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560)
00560 대격변? =========================================================================
‘어떡한다?’
여기 오기 전 신신당부를 받았던 게 생각났다. 미국 부통령 칠드그린이었다. 몰래 사적으로 연락을 해온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웅을 설득해서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나아가 전 세계가 유지웅이 일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결정체 부족으로 휘청거리는 세계경제와 산업기반, 그것을 지탱해줄 수 있는 인물은 오로지 유지웅뿐이었다.
“회장님. 세계가 지금 회장님께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게임에 빠져서 레이드를 소홀히 한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게임 때문이 아니라고요!”
“회장님은 세계를 위해서 선뜻 퍼플 결정체를 내놓은 영웅이 되셨습니다. 조금만 신경 쓰시면 그 이미지도 지키고, 또 더 큰 부를 쌓으실 수 있는데, 이 중요한 때 겨우 게임 따위에 그렇게 매달려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아니, 게임 때문이 아니라니까요! 왜 게임 때문이라고 그렇게 딱 단정을 짓는 건데요!”
“옐로 몹이 사라지면 어떻게든 레드 몹 레이드가 대중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니스가 지닌 사실상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회장님이 적극 나서서 인프라를 구축하면 제니스, 아니 유씨 가문은 로스차일드 못지않은……, 아니, 이미 넘어선 지 오래인가? 아, 아무튼!”
“진짜 게임 때문 아니라고요!”
누가 그랬던가. 강한 부정은 아주 강한 긍정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유지웅의 표정에서 남기철은 희미한 불길함을 읽었다. 다년간 그를 봐온 남기철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바로 그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가.’
남기철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카드만큼은, 결코, 절대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일어났다. 두 팔의 소매를 걷어 올리자 유지웅이 흠칫 했다. 아니, 설마 지금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제가 헬프해 드리겠습니다.”
“네?”
“파이널 스페이스 5, 제가 헬프해 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남 의장님도 그 게임 해요?”
“이미 모든 엔딩을 다 봤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 엔딩은 없습니다.”
남 의장님, 봉인 해제하다.
* * *
“거기는 가면 안 됩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그 상자는 함정이에요! 으, 으악! 기어이 건드리셨어!”
“죄송해요! 손이 저도 모르게 그만!”
“됐습니다! 물러나세요! 제가 커버합니다!”
“으아! 여기 또 상자가 있어요! 으악! 열렸다!”
“회장님! 제발 좀!”
자그마치 사흘이었다. 게임을 깨주기 위해 남기철은 사흘 동안 흑석동 팰러스에 두문불출하며 유지웅을 도왔다. 식사는 간수가 사식 넣어주듯이 정효주가 넣어주는 식사카트로 해결했다.
유지웅은 버스 기사가 생긴 김에 끝장을 봐야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했는지, 다른 건 일절 놔두고 오로지 게임을 깨는 데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다. 원래라면 이틀이면 충분히 깰 수 있을 만큼 진행된 상황이었지만, 하루가 더 걸려서야 공략을 볼 수 있었다.
유지웅은 어두운 게임룸 화면 전체를 차지한 스크린을 보며 감격했다. 고성능 디지털 영사기가 감동적인 엔딩 장면을 스크린에 투영하고 있었다.
“내, 내가 드디어 엔딩을…….”
남기철은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난 얼굴로 힘없이 콘솔 게임기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원래는 어제 끝났어야 할 게임인데 하루가 더 걸렸다. 유지웅이 중간 중간 말을 안 듣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걸 수습하느라 그랬다.
‘그나저나…….’
5층에 꾸며놓은 게임룸에 들어온 건 남기철도 처음이었다. 첫날에는 홈 극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게임룸이란다. 이건 뭐 게임룸 하나가 150평은 되어 보였다.
빵빵하게 갖춰진 음향기기, 벽면 전체를 차지한 스크린, 영화관에서 사용하는 전문 디지털 영사기, 그 외에도 게임 전용 200인치 대형 PDP TV라든가, 기타 등등.
한쪽 벽을 차지한 서재에는 게임 매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게임 CD가 꽂혀 있었고, 시중에 나온 게임도 종류별로 갖춰져 있었다. 사람이 직접 탑승해서 하는 대형 게임 튜브도 20개도 넘게 있었다.
“근데 회장님, 탑승형 게임 튜브는 왜 저렇게 많이 구입하신 겁니까?”
“친구들 오면 같이 하려고요.”
왠지 울적해졌다. 저거 하나가 아마 수천만 원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친구들이랑 멀티 플레이하려고 수십 개도 넘게 구입해서 집에 쌓아두다니. 이것이야말로 모든 게이머들의 영원한 로망 아닌가?
“좋아요. 시리즈 5를 깼으니 이제는 시리즈 4를…….”
“예엣?”
남기철은 기겁을 했다. 아니, 시리즈 5를 깼는데 왜 시리즈 4를 한다는 거야? 무슨 청개구리야? 거꾸로 가려고?
“아니, 5를 깼는데 왜 4를 한다는 겁니까! 이제 6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아, 저 5부터 시작했거든요. 거꾸로 해 보려고요.”
“회장님!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5 깨는 거 헬프 해드리면 레이드 하시겠다고요!”
“하고 있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회장님! 제발!”
중년의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매달리고 애원하는 걸 본 적 있는가? 상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난다. 지금 유지웅이 그랬다. 그는 흠칫 해서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시리즈 4 CD를 내려놓았다.
“……안 돼요?”
“안 됩니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어, 얼마면 돼요?”
“4조 3,500억 달러요! 그만큼만 주시면 됩니다!”
“……집요하시네.”
참고로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결정체 물량이 연간 4조 3,500억 달러였다. 그러니까 남기철 말은 절대로 타협 같은 건 안 된다는 뭐 그런 소리다.
결국 유지웅은 투덜거리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리고 가죽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알았어요.”
“회장님, 그럼?”
“저도 원래 결정체 부족 현상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어요. 다만 세계가 스스로 이겨낼 노력을 얼마나 충실히 하는지 지켜본 뒤에 손을 내밀 생각이었죠.”
“아, 예. 대외적으로 그렇게 발표하겠습니다.”
“진짜라니까요!”
마흔이 멀지 않은 인물이 저렇게나 자신을 잘 파악하고 캐치한다는 것도 참 재주는 재주인 것 같다. 유지웅은 괜히 부끄러워서 발끈해놓고는,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할 것, 그리고 세계와 저의 공생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제가 최대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 그 계획을 짜서 가져와 주세요. 자문단에는 미리 말을 해둘 테니 같이 의논하시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총책임자는 남 의장님이라고 할 테니 책임 의식을 가지고 일해주세요.”
“……예.”
“특별히 불가능하지만 않으면 남 의장님이 만든 일정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그니까 다 알아서 해주세요. 아셨죠?”
이른바 총사령관 임명이자, 전권 위임이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남들은 대단한 영광을 얻었다며 좋아라 할지 모르지만, 남기철은 지금도 충분히 살인적인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일거리가 더 늘어나는 것은 건강에 절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어쨌든 해냈다!’
아무튼 남기철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WCO 의장으로서 무사히 사명을 마쳤다! 뿌듯했다! 역시 남자는 자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가장 대견하고 기분이 좋은 동물이다.
“시간이 없어서,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앗! 4 시리즈는 안 된다니까요!”
“걱정 마세요. 시간만 때우려는 거니까요. 남 의장님이 부르시면 나갈게요.”
“꼭입니다! 또 두문불출하시면 안 돼요!”
남기철은 그렇게 신신당부하면서 돌아섰다. 문을 막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깜박했네. 남 의장님은 어떻게 파이널 스페이스를 이렇게 잘하시는 거지요?”
“예?”
남기철은 놀라서 뜨끔했다. 유지웅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앞에서 한 번도 게임 이야기 같은 거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그런데 오늘 게임하는 거 보니까 컨트롤이라든가 상황 판단, 반사신경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저는 무슨 롤할 때 효주를 보는 거 같았다고요. 남 의장님, 설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혹시 저랑 같이 게임하기 싫어서 그 동안 게임 안 하는 척……!”
쾅!
문을 닫자마자 유지웅의 말이 뚝 끊어졌다. 완벽한 방음시설이 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뛰어나와서 잡을까 무서워 남기철은 후다닥 일층으로 내려갔다.
대기 중인 V-23에 부랴부랴 올라서 세종시로 향했다. WCO 본부로 도착해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의장이라는 인간이 사흘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었으니 당연하리라.
사흘을 꼬박 제대로 못 잤는지 박 비서실장이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달려왔다.
“의장님!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대사들 반응은 어때?”
“불만이 장난 아닙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의장님이 사흘이나 모습을 안 비추셔서 다들!”
“지금 긴급 총회 소집한다고 연락해! 시간이 없어!”
“예? 예! 알겠습니다!”
유지웅 자문단과 의논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단 불만이 머리꼭대기까지 올라온 각국 대사들을 달래는 게 급선무다. 다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처지라 급작스러운 연락이었음에도 재빠르게 총회의에 참석했다.
대회의실로 들어오는 대사들은 표정이 하나같이 썩어 있었다. 의장이란 인간이 사흘이나 연락 두절이니 왜 안 그럴까. 그렇다고 유지웅 게임하는 거 버스 태워주느라고 그랬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래저래 남기철만 나쁜 사람이 됐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제니스 공격대장님이 결정체 부족 사태를 위해 적극 레이드에 임하겠다고 뜻을 전해왔습니다! 일단 급한 물량은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오오!”
“역시 남 의장입니다! 대단해요!”
“하! 사흘이나 연락이 없던 것도 제니스 공격대장을 설득하기 위해서였군요! 과연 남 의장입니다!”
공적이 영웅 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대회의실은 순식간에 환호와 박수로 가득 찼다.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사흘 동안 온갖 마음고생으로 얼굴이 상한 박주혁 비서실장을 비롯한 WCO측 직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한국 정부와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방어장비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급해 자체적인 레드 몹 레이드가 가능하도록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또한 그 동안 부족한 블루 결정체 획득을 위해 제니스의 모든 대원들이 합심해서 레이드 강행군을 행할 계획입니다. 세부 계획은 제니스 자문위원들과 의논해서 최대한 빠르게 공표하겠습니다!”
“남기철! 남기철! 남기철!”
“WCO! WCO! WCO!”
대사씩이나 되는 인물들이 무슨 공연장에 온 아이돌 팬들처럼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갈채를 보내자 남기철은 얼떨떨했다.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이 맛에 다들 권력에 도전하고 막 그러는 건 아닌가 싶다.
“제니스 예비대 규모를 더욱 늘려야 합니다. 레드 몹 서식처를 분류해 주요 지점에는 예비대를 상시 파견해야 합니다. 즉 제니스 해외 전진기지를 만드는 겁니다.”
“미군 해외기지 같은 개념이군요. 저도 찬성합니다. 제니스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방어장비를 보급하면 어쨌든 제니스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릴 텐데, 괜찮을까요?”
“S급 방어장비는 너무 비싸서 제니스 외의 다른 공격대는 보유가 불가능합니다. 방어장비 및 다른 장비의 성능 차이는 레이드 전투 시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지금 국내의 노련한 다른 정공들이 레드 몹을 잡는데 5시간이 걸리는 반면, 제니스 예비대는 50분 이내로 사냥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결코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합니다. 또한 제니스 예비대 규모를 아무리 늘린다 해도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수요를 맞출 순 없습니다. 가장 큰 파이는 제니스가 차지하고, 다른 국가들도 자생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게 회장님이 말씀하신, 세계의 비난 없이 제니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공생길입니다.”
유지웅은 남기철에게 전략 입안 전권을 줬다. 어련히 알아서 잘 계획을 짤 테니, 자기는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남기철은 그야말로 피 말리는 일정을 보냈다.
유지웅의 이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제니스 자문단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한국의 이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청와대도 이런저런 입장을 늘어놓았고, 결정체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일단락 될 듯이 보이자 미국과 러시아가 슬그머니 블루 결정체 공정 모델의 표준안에 관해서도 로비를 해왔고, WCO 회원국 중 제3세계 국가들도 자국의 어려움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해왔고, 아무튼 온갖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물고 물리는 와중에도 남기철은 그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조율하고 맞추는데 온힘을 쏟았다.
“회장님! 여기 완성되었습니다!”
“오, 이대로 하면 되나요?”
“예! 일단 결정체 부족 현상이 시급하니 서둘러 레이드부터 다니시면서 천천히 읽어보시면 될 듯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WCO 의장으로서 정말 엄청나게 큰 일 하나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 남기철은 오랜만에 뿌듯했다. 탈진하기 직전이었지만 정말 기분 좋게 모든 힘을 소진했다. 이제 집에 가서 푹 쓰러져 한 사흘 정도 실컷 늘어지게 자면 될 것…….
“선배님! 아니아니, 의장님! 큰일입니다!”
“뭐야, 박 실장? 무슨 일이야?”
“일본에 블랙 몹이 나타났습니다!”
괴수마저 그의 평온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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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에 고통받아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