칫 했다. 그 강렬한 눈빛에서, 칠드그린은 상대가 동류라는 것을 알아보고 말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칠드그린 페이커라고 합니다.”
이미 장태준에게는 인사를 한 터라, 칠드그린은 최윤에게 그렇게 인사를 했다. 은근슬쩍 왼손을 가리면서. 그럼에도 장태준의 시선은 시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제니스 공격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인 두 분을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최윤이라고 합니다. 한국어가 유창하시군요.”
“동아시아 관련 정보기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호? 그런 걸 말해도 되는 겁니까?”
“현역 요원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웃는 얼굴로 대답하면서 칠드그린은 진땀이 났다. 장태준, 이 사람아! 시계 좀 그만 쳐다보라고!
“그 시계, 혹시 UAE의 안슐 왕자가 최고가로 낙찰 받은 파텍필립 모델 아닙니까?”
흠칫.
정곡을 찔린 칠드그린보다 오히려 최윤이 더 흠칫 하고 놀랐다. 유지웅의 사람치고 안슐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게다가 시계 이야기라면 언뜻 기억이 난다. 원화로 84억에 낙찰 받은 시계를 안슐이 유지웅에게 선물했고, 그가 본격적으로 시계를 탐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의 방에는 고급 시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유지웅은 그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았다. 몇 몇 시계에 관심 있는 이들이 행방을 궁금하게 여겼으나, 누가 감히 그런 걸 물어볼 수 있을까.
닳는 게 아까워서 집에 모셔두기만 한다는 둥, 누군가에게 선물을 했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많았다. 헌데, 지금 저 미국 남자가 차고 있다고?
“……맞습니다. 선물을 받았습니다.”
결국 칠드그린은 멋쩍게 웃으며 인정을 하고 말았다. 긍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연히 뒤로 감췄던 손을 당당하게 꺼내게 되었다.
“……놀랍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귀하에게 그 시계가 있다니.”
“알아보시는 그 안목이 더 대단합니다.”
“저도 파텍필립은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장태준은 왼손을 슬쩍 들어 보여주었다. 은빛의 광채가 반짝인다. 스캔을 마친 칠드그린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 모델은 그도 알고 있다. 아마 천만 원쯤 할 것이다. 일반인은 평생가도 차보지 못할 고가품이지만, 파텍필립 제품 중에서는 싸구려 중의 싸구려다.
“레플리카입니다.”
“……저런.”
장태준의 덧붙임이 칠드그린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본제품이 천만 원인데, 진품도 아니고 레플리카라니.
한편 최윤은 오늘 처음 만난 게 분명한 두 남자 사이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부드러워지자 의아했다. 둘 다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인 건 알겠는데, 같은 회사 제품을 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질감이 생기고 뭐 그러는 건가?
이해를 못하는 그를 위해 장태준이 조용히 속삭였다.
“회장님의 친구입니다.”
“……아.”
“아마 극비일 겁니다.”
“장 팀장님은 어떻게 그걸?”
“저 시계를 차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
칠드그린은 만족했다. 자신이 조사한 바로는 장태준 또한 시계와 차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 물론 자신만큼이나 시계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눈에 이 시계가 가진 의미를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유지웅이 애지중지하던 고가의 시계를 차고 온 미국 남자. 장태준은 그 의미를 바로 꿰뚫어본 것이다.
“자리를 옮기실까요?”
칠드그린은 둘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록히드마틴의 회장이 거주하는 저택답게 정원은 넓고, 화려했다. 물론 흑석동 저택을 자주 방문했던 두 한국 남자는 정원이 꽤 넓다는 정도의 인상밖에는 받지 못했다.
“XS-3 구매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예. 미 정부도 판매에 적극 협조하고 있어 올해가 가기 전에는 무사히 자립추적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의 MD감시망 일부를 차용하고 있었다. 적당히 돈을 주고 시스템을 빌려 쓰는 것이다.
장태준은 이게 내키지 않았다. 이래서야 아무리 보안에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레이드 노하우가 결국 미국 측에 넘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괴수 추적시스템의 완벽한 자립 구축은 그의 오랜 꿈이자, 조직을 위한 큰 과제이기도 했다.
“훌륭한 결정입니다. XS-3에 내장된 차세대 3차원 광역 스캐닝 모듈, 즉 BET-1은 적어도 20년은 이 분야를 주름잡을 획기적인 성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가가 다소 비싼 것 빼고는 약점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제니스를 위한 제품이죠.”
장태준은 흠칫 했다. 칠드그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제가 BET-1 때문에 록히드마틴으로 결정한 것은 회장님 외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어떻게……?”
칠드그린은 말을 아꼈다. 침묵으로 그를 응시하던 장태준은 납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귀하는 단순한 회장님의 친구가 아니었군요.”
장태준은 보잉, 록히드마틴 등 굵직굵직한 항공산업체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해오다가 최종적으로 록히드마틴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바로 유지웅이 아무렇지 않게 건넨 자료 때문이었다.
「장 팀장님, MD와 유사한 우리만의 독자적인 종합추적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고 하셨죠?」
「아, 네. 기억해주시는군요.」
「그래서 카탈로그 한 번 훑어봤는데, 이거 어때요? 록히드마틴이 만든 XS-3라고, 진짜 좋은 부품이 들어가 있대요. 근데 제조 단가가 너무 비싸서 미 국방부가 안 사주려나 봐요.」
「진지하게 스펙을 검토해보겠습니다. 헌데 얼마까지 자금을 집행할 수 있을까요?」
「제 철칙 아시잖아요? 고비용, 고효율.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구매하세요. 사소한 구매 내역까지 일일이 물어보실 필요 없어요.」
당시 회장이 건네준 자료는 한눈에 봐도 외부 유출이 국가적으로 금지된 기밀자료였다. 공격대장은 어떻게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눈앞의 남자를 보니 답이 나온다.
“그 시계가 대가였습니까?”
“No. 이것은 친분의 표시로 준 선물일 뿐입니다. 회장님과 제 관계는 두 분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칠드그린은 이번에는 최윤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마그테리돈 사(社)의 오픈형 3차원 자기공명추적장치를 구매하러 오셨지요? 폐쇄 모듈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최윤은 잠시 멈칫 했다. 그것은 아직 유지웅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개발 사실 자체가 아직 마그테리돈 회사 밖으로 흘러가지 않은 극비였기 때문이다.
최윤도 우연한 기회에 회사 내부 사람과 인맥이 닿아 가까스로 손에 넣은 정보였다. 그 장치가 자기가 알고 있는 성능대로라면, 그는 유지웅을 졸라서 마그테리돈 회사 자체를 송두리째 살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헌데 이 남자가 어떻게 그걸?
“오태석 연구원이 정말 자기 인맥으로 마그테리돈이 극비에 붙이고 있는 개발 사실을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것도 귀하가…….”
최윤, 그리고 장태준은 가벼운 짜릿함을 느꼈다. 가끔 유지웅이 한국 정부 이상으로 미국이나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 그때에는 그것이 단순히 자문단의 분석인 줄 알았다.
“단순히 정보기관에서 일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군요.”
“EIS 부국장입니다.”
“…….”
둘은 가볍게 전율했다. EIS가 어떤 곳인지는 대충 안다. CIA 해체 이후, 아시아를 담당하는 미국 최고의 해외첩보기관이 바로 EIS다. 그곳의 부국장이라는 것은 사실상 최고의 실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정보를 차단하면 즉시 미국은 아시아에 관해서 눈이 멀게 된다. 더 두려운 것은 눈이 멀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국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치명적인 칼이다.
‘어떻게?’
미국을 찌를 수 있는 비수. 그것은 이 남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양날의 검이다.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되면 이 남자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유지웅조차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런 위험한 지위에 있는 남자가 설마 하니 84억짜리 시계 하나에 등을 돌렸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자신들이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대가를 약속받았을 것이다.
‘설마 백악관까지?’
문득 장태준은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EIS 부국장. 언제든 정치에 뛰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지위다. 유지웅이 후원자로 나서면 상원의원은 따논 당상이고, 대선도 노려봄직하다.
‘개연성은 있다.’
남기철 의장을 대통령으로 밀어 넣으려고 WCO까지 창설한 인물이다. 그 스케일과 배포는 감히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갑작스럽게 든 가정이었지만 장태준은 납득이 갔다.
백악관의 주인. 그 정도 대가가 아니고서야 이 남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유지웅을 위해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상당한 고민을 했습니다. 아직까지는 제 존재를 아는 인물은 회장님 부부뿐이라서요.”
최윤과 장태준은 주의 깊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셋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제니스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의 입장은 여러분과 미묘하게 다릅니다만.”
칠드그린이 유지웅을 위해 일하는 것은 그가 거스를 수 없는 국제 사회의 패왕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일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가 미국을 ‘어여삐’ 여기게 만들어 조국의 광영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겠다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었다.
“항상 회장님을 거쳐야 한다는 것에서 근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실무진 선에서 충분히 합의를 거쳐 끝낼 수 있는 일인데, 보안 때문에 반드시 회장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것도 번거로웠고요.”
이번에 록히드마틴의 XS-3, 마그테리돈의 오픈형 자기공명추적장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때에도, 얼마나 번거롭게 손을 써야 했는지 아마 이 둘은 모를 것이다.
“그래서 회장님의 양해를 얻어 여러분에게 제 존재를 밝히게 되었습니다.”
장태준과 최윤은 짜릿함을 느꼈다. 유지웅이 십 년, 이십 년 뒤를 내다보고 미국에 심어둔 막후 실력자. 선뜻 그 사실을 밝힌 것에서, 유지웅이 자신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라고 알고 있는 게 본인들에게는 그나마 행복한 결과가 되려나?
* * *
“대단하십니다! 로스차일드의 몰락에는 귀하의 노력이 숨어 있었군요!”
“뭐, 저도 회장님 밑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로스차일드를 노리고 있긴 했습니다.”
“그나저나 이 자리에 그 분이 없는 게 좀 아쉽긴 하군요. 마침 의자 하나도 비어 있으니 더 생각이 납니다.”
“그 분이라면…… 아?”
“아! 그렇군요. 저도 어쩐지 한참 전부터 뭔가 허전하긴 했습니다.”
야외 테이블에서 술잔을 나누는 세 남자는 그제야 비어 있는 의자에 눈길이 닿았다. 사람은 셋이지만 의자는 네 개. 마치 처음부터 누군가를 위해서이기라도 하듯 마련된 의자였다. 세 남자가 공감하는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없는 ‘그’를 위해 갖다 놓은 모양이다.
“WCO 미국 지부 설립 때문에 방미 예정이 잡혀 있으셨는데 아쉽게도 오지 않으신 것 같군요.”
칠드그린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세 남자는 이 자리에 없는 남기철을 위해 다시 잔을 부딪쳤다.
============================ 작품 후기 ============================
칠드, 태준, 최윤.
세 남자는 그렇게 자유의 여신상 아래에서 향을 피워놓고 결의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처음 빨대를 꽂은 시기는 각자 다르나 빨대가 영원히 빠지지 않게 해주소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그들을 어여삐 여긴 유느님 강림.
“자, 이것을 잘 보거라. 빨대 세 개가 이렇게 뭉쳐 있으면 어떤 경우라도 부러지지 않지만, 이렇게 하나씩 흩어져 있으면 조그만 힘에도…… 끄응! 왜 이렇게 안 부러져?”
“우리 빨대는 티타늄제입니다.”
“이래서 미제란!”
자기도 여신상결의에 참가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소심하게 기웃거리던 남모씨는 그 모습들이 너무 바보 같아 보여 등을 돌렸습니다. 빨대 바보가 되고 싶진 않았거든요.
“안 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하지만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칠드그린이 외쳤습니다.
“도망친다!”
“빨대! 빨대를 던져!”
“맞았다! 빨대를 맞았으니 멀리 도망치지 못할 거야.”
빨대를 맞고 점점 힘이 빠지는 남모씨, 과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