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600)
00600 왕관의 무게 =========================================================================
한바탕 소동이 겨우 가라앉은 뒤에야 유지웅은 피즈를 겨우 떼어낼 수 있었다. 진짜 접착제 바른 것처럼 안 떨어지려는 아이를 힘들게 떼어냈다. 저거 봐라. 지금도 덥석 달려들어서 안기려고 버둥거리는 걸 정효주가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중이다.
유세현이 호기심을 보였다.
“누나는 누구야?”
“…….”
피즈는 입을 꾹 다물 뿐, 말이 없었다. 아니, 유세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어디 살아?”
“…….”
“내 이름은 세현이야. 유세현.”
“…….”
피즈는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기만 했다. 유세현이 뭐라고 하든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눈동자는 그저, 오로지, 유지웅만 쫓고 있었다.
귀엽기는 한데 유지웅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니, 난 니 아빠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건 무시하는데!
“피즈야.”
“응, 아빠.”
“아, 아빠?”
유세현이 콰당 하고 넘어졌다. 정효주가 놀라서 얼른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 틈을 타서 자유의 몸이 된 피즈가 다시 유지웅에게 덥석 달려들었다. 당황한 정효주는 아이를 소파에 제대로 앉히고 다시 피즈를 떼어내려다가, 몹시 행복한 듯이 뺨을 비벼대는 모습에 멈칫 하고 말았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자꾸만 억지로 떼어내는 것도 좀 몹쓸 짓 같아서다. 그녀는 결국 양보하기로 했다.
“자기가 좀 고생해.”
“정효주! 지금 외간 여자가 니 신랑을 탐내는데 어쩜 그리 태연할 수 있어!”
“십 년쯤 후에는 질투해줄게. 지금은 질투할 의욕도 안 나.”
어깨를 으쓱한 정효주는 소파에 앉았다. 유세현이 엄마 무릎에 앉으며 목을 끌어안았다.
“엄마. 나 누나 있었어?”
“응? 아니.”
“그럼 왜 저 누나는 아빠를 아빠라고 불러?”
“아, 저 누나가 잘못 안 거야.”
“그치?”
눈에 띄게 안심하는 눈치다. 신랑과 달리 정효주는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이 빠른 편. 피식 웃음을 지은 그녀는 아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왜, 저 누나 좋아?”
“아, 아니야! 그런 거!”
“정말?”
“아니야! 아니야!”
테레사한테 하던 거랑 반응이 너무 다르다. 보모인 테레사는 좋다고 졸졸 따라다닐 수 있어도, 몇 살 차이 안 나는 누나는 좋아하는 티를 내기가 쑥스러운가? 가만, 그러고 보면 오히려 피즈가 연하 아닐까?
유지웅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왜 자꾸 날 아빠라 생각하는 거니? 엄마가 내가 아빠라고 그랬어?”
“엄마는 아빠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 그랬어.”
아까도 그런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안 잡힌다.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한 건 대체 무슨 의미지? 하나도 안 닮았는데? 대체 이 아이의 심미안은 어떻게 된 건지 싶다.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응. 엄마랑 같은 느낌이 나.”
“같은 느낌? 어떤?”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은 느낌에 유지웅은 눈이 뜨였다. 피즈는 뺨에 손가락을 대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유지웅은 목이 자유롭게 된 틈을 타서 얼른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잽싸게 다시 목을 끌어안는다.
“아빠!”
“알았어, 알았어. 안 떼어놓을 테니까 말해 봐. 같은 느낌이 난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냥, 엄마랑 같은 느낌이 나.”
“좀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어?”
“그냥……. 아빠도 막 엄마처럼 몸 안에 어엄청 커다란 게 들어있어.”
“엄청 커다란 거?”
순간 정효주와 유지웅의 눈빛이 마주쳤다. 나미처럼, 몸 안에 엄청 커다란 게 들어있다? 그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빠라고 생각했다?
“응. 저 여자도 들어 있어.”
“……효주나 나나 똑같은데, 왜 하필 나를 아빠라고 생각했던 거야?”
“여자잖아. 여자는 아빠가 될 수 없어. 나도 알아.”
“알아?”
“응.”
피즈는 아주 자랑스러운 듯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고추가 있어. 엄마는 고추가 없어. 나도 알아.”
“쿨럭! 쿨럭!”
사례가 들리고 말았다. 아니, 나미 그 여자! 대체 자식 성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빠, 빨리 나미 씨 찾아서 얘 좀 데려가라고 해야겠다.”
“싫어! 안 갈 거야!”
“피즈야. 나는 절대로…….”
“아빠야! 내 아빠야! 아빠도 같이 바다 가!”
아이가 떼를 쓰는 건, 남의 아이든 내 아이든 간에 짜증만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지금 정정한다. 인형이 떼쓰는 건 귀엽다고. 그러니까 짜증도 나고 귀엽기도 하고 그렇다.
「회장님. 이형준 회장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때마침 그를 구원이라도 해주듯이 비서실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유지웅은 살았다는 듯이 얼굴을 폈다.
“피즈야. 난 지금 손님 와서 잠깐 나가봐야 하는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그래놓고 도망가려고 그러지!”
“도망 안 가. 중요한 손님이라서 그래. 여기서 잠깐만 놀고 있을래? 금방 올게.”
“진짜 도망 안 가?”
“안 가.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디 가냐. 너, 집 놔두고 도망가는 거 봤어?”
그 말에 피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집이 있는 녀석들은 집 놔두고 다른데 가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그 생각이 난 피즈는 그제야 안심했다.
“도망가면 안 돼? 빨리 와야 돼?”
“알았어, 알았어.”
“손가락 걸구. 약속.”
앙증맞은 손가락을 내밀며 빤히 쳐다보자 유지웅도 얼른 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무슨 손가락이 참 가늘고 작다. 잘못 만졌다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될 만큼.
“도장 꾹.”
“그래, 도장도 꾹.”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고 나서야 피즈는 안심이 됐는지 놓아줬다. 유지웅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옷을 챙겨들고 나섰다.
* * *
이형준 회장도 다른 부호들과 마찬가지로 젊음의 비약을 손에 넣기를 원했다. 그러나 국왕, 독재자, 서양 언론 재벌 등 쟁쟁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느라 제대로 의사타진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유지웅이 얼마 전 교통정리를 한꺼번에 하고 나서야 겨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차로 선별된 90명의 대부호 중에서 40명이 우선 젊음의 비약을 얻는 행운을 가졌다. 그들 역시 조건은 같았다. 공개 재산의 전부를 양도한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그래요. 참 오랜만입니다. 유 회장님.”
“일성전자가 요즘 승승장구 한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어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조금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 회장님의 위명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저야 너무 잘 나가서 탈이죠. 물이 너무 한 곳에만 고이면 전체적으로 안 좋은데.”
유지웅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 이형준에게는 결코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신중하게 생각을 한 이형준이 물었다.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으신 겁니까?”
유지웅이 ‘선심 정책’을 많이 해온 건 이형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총 자산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액수여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고려한 계산된 베풂이라 여겼다. 다만 그 얼마 되지 않는 베풂이 절대적인 액수로 보면 어마어마한 수치라서 국민들에게는 막대한 혜택이 되었던 것이다.
먼저 일반 가정에 무상으로 공급되는 전기가 있다. 다음으로 자선재단을 통해 저소득층 가정에 공급되는 각종 복지 지원금, 장학금이 있는데, 이게 또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일 년에 사용하는 금액이 한국 복지 예산의 1/3에 해당할 정도였으니.
제니스 연구단지에 쏟아 붓는 돈도 엄청나다. 하지만 국내 재계는 이 돈을 유지웅의 선심 정책 자금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유지웅이 세종시를 향후 본거지로 삼기 위해 육성을 지원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많죠. 엄청 많아요.”
“그렇군요. 회장님께서 솔선수범해서 보여주시는 자선 정신은 그렇지 않아도 재계에서 주목하고, 또 반성을 이끌어내고 있었습니다.”
“일성은 사회사업 좀 하나요?”
“여기저기 부끄럽지 않게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만 어디 회장님께 비교가 될 수 있나요.”
그룹 전체가 사회로 환원하는 규모가 유지웅 한 명한테 훨씬 미치지 못하니, 아주 빈말은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런 걸 물어보시려고 여기까지 먼 걸음 하신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이형준은 바짝 긴장했다. 목이 마르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려고 한다.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거대한 사업체를 운영해왔지만, 지금처럼 긴장이 된 적은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젊음의 비약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형준은 그렇게 승부수를 던졌다.
사교적으로 웃고 있던 유지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 회장은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며 축축한 느낌이 불쾌하게 잡힌다.
“죄송합니다. 유감이군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손주뻘의 청년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무릎 꿇고 매달려서라도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은 더욱 가능성이 없음을 알기에 그럴 수 없다. 가능성만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지만, 추한 이미지는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 결정체는 제 나름대로 정한 특별한 기준이 있습니다. 저번에 찾아왔던 외국 재벌들도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대거 탈락을 했지요.”
“그 기준이라면 대강 짐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성그룹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늦었을지 모르나, 회장님을 찾아오기 전 많은 것을 정리했습니다. 기회를 주실 수는 없습니까?”
그간 이형준은 다양한 방면에 걸쳐 그룹을 개혁했다. 무노조 문제, 그룹이 외면했던 근로자들에 대한 보상 정책 등 지금까지 축적된 불합리함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불법 비자금도 정리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은 불합리함을 수정할 수 있었고, 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나갈 참이었다.
적어도 반성의 모습은 갖췄고, 비전도 품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제는 찾아왔다. 그런데 안 된다니?
“제가 정한 기준은 외부에 공표하지 않았습니다. 이 회장님도 당연히 그 기준을 모르십니다.”
이형준은 이해가 안 갔다. 물론 유지웅은 정확한 판매 기준을 밝힌 적이 없지만, 그룹에서는 1차로 통과한 90명의 대부호들이 살아온 행적을 낱낱이 조사해서, 대략적인 기준표가 어떻게 되는지 추론했다. 그 기준에 맞춰서 불합리한 경영을 도려냈다. 그런데 안 된다니?
“아, 국내 적용 기준은 외국과 달라서요. 국내가 한 7배쯤 더 엄격하거든요. 어떻게 국내와 외국을 동등한 기준에 놓을 수 있나요?”
“……?”
“모르세요? 수출 드라이브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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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 모르면 어떡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