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565)
00565 나는 핵물리학자다 =========================================================================
“시작 자금은 5조 원이면 충분한데.”
가렌은 번뇌에 빠졌다. 유지웅은 분명히 1차 연구 자금이라고 했다. 그것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예산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견적을 내보니 초기에는 5조 원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남은 5조 원은 어떡하지?”
예산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연구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써야 하는 공금이다. 그리고 예산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불변의 법칙이 있다. 남기면 다음 번 지원 예산이 줄어든다는 것. 예산 관리측에서 ‘어, 남았어? 그럼 그 정도면 충분하단 거네? 다음번엔 더 적게 줘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끼면 똥 되는데.”
즉 예산은 주는 대로 남기지 말고 다 써야 한다. 투정 할 것 없이 꼭꼭 씹어서 잘 먹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번에 예산을 늘려서 준다. 그것이 철칙이다.
“할 수 없다. 기초 핵융합 연구부터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예? 하지만 결정체를 이용한 상온 핵융합로를 만들라고 하신 게 아니었나요?”
“아무리 우리가 맥이 끊어지지 않게 노력했다지만 핵물리학은 지난 수십 년 간 지나친 천대를 받았어. 모래사장 위에 건물을 지어봤자 부실공사만 될 뿐이다.”
가렌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유지웅은 상온 핵융합로를 만들라고만 했다. 그 수단과 방법, 과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건 곧 전문가인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다는 뜻 아닌가?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일을 맡겨 왔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된다. 핵물리학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받아 왔다. 결정체학과 핵물리학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서는 밸런스를 맞춰야만 한다.
“결정체론과 핵물리학론의 통일 작업을 위한 기초 이론팀과 결정체 핵융합로를 전담하는 실리 연구팀을 따로 결성한다!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겠다!”
시간과 예산은 반비례의 법칙을 가진다. 많은 예산을 투입할수록 달성 시간은 줄어들고, 적은 예산을 투입할수록 달성 시간은 늘어만 난다.
가렌은 명쾌하게 방향을 정하고, 상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단 1원도 허투루 남기지 않는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 최대한 쥐어짜내서 예산을 쓰겠다! 각오해라! 결코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모두 잘 따라오도록!”
100여 명의 핵물리학자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가렌은 지금 정말 무서운 표정으로, ‘너희들 이제부터 어마어마한 고생길에 접어든 거야.’라고 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껏 제대로 된 예산에 치여 본 적도, 제대로 된 갈림을 당해본 적도 없었다. 대학교에서도 그런 건 언제나 남의 일, 다른 과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이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과연 갈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두려울까? 아플까? 잠을 거의 자지 못해 산 채로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데, 정말로 그런 삶의 연속일까?
가렌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우리는 무엇이냐!”
순간 핵물리학자들은 일제히 두려움과 혼란에서 깨어났다. 부족한 학교 예산과 푸대접으로 박해를 받을 때면, 가렌은 항상 그렇게 자신들을 격려해주곤 했다. 학창 시절의 그 뜨거운 감정이 샘물 솟듯이 되살아났다.
우렁찬 함성이, 참으로 오랜만에 단결 구호를 외쳤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원자핵물리학자들입니다!”
“좋다! 그래! 우리는 자랑스러운 원자핵물리학자들이다!”
유지웅은 가렌이 예산을 너무 많이 주면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게을리 진행하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 연방 정부 대형 프로젝트 경력을 보고 생긴 커다란 오해였다. 당시 그는 연구도 연구지만, 예산이 끊어질까 봐 눈치 보느라고 살벌하게 줄타기를 했을 뿐이다. 의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부 예산의 한계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끊어지거나 줄어들 일 없는 예산이 무제한으로 쏟아진다면? 무제한으로 써주면 그만이다. 예산에 맞춰서 일을 새로 만들어내면 되는 것 아닌가.
“너희들! 따라올 준비는 단단히 되었나!”
“예! 물론입니다!”
“좋아! 그 기백, 그 열정! 아주 마음에 든다! 으하하! 이래야 내 제자들답지!”
* * *
“가렌 박사님 말씀대로예요. 결정체 숙성 반응 규명은 결정체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레지나는 의자를 천천히 돌리며 입을 열었다. 밤새도록 숫자와 공식과 씨름을 한 탓인지 최윤의 표정은 수척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확실히…… 당신 말이 맞아요. 이 부분은 제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핵물리학 이론이 필요해요.”
“원래 과학은 심층적인 부분에 접근할수록 다양한 종류의 학문이 한데 모이게 되죠.”
“그래도 아쉽네요.”
“분하세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게?”
레지나는 싱긋 웃었다. 보드라운 손이 까칠하게 돋아난 수염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체취를 느끼며 최윤은 픽 웃었다.
“분하다라. 그럴지도 몰라요. 당신 할아버지의 유산, 온전히 내 손으로 재현하고 싶었으니까.”
이번에 유지웅이 일본에서 획득한 결정체는 일반 블루 결정체와 달랐다. 그것은 바로 숙성의 차이다. 최윤은 가렌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이것은 결정체의 숙성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그린 결정체를 블루 결정체로 조합하는 것은 이미 성공했다. 그러나 블루 결정체를 퍼플 결정체로 조합하는 것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이론은 완성되었지만 실험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왜냐하면 수백 배 이상의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공률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지웅이 결정체 거부라지만, 연구팀 입장에서 이건 차마 말도 꺼내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가 내기를 할 때, 휘버 박사님은 블루 결정체의 상위 결정체는 붉은 색일 거라 했어요. 나는 보라색이라고 했죠. 아마 우리는 둘 다 틀리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아니, 둘 다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최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레지나도 수긍했다.
“숙성 이론이 할아버지께서 마지막에 세우신 가설이었죠. 그것을 확인하거나 검증할 시간도 없으셨지만…….”
새삼 울적해졌는지 레지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최윤은 다정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최윤은 숙성 반응을 퍼플 결정체 조합의 비효율성, 비확실성을 해소하는 길로 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레지나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해왔다. 성과가 없어 막막했는데, 가렌이 지적한 다궤도 충돌 반응에서 마침내 단서를 찾았다.
핵물리학과 결정체학의 완벽한 통일. 핵물리학자인 가렌은 결정체를 이용한 상온 핵융합이 가능할 거라 했다. 그리고 결정체학자인 최윤은 퍼플 결정체를 향한 완전한 길이 열릴 것이라 확신했다.
“어쩌면 블랭의 부활도 가능할지 모르죠.”
“맞아요! 혹시 어쩌면 블랭이 남긴 결정체도?”
“숙성 상태일지도 몰라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번에 얻은 숙성 블루 결정체와 패턴이 흡사했어요.”
최윤은 이미 균열의 존재, 그리고 블랭의 부활 가능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유지웅에게 털어놓았다. 전자는 위험하기에, 후자는 아직 확실하지 않기에.
그러나 이제야말로 블랭의 부활 가능성에 관해서 털어놓고 승인을 얻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블랭이 남긴 결정체까지 가세하면 결정체학과 핵물리학의 통합은 더욱 빨리 진전될 것이며, 가렌과 그 모두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가렌 박사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 분과 의논해보죠.”
“그 분이 수락할까요? 예산이 줄어든다고 오히려 역정을 내시는 건 아닌지…….”
“괜찮아요.”
최윤은 하얀 광택으로 반짝이는 카드를 꺼내 보이며 웃었다.
“그 분은 이 카드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합니다.”
* * *
“아유, 젊은 사람들이 무슨 겨울 낚시를 한다고 그래.”
“한 번쯤 해보고 싶었거든요.”
“오빠! 이거 봐! 뭐가 물렸어!”
“어? 그래? 어디, 어디.”
정혜주는 반월처럼 크게 휜 낚싯대를 잡고 꺅꺅거리며 환호를 질렀다. 조그만 고깃배가 휘청거릴 정도로 커다란 놈이 잡힌 모양이었다. 유지웅이 얼른 옆에 달라붙어서 같이 낚싯대를 잡아 주었다.
왜 정혜주가 오빠라고 부르냐고? 형부와 처제가 단둘이서 낚시 여행을 왔다고 괜한 오해를 살까 봐서다. 어차피 결혼 전에는 오빠라고 잘만 불렀으니 문제없다.
원래는 정효주까지 셋이서 오려고 했었는데 출발 직전에 쌍둥이가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남았다. 아들인 유세현은 이제 유치원 들어갈 때도 됐고 해서 어느 정도 의젓해졌다만, 젖먹이들은 아직도 품에서 놓으려면 멀었다.
모처럼 오붓하게 즐기려고 유지웅은 경호팀은 육지에 좀 떨어진 곳에 놓아두고 왔다. 이렇게 여행 같은 걸 올 때면 비밀 경호로 이뤄진다. 비밀 경호를 하면서 이 좁은 낚싯대에 같이 탈 수는 없지 않은가.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이 조그만 낚싯대를 잠깐 타는 동안에 무슨 별일이야 있겠느냐 생각했다. 정효주와 같이 다니면서 한 번도 위협적인 상황에 놓여 본 적이 없으니 더더욱 간이 커졌다. 지금 세상에서는 감히 그에게 해코지를 시도하려는 세력조차 없으니.
그랬는데, 설마 했던 그 일이 일어났다.
“꺄악! 혀, 형부!”
둘이서 한참 동안 열심히 낚아 올린 겨울 물고기가 헤엄치는 걸 보며 흐뭇해하는데, 갑자기 정혜주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유지웅은 왜 그러나 하고 의아했다. 그리고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감촉!
퍼억!
말 그대로 가벼운 감촉이었다. 유지웅은 이게 뭐야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선 주인이 놀랐는지 당황해서 주춤주춤 서 있었다. 70세라고 한 그는 노인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몸을 가졌는데, 손에는 커다란 쇠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유지웅은 상황을 깨달았다.
“……할아버지, 설마 지금 그걸로 절 친 건가요?”
“이, 이익!”
체격 좋고 건장한 70세 어부 노인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는지 두려움에 떨며 힘껏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쇠파이프는 유지웅의 어깨에 맞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호막과 쇠파이프가 부딪치며 파르스름한 불꽃이 튀었다.
“그런 걸로는 나 못 죽이죠. 보호막이 이제는 패시브거든요.”
“이, 이 괴물! 아, 아니 잠깐! 너 설마?”
“탱커 아닙니다. 알 필요도 없어요.”
적당히 분장을 한 턱에 노인은 당연히 유지웅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젊은 남녀 커플, 혹은 신혼부부가 먼 남해로 여행을 온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몰래 슥삭 처리해도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한 건가?
“됐고, 가만히 있어요.”
철컥.
유지웅이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내밀자 어부 노인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야말로 이쪽이 안쓰러울 정도로 주름 진 얼굴이 온통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너, 너 대체 뭐야!”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지. 당신 뭐야? 날 죽이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어? 딱히 가진 것도 없어 보일 텐…….”
유지웅은 놀라서 떨고 있는 정혜주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비록 탱커는 아니지만 처제는 일반인 치고 매우 근사한 미모를 가졌다. 그리고 어리고 늘씬하다. 그럼 목적은 뻔하다.
“당신, 이게 처음이 아니네?”
“이 놈!”
“어허.”
타앙!
어부 노인은 다시 달려들려 했으나 총구가 허공에 불을 뿜자 흠칫 놀라서 굳어졌다. 장난감 총이라 아니라 실총이었다.
유지웅은 총구를 그에게 겨눈 채로 전화기를 꺼냈다. 위성과도 연동되는 놈이라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매우 잘 터진다.
“네, 실장님. 전데요, 지금 제가 탄 어선 주인이 강간살해범 같습니다. 절 죽이려고 했어요. 제압해놨으니 지금 바로 와서 잡아가세요.”
“여, 여기서는 전화가 안 터지는데!”
“그건 당신 전화나 그렇고.”
유지웅은 싸늘하게 웃었다. 이런 자에게 존대를 해줄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요란한 로터 소리가 들렸다. 경호팀이 3기의 V-23을 나눠 타고 급히 이쪽으로 온 것이다.
레펠을 타고 내린 경호원들은 얼이 빠진 어부 노인을 단단히 결박했다. 유지웅은 아직도 떨고 있는 정혜주를 달래서 전용 V-23에 함께 옮겨 탔다. 모처럼 재미있었는데 즐거운 기분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
“저거, 처음이 아닌 거 같으니까 샅샅이 조사해서 뿌리까지 다 들어내 버려요.”
“알겠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강간살인범인 줄 알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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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대체 누굴 잡아오려고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