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683)
00683 흔들리는 대국? =========================================================================
“수고했네. 이만 일어나게.”
주치의가 말하자 이형준 회장은 MRI 지지대에서 힘들게 몸을 일어나 앉았다. 옆에서 경호원들이 부축을 도왔다. 흰 환자복을 입은 이형준은 몸을 완전히 일으키기 전에 물었다.
“어떤가?”
“아직은 약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나.”
주치의, 송기원 박사는 이형준 회장의 오랜 벗이기도 했다. 자식은 못 믿어도 송기원 박사는 믿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만큼 친밀한 사이였다.
이형준은 몇 년째 앓고 있는 지병이 있었다. 습관적으로 발생하는 혈전증이다. 뛰어난 주치의로부터 꾸준한 검진을 받고 있어 현재는 별 문제는 없다. 그러나 몇 년 전, 뇌경색으로 큰일을 치를 뻔한 뒤로는 그는 매일같이 마음이 불안했다.
“또 쓰러지지는 않겠지?”
“내가 그걸 알면 의사가 아니라 점쟁이를 하고 있겠지.”
“농담이 아니라 난 심각하네.”
“마음을 편히 가지게. 초조하고 불안하면 없던 병도 생겨나는 법이야. 있던 병이 악화되는 거야 당연하고. 그나저나…….”
송기원은 잠시 말을 흐렸다. 막 일어서려던 이형준은 왜 그러는지 의아해서 바라봤다.
“모듈 치료기는 언제 정식 도입한다고 하던가?”
“모듈 치료기? 그건 왜 그러나?”
“만약 자네가 또 뇌경색으로 쓰러지면 그게 필요할지도 모르네.”
“암 치료기가 어째서?”
이형준은 의아했다. 모듈 치료기가 획기적인 암 치료기라는 것은 들어서 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를 1회 처치로 완치시켰다던가?
하지만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은 오랜 혈전증, 습관적으로 혈전이 발생해 혈관이 막히는 병이다. 그리고 모듈 치료기는 암 치료기가 아닌가? 그런데 왜?
“제니스 병원에 내 제자들도 제법 있어서 자세한 치료 경과를 들었네. 모듈 치료기는 정상 세포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악성 세포만 정확히 조준하여 파괴하는 원리라고 하더군. 즉 뇌혈관처럼 외과적 수술이 까다로운 부위에 발생한 혈전도 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뜻일세.”
“……그게 정말인가?”
“의료진은 암 말고도 다른 질환에도 충분히 응용이 가능할 거라 보고 있네.”
이형준은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120세 시대라 일컬어지는 지금, 그는 아직 80세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왔음에도 건강은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의사를 가까이 하고 살아야 했다.
흑석동을 제외하면, 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인물이었다. 가진 게 많은 만큼 건강을 향한 욕심도 컸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오래 살고 싶었다.
젊음의 비약이 등장했을 때 이형준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다시 한 번 젊고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다면, 그 무엇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절망에 부딪쳐야 했다. 유지웅은 국내 부호, 기업가들에게는 엄격한 도덕 기준을 적용했다. 여태껏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대다수의 국내 부호들은 판매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유지웅은 이미 왕 아닌 왕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재계를 가리지 않고 그의 눈치만 살핀다.
단지 돈이 많아서, 국제적 영향력이 대단해서만이 아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한 나라를 쓸어버릴 무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나설 것도 없이 브라우니만 투입해도 전 세계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무력 투사를 않는 것뿐이다.
「친구라 생각했는데 실망했습니다, 회장님.」
태안 결정체 정제공장 폭발 사고 때, 유지웅이 보여준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형준 회장은 그 뒤로 유지웅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뒤늦게나마 깊은 반성의 의미로 사재를 털고 그룹의 자산을 털어 피해자들에게 적극 배상했지만, 유지웅은 이렇다 할 말도 없었다.
좋은 사이로 남을 수 있었음에도 그 한 번으로 모든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주름진 손등이 주먹을 꽉 쥐었다.
“모듈 치료기라는 거, 나한테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군.”
“그렇지. 자네 나이를 고려하면 개두 수술은 위험해. 힐은 만능이 아닐세.”
한때 외과적 치료에 힐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조 힐러들은 외과 수술이 끝난 후 힐을 써서 금세 상처를 낫게 했다. 외과 부상자들은 힐을 통해 간단하게 치유했다. 때문에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는 질병이 아니라, 외과적 회복 때문에 입원을 하는 환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몇 년 전, 보조 힐러도 레이드에 투입이 가능해지면서부터 의료 센터에서 일하는 이들은 턱없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의료계에서 종사하는 보조 힐러가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외과 수술에 힐러를 부르려면 적어도 3,000만 원 이상은 지급해야 한다. 그 정도 돈이 아니고서는 힐러들은 굳이 번거롭게 병원에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과 수술에 힐러를 부르는 것은 극소수 부자만이 향유하는 특권이 되었다.
“힐은 부상을 치유하는 거지, 병을 고쳐주지는 않는다네. 수술 도중에 생긴 불상사는 힐러가 어떻게 해주지 못하지.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뇌경색이라도 발발하면, 모듈 치료기로 치료하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일세. 특히 자네 나이에는.”
“알았네.”
무겁게 끄덕인 이형준은 즉시 사람을 시켜 모듈 치료기에 관해 알아봤다.
“정식 허가는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다만 향후 얼마간은 암 환자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무료로?”
“예. 아마도 임상 실험 실적을 위해서인 듯합니다.”
“얼마간이라면, 기간이 얼마나 되나?”
“그건 내부적으로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일 년 이상으로 점치고 있습니다. 증세가 위급한 사람부터 순번을 매겨 시행한다고 합니다. 이미 접수를 받고 있고, 환자들이 줄을 서서 대기 중입니다.”
비서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세종시에 있는 모듈 장치는 애초에 치료가 아니라 연구설비인 만큼, 따로 치료 목적의 모듈 장치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형준은 가만히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고민이 깊어졌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일성이라는 이름만으로 대기 순번에서 특별 배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지웅은 다르다.
그에 관해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어느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었다.
―회장님은 기존 재벌들과 행보를 같이 맞추지 않고 오히려 평범한 약자들을 보호하는 듯한 일을 많이 해오셨는데요. 레이더로 갓 각성한 당시 결정체 유통 과정에서 기존 재벌들에게 많은 이득권을 뺏긴 반감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 해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딱히 반감 때문은 아닌데요.
―그럼 무엇 때문이죠?
―글쎄요. 재벌 총수나 샐러리맨이나 저한테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당시 그 한 마디에 국내 여론은 벌떼처럼 끓어올랐다. 재벌 총수나 평범한 서민이나, 어차피 그에게는 똑같다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네. 재산 규모를 봐라.
―일성 회장도 유지웅 회장 앞에서는 폰팔이지, 뭐.
당시 이형준 회장도 그 인터뷰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이다.
재산 규모, 힘의 규모에서 이미 유지웅은 까마득한 곳에 올랐다. 기존 재벌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지나가는 서민이나 재벌 일가나 그에게는 똑같은 가난뱅이일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일성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약속도 없이? 창백한 비서실장의 표정에서 이형준은 문득 낌새를 느꼈다. 설마?
“흑석동입니다.”
“유 회장인가?”
“아닙니다. 정효주 여사입니다.”
“어서 맞이하게. 아니, 내가 직접 나가지.”
“이미 응접실에 와 계십니다. 회장님의 몸이 불편한 걸 알고 계시다며…….”
정효주가 저택까지 직접 찾아왔다면 이형준은 당장 뛰어나가 맞이함이 옳다. 둘 사이에는 그만큼 커다란 사회적인 격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형준의 몸이 불편한 점을 배려해서 정효주는 한 박자 빠르게 응접실로 들어왔다. 계산된 배려에 이형준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여자를 이기라고 했으니.’
문득 손녀에게 미안해진다. 자신이나 손녀나 더 이상 유지웅에게 미련을 두고 있지 않지만, 한때 그룹 총수로서 품은 욕심 때문에 손녀는 몇 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물론 아직도 창창한 이십대이니 문제는 없다. 다만 할아버지로서, 상대도 안 될 여자임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무리한 명을 내린 것이 가끔씩 미안해질 따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어서 와요. 정 여사님.”
차분하게 그녀를 맞이하며 이형준은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무슨 일로 왔을까? 정효주 본인이 직접 자신을 찾아올 일은 거의 없다. 짐작 가는 데가 없다 보니 궁금증이 짙어졌다.
“사실 일성그룹 대주주 자격으로 찾아왔어요.”
“대주주요?”
이형준은 살짝 혼란스러웠다.
정효주는 단독으로 일성전자 등 그룹 주요 계열사 지분의 20% 이상을 가지고 있다. 우호 지분을 합치면 과반이 훨씬 넘는다. 막말로 정효주의 한 마디면 그룹 전체를 물갈이 할 수도 있고, 그룹을 공중분해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해가 안 간 것이다. 대주주의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그만이다. 이처럼 따로 자신을 직접 찾아올 이유도 없고, 그래야 할 만큼 아쉬운 위치도 아니다.
“이희연 씨를 근래 눈여겨봤는데 차기 그룹 총수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춘 듯해서요.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재형이, 그 아이가 무슨 결례를 저질렀습니까?”
“이희연 씨의 자질을 높이 샀을 뿐이에요.”
정효주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형준은 그녀의 진의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래봬도 수십 년을 경영자로서 잔뼈가 굵은 몸이다. 짐작되는 일도 있었다. 얼마 전, 이재형이 흑석동 저택을 방문한 뒤 느닷없이 독일의 IBB사로부터 양성자 치료기 매매 계약을 인수했다. 아마 그때 무슨 사고를 친 모양이다.
손자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과정은 알 필요도 없다.
그룹 총수로서 중요한 건, 손자가 제니스 일가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뜨린 것이며,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가 손자 교육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 점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울러 너그러이 한 번의 기회를 주신 점,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이형준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이재형은 후계자로서 능력 부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리한 경영 철학에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했으며, 독선적이었다. 임원 및 이사진 사이에서도 그의 자질을 놓고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이참에 적당히 그룹 호텔 사업이나 하나 떼어주고 치워버리면 될 것이다.
이대로 정효주를 보내기 아쉬웠던 이형준은 그녀와 이런저런 담화를 가졌다.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여사님이 가진 능력이면 충분히 뜻대로 이루실 텐데, 굳이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배려인가, 과시인가. 이형준은 어느 쪽인지 궁금했다.
정효주는 웃음이 지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굳이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이 상무님과 빚은 불화 때문에 제가 직접 해임하면 어떤 식으로든 말이 나올 테지요. 저는 상관없지만 제 남편이 그 때문에 손해를 보는 건 싫습니다.”
“……그렇군요.”
“제 대답이 만족스러우셨길 빌어요.”
차갑게 웃는 눈빛은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뿜었다.
이형준은 조금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정효주를 놓고 세간에서는 참 다양한 평가가 오간다.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의 부자 남편을 두었음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현명하게 내조하는 아내, 없는 이들을 위해 재산을 털어 여러 자선공익 사업을 벌이는 여자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전국 일반 가정에 무료로 송전하는 것도 그녀가 사회에 베푼 업적 중 하나다.
이형준은 지금까지만 해도, 그녀가 자상하고 착한 성격의 규수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순간, 세간의 평가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사회를 위해 기꺼이 많은 돈을 내어놓는 이유, 남편의 심기를 거스른 재벌 후계자를 가차 없이 공격하는 이유, 굳이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 종용하는 이유…….
“부군을 깊이 사랑하시는군요.”
“사랑 없이 어떻게 부부로 사나요?”
대답은 간결했다.
이형준은 또 한 번, 진심으로 손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정효주는 착한 여자입니다.
정효주는 (자기 남자한테만) 착한 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