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477)
00477 흔들리는 하얀 집 =========================================================================
백악관. 한때 세계의 왕궁으로까지 불렸던, 현대 국제 정치의 중심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악의와 비열함, 모략을 뚫고 이겨내야 가까스로 다다를 수 있는, 그야말로 정계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곳.
허나 이 하얀 궁전의 주인은 지금 심장에 족쇄를 단 심정으로 접객실을 향하는 중이었다.
뒤따르던 보좌관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천천히 문손잡이가 돌아가자 비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문이 열리면, 이제 한입에 그는 물론이고 미국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젊은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오셨습니까.”
유지웅이 표정 없이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통역관이 옆에서 통역을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잠깐 게임했어요. 지루하진 않았어요.”
지루하진 않았다? 미합중국 대통령 앞에서 태연히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마 눈앞의 젊은이 말고는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괴수 진압은 거의 마무리 되었습니다. 아마 하루 이틀이면 종료될 것 같군요.”
“귀 공격대의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뭘요,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비시는 이번에 또 한 번 제니스의 힘을 실감했다. 미국 공격대로서는 손을 쓸 도리가 없던 무차별 레이드를 손쉽게 마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미국 공격대라고 레드 몹을 못 잡는 것은 아니다. 방어장비의 보급은 상업적인 레이드의 길을 열었다. 물론 아직은 한국이 최전방을 달리고 있지만, 미국이 조심스레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추세였다.
레드 몹 레이드 상업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원의 안전이 중요하다. 한 번 잡을 때마다 사망자가 나와서야 어디 상업 레이드가 가능하겠는가. 적어도 수백 번에 한 번 사망자가 나올까 말까 한 정도는 되어야 상업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상업화 초기를 걷고 있는 미국은 다수의 레드 몹이 동시에 날뛰면 손 쓸 도리가 없다. 한 마리 잡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여러 마리가 뭉쳐 있으면 정말 답이 없기 때문이다. 삿된 말로 견적이 안 나온다.
그러나 제니스는 다수의 레드 몹이 날뛰어도 피해 없이 레이드를 마칠 수 있었다. 유지웅이 없는 예비대로도 그게 가능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장비와 숙련도의 차이였다.
숙련도는 말할 것도 없다. 제니스 예비대는 지구상 어느 공격대보다 레드 몹 레이드 경험이 뛰어나다. 블랙 몹도 몇 번 잡아본 그들에게 레드 몹 레이드는 어쩌면 별 거 아닐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장비의 차이. 이것이 미국 공격대와 차이를 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 대원이 삼종 S급 장비로 무장한 공격대. 지구상 어디에도 이런 공격대는 없다. 막말로 결정체 값만 한 명 당 1조 5,000억 가량을 투자해야 하는데, 미국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블루 결정체를 길에서 돌 줍듯이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유지웅만이 가능한 일이다.
제니스 예비대는 그게 헛된 돈지랄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톡톡히 증명했다.
풀 S급 장비 세팅과 숙련된 전투 능력이 결합한 덕분에, 각 예비대는 레드 몹 한 마리를 잡는데 평균 20분을 넘기지 않았다. 미국 공격대가 보통 6시간 이상 걸리는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눈앞의 청년은 바로 그 절대적인 힘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는, 유일무이한 패자였다.
“생존자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죄수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교도소 내 직원들을 전부 사살했다고 하더군요. 최 박사님도 거기에 휘말린 것으로 추정되고요.”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그것은 우리 정부로서도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불가항력? 무슨 뜻이지요?”
“아이오와 주 전역에서 괴수들이 날뛰면서 죄수들이 공포에 질려 폭동을 일으킨 것까지는 우리로서도 대처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아이오와 주는 사실상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무법지대였으니까요.”
뭔가를 생각하는 듯이 유지웅은 고개를 가볍게 까딱거렸다. 비시는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감히 어느 누가 미합중국 대통령 앞에서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손주뻘 되는 상대인데 말이다.
“멩크 형무소는 괴수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알고 계시겠죠?”
비시의 얼굴이 굳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시설이 파괴된 것도 아닌데, 죄수들이 어떻게 폭동을 일으켜 교도소를 점거할 수 있었던 거지요? 최소한 누군가가 교도소 문은 열어줘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아니면, 멩크 교도소는 죄수들이 맨손으로 문을 뜯고 나와서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치안이 허술한가요?”
“괴수 습격이 발생하면 모든 인원을 지하 대피소로 피난시키기로 되어 있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죄수들을 한꺼번에 이동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조치입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폭동이 일어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많은 총탄 자국을 봤습니다. 그것은요?”
“아마도 간수들의 무장을 빼앗아서 사용한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유지웅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가방 하나를 들어서 올려놓았다. 안에는 자동 기관단총 한 정이 들어 있었다. 나름 잘 둘러댔다고, 조금 좋아졌나 싶었던 비시의 안색이 다시금 굳어졌다.
“제가 멩크 형무소에서 가져온 겁니다. 미국 형무소 간수들은 다들 이렇게 중무장을 합니까?”
“……미국은 총기가 허용된 나라이니 만큼, 그 정도 무장은 크게 이상할 게 아닌…….”
“조회를 해봤는데 이 총은 아이오와 주 공공시설 정식 사용 모델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일반인은 구할 수도 없는 모델이라고 하던데요?”
비시는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이다. 방향을 잘못 잡았나? 그도 저 총은 잘 모르겠지만, 한 눈에 봐도 저건 교도소 경비 인력이 사용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
“테러범이 주로 사용하는 모델이라고 하던데, 이 점 어떻게 생각하세요?”
비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 * *
거친 발걸음으로 들어서는 루딘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창 업무 중이던 요원들은 딱 봐도 저기압인 상관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토미 에슨의 행방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나?”
“국장님, 그건 원래 우리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단시간 안에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네.”
“현장 요원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타 기관과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니, 좋은 소식이 곧 올 겁니다.”
널찍한 가죽 의자에 앉은 루딘은 몸을 뒤로 젖히며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떨어질 조짐이 없다.
“대체 어떤 놈들이지?”
비록 로스차일드가 무너지긴 했으나, 유대 자본의 영향을 받은 부호 세력은 아직 미국에 널려 있다. 유지웅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짓눌려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아마 그들 중 한곳이 토미 에슨 탈옥을 도왔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토미는 충성심이 뛰어난 체스말이다. 괴수 난동으로 잃기에는 아깝다고 여겼으리라. 아니, 괴수가 난동을 부려 정부 통제력이 상실된 것이, 탈옥시키는데 오히려 좋은 기회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위성 고장은? 뭔가 알아낸 게 있나?”
루딘은 12개의 위성이 고장을 일으킨 게 결코 우연이나 인재라 보지 않았다. 그보다는 외부의 공격이라고 직감했다. 오랫동안 정보기관에 몸을 담은 경험이 주는 ‘감’이었다.
“현재로서는 외부 침입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NASA의 예상대로 단순한 시스템 고장이 확산됐다는 것이 유력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 틀림없이 뭔가 있어. 미국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뭔가가…….”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동기가 있다. 그게 바로 루딘의 신조였다.
괴수 난동 사태를 의도하고 위성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노리고 위성에 공작을 가했을 거라는 추측은 루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국의 불운은, 하필 위성 추락에 놀란 괴수들이 연쇄적으로 난리를 부리는 바람에 아이오와 주가 패닉 상태로 몰렸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국장님! 지급입니다!”
“무슨 일인가?!”
“러시아 외교 장관 코조프스키가 현재 캘리포니아 주를 방문한 상태입니다!”
그게 뭐? 루딘은 순간 의아했으나 이어진 요원의 설명에 얼굴색이 대번에 변했다.
“서부 지역 10개 주 주지사들이 비밀리에 공동 참석해 코조프스키와 면담을 가졌습니다! 불과 세 시간 전에 면담이 끝났다고 합니다!”
“면담 내용은?”
“거기까지는, 아직 파악이…….”
“코조프스키 장관의 방문은 공식 행사인가?”
“아닙니다. 신고 되지 않은 은밀한 방미 일정이었습니다. 위장 신분으로 들어온 거 같습니다.”
온몸에서 쭈뼛 소름이 솟아오른다. 러시아 외교 장관이 신분까지 속여 가며 몰래 미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서부 지역 10개 주 주지사들을 만났다? 그것도 하필 이런 시기에?
생각은 많았지만 판단은 빨랐다. 루딘은 주저 없이 명령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코조프스키의 지난 일정을 철저히 조사하게. 면담에 참가한 주지사들의 일정을 모조리 역추적하게.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난다.”
“알겠습니다!”
* * *
EIS 소속 루시안 요원은 극소수의 휘하 부하 요원들을 데리고 지난 몇 달 간 꾸준히 비밀 작전을 수행해왔다. 임무에 투입된 지도 벌써 반년. 하지만 언제 임무가 종료할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십 년이 지나도 그날이 안 올지도 몰랐다.
‘미국의 존망이 달린 일일세. 부디 그 불곰 놈들을 유의 깊게 주시하게.’
칠드그린의 신신당부였다.
부국장 라인의 주축 중 하나인 루시안 요원은 칠드그린 외 누구에게도 작전 경과를 보고하지 않았다. 정보국 내부에서 그가 무슨 임무에 투입되었는지 아는 동료도 없었다. 휘하에 거느린 요원들조차 이 임무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칠드그린이 루시안에게 이 임무를 처음 맡기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정보 습득 덕분이었다.
「러시아 외교 장관 코조프스키, 주기적으로 캘리포니아 주 방문. 위장 신분 사용.」
루시안은 칠드그린으로부터 임무 목적을 들었을 때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미국의 존망이 달렸다는 그의 말은 결단코 틀린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코조프스키가 언제부터 신분을 속이고 미국을 방문해왔는지, 그 개시일을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코조프스키는 서부 지역 10개 주의 주지사들을 꾸준히 만나 면담을 가졌다. 면담은 비밀리에, 그리고 철저하게 이뤄졌다. 미국 입장에서 이것은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다.
루시안은 몇 번이나 도청을 시도하려 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누군가가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는 않았다는 것만이 그나마 위로가 될까.
반년에 걸친 정보활동 끝에 어느 정도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지금 미 서부 지역을 부추겨서 미국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목적을 가진 게 분명했다.
대양이 사실상 봉쇄되고, 아메리카 대륙 서쪽에 위치한 베링 해역이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유일한 통로가 됨에 따라, 서부와 동부의 지리적 격차는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 교활한 러시아 불곰 녀석들은 오래 전부터 그 점을 포착, 서부 지역에 갖가지 부채질을 해왔던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루시안은 언제나 마음이 다급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게 너무 늦었다. 겨우 반 년 전에야 감지했으니.
“팀장님! 성공입니다! 대화가 들립니다!”
부하의 보고에 루시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드디어 도청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무차별 방해전파 때문에 예외 없이 도청에 실패해왔는데, 이날을 위해 특수 제작한 신형 도청기가 톡톡히 효과를 발휘해주고 있었다.
루시안은 대화 내용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10명의 주지사와 코조프스키 장관만이 참가한 비밀 파티. 이제 드디어 러시아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으리라.
「……지금 정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최윤 박사의 죽음을 막지 못한…… 제니스 회장이 크게 분노…… 연방 정부가 과연 그의 분노를 막을 수 있을…… 못해도 무역 보복…… 최악에는 국제 봉쇄…….」
「……일리 있는 의견……생각…….」
「하지만 너무 최악의 상황만을 가정하는 건 아닌지…… 미국이 시장 가치는 설령 한국이라 해도…….」
「그러나 비시 행정부의 안일한 태도는…… 또한 이번이 한 번이 아니라는 점…….」
대화 내용은 드문드문 끊겼다. 방해전파 때문이었다. 그나마 신형 도청기라 이 정도라도 엿들을 수 있는 것이다.
대화 내용은 루시안이 상상한 바를 크게 넘어서지 않았다. 역시 러시아는 미국 내부에 갈등을 불러일으켜서 나라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목적을 가진 게 분명했다. 그 틈을 노리고 자기들이 미국을 대신하겠다는 야욕을 품은 게 분명했다.
‘ISIR 1순위를 뺏은 것처럼.’
루시안은 이를 갈았다. 절대로 그 불곰 녀석들의 뜻대로 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순간 방해전파에 잠시 에러가 일어났는지, 코조프스키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서부 지역의 발전 가능성은 앞으로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십 년, 이십 년 뒤에는 어찌 될까요? 서부 지역 주정부가 힘을 합쳐 동부를 먹여 살리느라 헉헉대게 될 겁니다. 제니스 회장이 최윤 박사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모두가 다 압니다. 그의 분노가 표면화된 뒤에는 이미 움직여도 늦습니다. 다 같이 망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확실히, 어리석은 비시 행정부가 자초한 침몰에 휘말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그러나 분리 독립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분리 독립!’
루시안은 그만 쥐고 있던 팬을 떨어뜨렸다.
러시아가 이번 괴수 난동, 최윤의 죽음을 빌미로 유지웅한테 들러붙어 미국에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은 예상했다. 루시안은 최악의 경우에는 국지적인 교전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거친 북방 놈들이 할 짓이야 뻔하지 않은가. 알량한 폭력을 휘두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놈들이니.
하지만 아니었다. 러시아의 궁극적인 목적, 그리고 그 수단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이건 단순히 미국 내부에 갈등을 초래하고자 하는 견제구 수준이 아니었다.
‘이놈들! 미국을 둘로 갈라놓을 셈이다!’
============================ 작품 후기 ============================
“폭력이라니, 어휴 왜 그런 거친 짓을.. 대화를 통해 외교적인 해결을 볼 생각임.”
진짜 부드러운 남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