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75)
00475 흔들리는 하얀 집 =========================================================================
“레이드는 순조롭습니다.”
괴수들이 날뛸 때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는데 다행히 제니스는 순조롭게 척척 무찔러 나갔다. 아이오와주를 나타낸 화면에 가득한 점이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비시 행정부는 내심 안도했다.
“이대로라면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완전 진압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공격대는?”
“……현재 안전지대가 설치된 도시를 거점으로 해서 지역 방어 작전을 실행 중입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구경만 하고 있다는 소리다. 비시는 내심 안타까웠다. 제니스와 잘만 협동 작전을 펼치면 경험도 쌓고, 뭔가 국제 사회에 으스댈 수도 있을 텐데.
“1급 재난등급 때문에 시민들이 혼란에 빠진 건 어찌 됐나?”
“러시아 때문에 혼란이 더 부풀긴 했지만 어찌어찌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니스가 대대적인 지원을 와준 것 덕분에 혼란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증시 폭락과 외국 자본 이탈 현상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1급 재난등급이 얼마나 심각한 경우에만 떨어지는지를 대놓고 떠들어댔다. 사람들 보라고 잘 정리한 자료를 여러 언어로 번역해서 배포하기까지 했다.
블랙 몹이 출현해도 1급 재난등급은 안 떨어진다. 대중은 이 설명에 주목을 했다.
덕분에 미국은 더욱 큰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안전지대가 설치된 도시, 혹은 해외로 도주하기 위해 짐을 쌌다. 안전지대가 없는 지역은 텅텅 비어서 사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주정부조차 그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꾸려서 이동하기 바빴으니 말을 다한 셈이다. 다행히 제니스가 지원을 와준 덕분에 어느 정도는 혼란을 상쇄할 수 있었지만, 말 그대로 어느 정도일 뿐이다.
“급한 불은 일단 껐습니다. 하지만 이후가 더 큰 문제입니다.”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잃은 신용을 되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제니스로부터 1급 재난등급을 받는 영광 아닌 영광을 누렸다. 그 사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며칠 간 미국이 대대적으로 겪은 혼란은, 더 이상 미국이 안전한 국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말았다.
그동안 미국은 한국을 제외하고 괴수로부터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몇 차례에 걸친 블랙 몹 및 레드 몹의 난동이 있었지만,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을 했다는 점이 더욱 국가 방위 능력에 대한 신뢰를 키워 주었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그런 노력이, 1급 재난등급 선포 한 마디에 전부 좌절되고 말았다.
“멍청한 곰 따위가.”
비시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 1급 재난등급을 선포한 제니스? 아니다. 바로 1급 재난등급이 어떤 것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러시아 녀석들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제대로 견제구를 얻어맞은 셈이다. 그것도 가볍게 내지른 견제구에 치명타가 터졌다. 지난 날 다양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제국의 위상을 유지해왔으나, 이제부터는 좀 심하게 비틀거릴 거 같다.
“서부지역 일부 주정부에서 연방 정부의 외교력과 국방력만을 믿고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 간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알고 있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지.”
이번 혼란 때문에 여러 주에서 연방 정부에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까지 생겼다. 덕분에 주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피난 행렬이 더욱 혼잡해진 것도 있었다.
“각하, 추락한 위성에 관한 진상 조사 중간 보고서입니다.”
“요약해서 말해보게.”
“현재로서는 일련번호 NPS-14 위성이 최초로 통제 프로그램에 어떤 오류가 생겨 자기 궤도를 이탈한 것으로 사고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류?”
“그렇습니다. 불행히도 위성 NPS-14가 일으킨 오류가 연동된 인근 지역의 다른 11개의 위성까지 전파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체 위성을 어떤 식으로 만들었기에 그런 연쇄 사고가 순식간에 일어나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나?”
“물론 겹겹이 안전장치가 되어 있습니다만, 사고 당시 그 안전장치들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은 것으로 현재 추측되고 있습니다.”
“지겹군. 추측, 추측! 자네들은 참 속편하겠어! 진상을 몰라도 그냥 추측된다고만 떠들어 대면 되니!”
비시의 호통에 참모진은 찔끔했다. 그의 분노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대로라면 재선은 당연히 물 건너 갈 것이며, 미국 역사상 임기 중 제일 많은 국난을 겪은 비운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인재가 불러온 천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시스템 고장이든 오류이든, 아무튼 사고로 추락한 위성 때문에 놀란 레드 몹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 난동이 연쇄 현상을 일으켜 아이오와주 전체로 퍼져나갔다. 미국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재수가 없는 일이었다.
설마 하나 ‘무언가’가 괴수 난동에 연막을 피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위성을 떨어뜨렸을 거라고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각하! 큰일입니다!”
비명을 지르다시피 뛰어 들어온 보좌관의 모습에 비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이제 겨우 수습이 될 조짐이 보일락 말락 하는 판에, 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저리 숨이 넘어갈 듯이 뛰어 들어온단 말인가?
“뭔가? 무슨 일인가?”
“멩크 특수형무소 죄수들이 반동을 일으켰습니다! 형무소장 이하 직원들을 전부 사살하고 교도소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외부에서 도와준 것 같습니다!”
“멩크 특수형무소?”
비시는 조금 떨떠름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큰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국가 통제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형무소 하나가 전소된 게 뭐가 큰일인가?
“각하, 멩크 특수형무소면 전 CIA 국장 토미 에슨이 복역하고 있는 곳입니다.”
“뭐라고?”
그제야 비시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정신을 차렸다. 토미 에슨. 공화당인 그로서도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인물이다.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 혹시 쓸 만한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을까, 회유가 가능하지는 않을까 해서 면담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과격하리만치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질려 포기하고 더 이상의 접촉을 끊었다.
그 뒤는 어찌 되었나. 예상했던 대로 CIA가 최윤을 암살 기도하는 등 다양한 테러 활동으로 행정부의 속을 썩이지 않았던가. CIA가 해체에 이르기까지는 결국 토미 에슨의 그림자가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던 셈이다.
그런 인물이 죽을 때까지 복역해야 하는 교도소에서 죄수 반란이 일어났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설마 토미 전 국장이 괴수 난동을 틈타 탈옥을 시도했다는 말인가?”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 자도 죽을 때까지 순순히 감옥에 갇혀 있을 마음은 없을 겁니다. 여차하면 그 자를 도울 부호 세력도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위험합니다. 그 자는 로버트 국장 이상으로 크나큰 해를 가져올 겁니다.”
로버트는 최윤 암살을 지시했다. 헌데 토미 에슨은 그런 로버트의 선배다. 선배가 후배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려고 탈옥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을 거 같지는 않다. 이거 큰일 났다.
느닷없는 토미 에슨의 반란 및 탈옥 사실에 안보 회의 멤버들은 더욱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괴수 난동, 국가 혼란, 떨어진 국제 사회의 신뢰 복구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널렸는데 거기에 잊혀진 정치범 하나까지 두통거리로 가세했다.
“저, 각하. 중요한 건 토미 에슨의 탈옥이 아닙니다.”
비명을 지르다시피 들어왔던 보고자는 회의장 분위기가 자신이 뜻한 바와 다르게 흘러가자 당황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비시가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니? 방금 자네 입으로 멩크 형무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최윤 박사가 행방불명입니다. 멩크 형무소 이후로 행적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뭐라고? 최윤 박사가?”
“예. 토미 에슨을 만난 직후 위성 사고가 벌어졌고, 그 뒤로 최윤 박사의 행적이 파악되지 않아서…….”
보고자는 말을 흐렸지만 비시는 그 뒤에 생략된 끔찍한 가설을 읽을 수 있었다. 자연히 안색이 새파래졌다.
“설마 최윤 박사도 반란에 휩쓸렸나?”
“……현재로서는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당시 괴수 난동 때문에 대피령이 떨어진 채였으니까요. 만약 최윤 박사가 형무소 내 대피지역으로 피했다면 반란에 휘말렸을 수도…….”
비시는 혼절할 뻔했다.
1급 재난등급? 러시아의 견제구? 주정부의 불신? 시민 혼란? 그런 것들과는 일절 비교도 안 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 * *
“각하, 제니스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키틴 대통령은 요즘 크레믈린 궁에서 미국이 다방면으로 얻어맞는 꼴을 기분 좋게 보고 있었다. 참 재수도 없지. 위성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동시 낙하 사고가 벌어지며, 신이 얼마나 미워하기에 그 사고에 발맞춰 괴수들이 사방팔방 난동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협조? 무슨 협조를 바라는 건가?”
키틴 대통령은 약간 의아했다. 이 시점에서 특별히 러시아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아이오와 주는 괴수들로 혼잡한 카오스가 펼쳐졌다지만, 제니스의 능력을 생각하면 진압은 쉽다. 러시아의 지원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만약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러시아의 힘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라며 협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어느 선의 결정이지?”
아무리 제니스가 대단하다 하지만 일개 대원 혹은 부서장이 러시아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키틴의 예감은 들어맞았다.
“제니스 공격대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뭔가 있어.”
예상대로다. 저런 자기편의를 위한 보류성 발언을 러시아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인물은 그밖에 없다.
헌데 무슨 뜻일까? 미국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러시아의 도움을 바란다? 그 경우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미국과 제니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여지가 있었던가?
“베데메르프를 불러! 어서!”
키틴은 충직한 오른팔을 불러 자세한 조사를 명령했다. 그는 모든 업무를 미뤄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사 보고가 올라올 때까지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틀림없다. 뭔가 있어.’
러시아는 제니스와 우호 관계를 쌓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과거 중국을 징벌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CERC 점거 및 로스차일드를 탕진하는 데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ISIR 1순위 등급을 따내는 등 제니스에 대한 입지를 강화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미국과 제니스 간의 보이지 않는 영향 관계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CIA 테러 등으로 인해 제니스는 한동안 미국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결국 어떤가?
제니스가 쓰는 레이드 종합지원장비는 전부 미제다. 조기경보기? 통합 위성 링크 시스템? 러시아에는 그보다 더 좋은 제품들이 넘쳐나지만, 유지웅의 머릿속에는 ‘그래도 무기는 미제가 낫지 않나?’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비단 무기뿐만이 아니다. 경제, 외교, 기술적으로 한국과 미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키틴은 그 고정관념을 깨주고 싶었다. 러시아가 얼마든지 미국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미국보다 더 좋은 무기를 주문자 취향에 맞춰 생산해줄 수 있으며, 경제 및 외교적으로도 미국 이상 가는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이 수십 년 간 한반도에 쌓아온 영향력은 너무 컸다. 러시아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세월의 벽을 허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각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베데메르프가 보고서를 들고 올라왔다. 잔뜩 상기된 후배의 표정에서 키틴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뭔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괴수 난동으로 미국 전체가 혼란스러운 와중, 아이오와주 멩크 형무소에서 토미 에슨을 주축으로 죄수들이 반란을 일으켜 교도소 직원들을 전원 사살하고 탈옥했습니다. 당시 방미 중이던 최윤 박사의 행적이 끊긴 시기와 일치합니다. 최윤 박사는 그 뒤로 줄곧 행방불명입니다.”
이래서 키틴은 베데메르프를 가장 좋아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간결하게 정리해서 설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키틴의 표정도 잔뜩 상기되었다.
“최윤 박사라면 제니스 회장이 가장 아끼는 두뇌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의 분노가 작지 않을 겁니다.”
유지웅이 최윤의 요청 한 마디에 결정체 250개 등, 140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움직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최윤 박사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전무합니다. 설령 죄수 반란을 어찌어찌 피해 탈출했다 해도 괴수들이 우글거리는 지역을 거쳐 안전지대로 탈출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합니다. 현재 미 정부도 반란에 휩쓸려 사망했다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애석한 일이로군.”
키틴은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며, 잠시 눈을 감고 이제 막 피어오른 젊은 과학자의 죽음에 명복을 빌었다.
베데메르프가 낮게 강조했다.
“제니스는 분명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러시아의 힘을 필요로 할 겁니다.”
키틴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베데메르프는 그가 사색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지금 내리는 선택이 러시아의 백 년을 좌우할 것이다.
마침내 키틴이 눈을 떴다.
“러시아의 친구가 보복을 원한다면, 응당 모든 힘을 아끼지 않고 도와야겠지.”
“알겠습니다. 이번엔 유럽이 아닌 미국이니, CERC 점거 작전 이상의 전력을 갖추어서…….”
“안 돼. 거친 방법은 쓰지 말게.”
“예?”
의아한 베데메르프가 얼굴을 들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키틴의 모습이 기이하게 차가워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러시아는 부드러운 나라라고 비시 놈한테 알려줄 생각이니까.”
============================ 작품 후기 ============================
저 부드러운 남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