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684)
00684 흔들리는 대국? =========================================================================
흑석동은 사회를 위해서 베푸는 게 많다. 복지 재단을 통해 운용하는 자금만 해도 국가 복지 예산을 넘어서며, 전국 일반 가정에 무료로 전기를 공급해준다. 또 세 개의 사학 재단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게 해준다. 제니스 종합병원 또한 그런 베풂 중 하나이다.
그런 나눔의 뒤에는 정효주가 있다. 때문에 세간은 깊은 호의로 그녀를 대한다. 유지웅이 젊은 나이에 거부가 되었음에도 사회를 위해서 우호적인 일을 펼치는 것을 전부 그녀의 덕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을 자상하게 배려하는 따스한 심성의 소유자
세간에서 그녀에게 가진 이미지다. 그런 온화한 이미지 덕분에 그녀는 특히 가난한 소외계층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반대로 말하면 기득권층은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할 수 있으리라. 실제로 흑석동 때문에 기득권층이 손해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전기 사업 민영화로 큰돈을 좀 만져 보려고 했더니 일반 가정에 무료로 전기를 공급해버렸다. 덕분에 민영화는 취소되고 산업 전기료가 급격히 뛰었다. 발전 비용을 더 이상 민간 가정에 부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레이드 보험 시장도 제니스 보험재단에서 99% 이상을 독점하게 된 지 벌써 몇 년째다. 각종 보험사에서는 손가락만 빨며 구경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요즘 보험재단에서 슬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보험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에, 국내 보험사들은 좌불안석이었다.
결정체 유통사는 어떤가. 유지웅 하나 때문에 공격대와 결정체 유통이익을 나눠야 했다. 그전까지는 매입비만 지불하면 나머지는 모두 자기들 것이었는데.
이처럼 유지웅 때문에 손해를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기득권층에서는 유지웅을 두려워할지언정 좋아하지는 않는다.(블루 결정체 독점 공급국 및 국제적 위상 증가로 얻게 된 간접 이익이 손해보다 더 크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여사님이 어떤 분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군요.”
“그래요? 회장님이 보시기에 저는 어떤가요?”
정효주는 조금의 당황기도 없이 해맑게 웃으며 반문했다. 여유 가득한 얼굴에 이형준은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운 좋게 돈 많은 남자를 꿰어 찬, 예쁜 외모가 전부인 마음씨 착한 여자가 아니다. 천문학적인 부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올바르게 통솔할 줄 아는 현명한 여자다.
그녀가 남편을 움직여 사회에 베푸는 건 심성이 착해서가 아니다. 그게 남편에게, 나아가 자기 가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민중의 호의를 쌓아 존경받는 명문가로서 길고 굳건한 영향력을 쌓아 올리기 위함이다.
“가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그런 분으로 느껴져요.”
“맞아요. 저는 제 가족이 가장 소중해요.”
“여사님이 다방면에 걸쳐 사회활동을 하시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이유이겠지요.”
“정확하시네요.”
“하지만 그래서 의문이 갑니다. 굳이 가진 자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까?”
이형준은 그 점이 이해가 안 갔다. 사회적인 영향력을 위해서라면, 기득권층을 자기 우산 아래로 끌어들이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손을 잡으라는 게 아니라(그러기에는 격차가 너무 크다) 수중에 끌어들이라는 것이다.
정효주는 픽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였다.
“가진 자요? 누가요?”
“…….”
“저희 입장에서는 재산 수준은 다 고만고만해요. 그럼 머릿수를 따지는 게 낫지요. 안 그런가요?”
과연, 하며 이형준은 가볍게 신음했다. 배포도 보통 배포가 아니었다.
“회장님이나 다른 부자들을 굳이 적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 어떻게 되었는지는 회장님이 잘 아실 텐데요?”
“…….”
맞는 말이다. 제니스는 일부러 가진 자를 적대하거나 싸움을 걸진 않았다. 약한 자에게 불리하게, 잘못된 점을 몇 가지 돌려세웠을 뿐이다. 불합리한 제도에서 이익을 보던 이들은 당연히 손해를 보게 되고, 그것을 가리켜 제니스가 자신들을 적대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불편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여사님이 바라시는 밑그림을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왜요, 도와주시게요?”
“능력이 닿는 데까지는 돕고 싶군요.”
“별 거 없어요. 저나 그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냥 딱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만큼까지만 사회가 건강해지기를 바래요.”
“……이상과 현실은 다릅니다.”
“알아요. 그 간극을 아는 게 어른이죠.”
“그럼, 어째서…….”
“힘이 있으니까요. 단지 그뿐이죠.”
이형준은 가슴이 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보인 힘에 대한 자신감, 단지 그 후광에 짓눌려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다른, 불편한 무언가가…….
정효주는 웃었다.
“회장님은 회장님 본인과 가족, 그리고 그룹의 이익을 다른 그 어떤 무엇보다 중요시하셨죠. 그룹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꿔오셨죠.”
“…….”
“저 역시 다르지 않아요. 제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회를 바꿔보려 합니다. 그래서 저는 회장님을, 그리고 다른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는 거구요.”
일성그룹은 돈을 추구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일성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기꺼이 감내하면서까지, 사회를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나갔다. 그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정효주는 일가의 명예, 사회적인 존경을 추구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비난하지 않는다. 그 말은 이형준에게, 그 어떤 박애주의자보다 무섭게 들렸다.
어느덧 손에 흥건히 땀이 고였다. 바보같이, 지금까지 정효주를 잘못 봐도 한참이나 잘못 봤다. 능히 황후의 자리가 어울리는 사람 아닌가.
‘희연이한테 이런 여자를 이겨내라고 했으니.’
허탈한 웃음마저 나온다. 얼마나 자신이 바보 같은 일을 시켰었는지 가슴이 짜릿했다.
“옛날 이희연 사장님께 어떤 언질을 주셨는지 사실 다 알고 있어요.”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이미 돌리신 마음,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제가 많이 섭섭했다는 건 잊지 말아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호랑이 입에서 살아나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정효주가 웃는 얼굴로 ‘다 알고 있다’는 말을 할 때, 이형준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맛 봤다. 막말로 정효주가 마음만 먹으면 이씨 일가를 파멸시키는 건 문제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욕심도 났다. 정효주는 본질적으로 자신과 다르지 않다. 다만 추구하는 이익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정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거래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형준은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젊음을 탐냈다. 갈구했다. 젊음의 비약을 팔 수 없다는 유지웅의 통고에 어느 누구보다 심하게 좌절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그에게 있어 남은 유일한 희망은 건강과 젊음뿐이다. 그것을 정효주가 줄 수는 없을까?
‘아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정효주는 누구보다 가정을 소중히 하는 여자다. 물질적으로 아쉬울 것도 없다. 그녀는 남편이 세운 기준을 결코 건드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만 우습게 되고 끝이 나리라.
“만약 회장님이 위급해질 경우 모듈 치료기가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어요.”
이형준은 살짝 흠칫 했지만 곧 침착해졌다. 흑석동이 가진 정보망은 국정원을 아득히 초월한다. 자신의 건강 정보쯤이야 얼마든지 손쉽게 빼낼 수 있으리라.
그는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택했다.
“맞습니다. 젊음은 이미 물 건너간 이상, 모듈 치료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제니스 병원에서 회장님께 우선순위를 드릴 수도 있겠죠.”
“제가, 아니 일성그룹이 무엇을 해드리면 됩니까?”
“그건 회장님께서 생각을 해보셔야죠. 무엇을 해야 제가 만족할까, 하고요.”
뼈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형준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재계에는 이상할 정도로 흑석동과 인연이 있는 인물이 없다. 유지웅이 국내 재벌들에게 아쉬운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정효주와 이어지는 자그마한 인연의 끈은 분명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다.
* * *
가렌은 오늘도 연구실에 틀어박힌 채 시뮬레이션 모델을 점검하는데 한창이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났고 옷에서는 퀴퀴한 냄새마저 났다. 밥을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 조수가 식사를 제때 챙겨주지 않았으면 진작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가능성은 있다.’
그는 폐쇄 모듈의 원리에 집중했다. 결정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만능의 가상 레드 결정체, 그 무궁무진한 힘이라면 방사능 물질을 제거하고 오염된 땅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도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덜컥, 하고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온다. 손님이 입을 열었다.
“연구는 잘 되어 가냐?”
“교수님.”
니트로 박사였다. 그는 가운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살짝 삐딱하게 섰다. 저런 모습을 보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건방진 천재 과학자 소년처럼 보인다. 물론 그 실체는 116살 먹은 괴짜 과학자이자 자신의 은사이지만.
“교수님이야말로 사업은 잘 되어 가십니까?”
“사업? 무슨 사업?”
“요새 소문이 자자한대요. 장차 제니스 가문의 사위가 될 몸이라고요.”
니트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헛소리라고요?”
“그래. 밥이나 몇 번 같이 먹었을 뿐이야.”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은데요?”
“…….”
니트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가렌은 문득 이 젊어진 은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파릇파릇한 소년기를 되찾은 남자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젊은 여자에게 어떤 마음을 품을까.
“솔직히 우리는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그래서 난 특별한 생각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차이가 나다니요? 교수님이 뭐가 어때서요? 미혼남녀가 서로 사귀는 게 무슨 문제 있습니까?”
“나이가 많잖냐.”
“지금 교수님을 보세요. 나이가 많다고 고민하는 건 교수님이 아니라 정 이사일 겁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기겁할 걸.”
“그게 뭐 중요합니까? 마음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교수님과 정 이사는 충분히 잘 어울립니다. 사소한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너, 그렇게 제니스 본가 재산이 탐나는 거냐? 예산이 얼마나 부족해서!”
“가장 풍족할 때야말로 가장 예산을 확보해야 할 때라고 한 건 교수님이셨죠. 언제 부족해질지 모르는 게 예산이라고도 하셨고요.”
“이 못된 녀석이! 지금 스승을 팔아서 예산을 확보할 셈이냐!”
“교수님도 제자를 팔아서 예산을 확보하셨잖아요.”
“이 놈이! 이제 와서 원망을 드러내겠다는 거냐!”
“아니요. 전 한 번도 교수님을 원망한 적 없습니다. 그러니 교수님도 절 원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니트로는 이마를 탁 치며 탄식했다. 스승을 팔아 예산을 벌려고 하다니, 어찌 이런 못된 제자가 있을 수 있는가!
니트로는 일단 말을 돌렸다.
“방사능 제거 연구는 잘 되어 가냐?”
“폐쇄 모듈의 에너지 제어 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방사능 물질을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위적으로 방사선을 뽑아내어 반감기를 강제로 배속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거죠.”
“이론은 충분하군. 문제가 뭐냐?”
“그게…… 출력이 너무 모자라요.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소규모 출력입니다. 그 넓은 서부 지역을 모두 정화하려면 몇 백 년은 걸릴 겁니다.”
니트로는 잠시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좋은 생각이 있습니까?”
“폐쇄 모듈 말고, 다른 걸 써보는 건 어때? 북극곰 괴수 결정체면 충분히 높은 출력이 날 것 같은데?”
가렌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무릎을 탁 쳤다. 바보 같이! 왜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확실히…… 북극곰 결정체는 핵물질과 완벽한 융합을 이룬 물질이지요. 폐쇄 모듈보다 더 간단하게 방사능 물질을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렌은 니트로를 쳐다봤다. 간절한 로비, 아니 소망이 담긴 눈길이다. 니트로는 흠칫 놀라서 등을 돌렸다. 무슨 말이 나올지 듣지 않아도 이미 알았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수제자였으니까.
“안 된다. 난 못해.”
“교수님이 정 이사 통해서 한 번 청탁해보시죠.”
“이 놈이! 마지막까지 스승을 팔아넘길 셈이냐!”
“다 교수님한테 배운 겁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제자 이기는 스승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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