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799)
00799 %3C프리시즌 딜러편%3E 테러리스트? 아니죠 =========================================================================
일성그룹이 비자금 스캔들에 휘말려 종래에 법정 관리 신청을 하긴 했지만, 그 이면에는 앗 뜨거라 놀란 재계의 다른 대기업들이 있었다. 비자금 파동이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것을 우려해서 재빨리 일성을 잘라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 놈들이!”
이형준 회장은 평소 경쟁상대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고만고만한 것들이 뭉쳐서 수작을 부렸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일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유지웅이 대놓고 언론 플레이를 하지, 정부는 작정하고 칼을 빼들지, 국민들은 182조 원이라는 비자금 액수에 분노하지, TV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김범석이 나와서 떠들어대지, 재계는 일성을 해체하고 살점을 나눠먹기로 합의를 봤지…….
이렇게 일성그룹 해체 이야기로 온 사회가 떠들썩한 가운데, 만년적자에 시달리던 김포공항이 술병회항 스캔들이란 결정타에 팔려나갔다는 것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았다.
“음, 훌륭합니다.”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니, 아니에요.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유지웅은 김기영과 김범석의 합작 결과에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간단하게 김포공항 부지를 손에 넣은 데다가, 그 시선마저 다른 곳에 돌려버리다니.
일성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한 판이다. 김포공항이 개인에게 팔려나간 것쯤은 이슈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딱 그의 입맛에 맞는 깔끔한 일처리였다.
“김 비서, 자네도 수고했어.”
“아닙니다. 김 실장님의 지휘를 따랐을 뿐입니다. 실장님이 저를 참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김범석은 벗겨진 머리를 숙이며, 모든 공을 상사인 김기영에게 돌리기 바빴다. 유지웅 앞에서 입의 혀처럼 굴면서도 상사의 점수를 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도 자기보다 나이 훨씬 어린 상사인데!
“그래요, 김 실장. 나이 많은 부하 직원 때문에 거북하거나 그런 것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김 비서님이 나이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부하 직원으로서 굉장히 철저하게 예를 차리셔서, 오히려 제가 그 점에서 참된 직장인의 태도가 무언지 영감을 많이 얻었습니다.”
“아닙니다. 김 실장님이야말로 나이 많은 부하 직원이라 이리저리 거북한 게 많으셨을 텐데 조금도 티내지 않고 저를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 저도 그런 부분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서로 얼굴에 금칠하기 바쁘다. 이것이야말로 부하 직원 간의 흐뭇한 친밀도 아닌가. 유지웅은 그저 기분 좋게 웃으며 격려의 말을 더했다.
“김 비서가 나이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늦게 들어왔으니 직번에 따르는 건 당연한 거지. 남의 돈 먹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안 그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회장님.”
어찌 보면 돈 가지고 치사하게 사람의 마음을 북북 긁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김기영도 안다. 김범석은 저렇게 대해주는 것을 오히려 좋아한다.
‘꼭 조직에 강하게 소속되어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더니…….’
자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김범석 같은 경우에는 철저한 충견 스타일이다. 죽으라면 정말 죽지는 못해도 죽는 시늉까지는 완벽하게 해낸다. 진짜로 죽은 건 아닌지 오히려 시킨 쪽에서 걱정이 될 정도로 감쪽같이.
“앞으로 곁에서 보필하며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부디 지도편달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회장님.”
“걱정하지 마. 난 한 번 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끝까지 책임진다. 김 비서 자네, 관짝 들어갈 때도 직통 핸드폰 갖고 들어가는 거 잊지 말고. 저승에 가서도 내 지시 놓치지 않도록 말이야. 알았어?”
“회, 회장님…….”
김범석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김기영은 속으로 살짝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노예, 아니 충견 근성이 대체 얼마나 뼛속까지 박혔기에 저런 말에 감동을 받는 거야?
죽을 때까지, 아니 저승에 가서도 부려먹겠다! 이런 말에 감동을 받는 게 말이 돼?
“김 실장도 내 사람이라는 자긍심 잊지 말고 항상 태도를 단정히 하세요. 김 실장의 대외 모습이 곧 내 얼굴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알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참 뻔한 말인데, 김기영은 그 말에 몹시 감동을 받았다. 조금 전에 김범석을 흉보던 것이 괜히 부끄러워진다. 그는 얼른 태도를 바로 했다.
“좋아요. 이제 두 분 다 나가서 일보세요.”
“예, 회장님.”
“알겠습니다, 회장님.”
두 사람은 무거운 어깨를 안고 나섰다. 김기영은 김포공항 부지에 지을 대저택 건설을 총괄해야 할 책임이, 김범석은 격납고에 채워 넣을 전용기들을 조달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두 비서가 나가자 그제야 정효주가 상층 계단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가셨어?”
“어. 내려와도 돼.”
정효주는 총총 걸어서 내려왔다. 집안인데도 그녀는 편안한 복장 대신 짙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밑단이 짧고 타이트하게 몸에 달라붙고 있어, 늘씬하면서도 아찔한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
요즘 그녀는 집에 놀러올 때 꼭 저런 옷만 골라 입는다. 유지웅은 최근 갑자기 달라진 복장에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보기 좋으니까 놔두고 있었다.
“너, 사람을 되게 잘 다룬다?”
“그런가?”
유지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사람 다루는 건 반은 안슐에게, 반은 정효주에게 배운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조금 묘하다.
“뭐 시킨 거야?”
“어. 나 얼마 전에 김포공항 샀잖아. 그거 허물고 내가 살 집 좀 지으라고.”
“……진짜?”
“응. 거기 활주로도 있어서 좋잖아.”
“활주로?”
“집에서 전용기 좀 타고 다니고 그러려면 활주로는 필수야. 요즘 집에 활주로 없는 사람이 어딨어. 헐리우드 가봐. 가진 거 쥐뿔도 없는 배우들도 스타랍시고 집에 다 활주로 있더라.”
정효주는 살짝 기가 막혔다.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헐리우드 스타라 해도 집에 개인용 활주로까지 두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근데 집에서 그런 옷 입고 있으면 안 불편해?”
“……왜, 별로야?”
“아니, 보긴 좋은데 너 불편할까 봐.”
“니가 사준 옷이잖아. 저번에.”
그래서 입었어, 라는 말까지는 아직 부끄러워서 정효주는 그냥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무심한 소꿉친구는 그런 수줍은 생략은 알아주지 않는 듯하다.
“이쁘고 좋긴 한데 집이잖아. 그냥 편하게 있어.”
“편하게 뭐? 너처럼 그러고 있으라고?”
정효주는 새침한 표정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는 위아래로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처음 그녀는 저거 한 벌에 천만 원이나 한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 아무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무슨 트레이닝복이 한 벌에 천만 원이 넘어?
“꼭 이런 거 입어야 편하나.”
“그럼?”
“벗고 있음 되지.”
“…….”
“왜, 내가 벗겨줄까? 불편해 보이는데?”
“됐어! 바보야!”
정효주는 토라진 듯이 홱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끼고 잔뜩 화났다는 티를 내는 모습이 신선했다. 그 모습에서 유지웅은 문득 이전 생의 잔향을 맡았다.
“너, 나랑 약속한 거 잊기 없기다?”
“무슨 약속을 했는데?”
“활주로가 있는 집 지으면 시집 온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거든?”
“했거든?”
“안 했거든?”
“그럼 시집 안 올 거야?”
“…….”
정효주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가만히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유지웅은 문득 불안해졌다. 혹시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무심코 저지른 일 때문에 나비 효과가 일어난 것은 아닌지 신경 쓰였다.
잠시 후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잔잔한 음성이었다.
“내가 너한테 시집갔음 좋겠어?”
“당연하지.”
“만약 안 간다고 하면?”
“그런 건 없어. 무조건 시집오게 만들 거야.”
“그래도 내가 안 간다고 하면?”
“그러니까 그런 건 없다니까.”
“정말…… 내가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새삼스럽게 뭘 따지냐는 듯이, 유지웅은 강하게 긍정했다. 보통 이 정도로 솔직하게 나가면 여자들은 감동받는다. 적어도 그의 경험은 그랬다.
그런데 그녀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너랑 별로 안 어울리잖아.”
“무슨 소리야?”
“솔직히 그렇잖아. 넌 지금 레드 몹도 한 방에 잡을 수 있는 뛰어난 딜러잖아. 그에 비하면, 난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반쪽짜리 탱커인 걸. 그것도 이제는 레이드도 갈 수 없는 초라한 신세인데…….”
“뭐 어때. 집에서 살림하고 내 돈 쓰고 그러면 되지.”
“결국 밥순이가 필요한 거네.”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너 갑자기 왜 그래?”
“그냥……. 난 솔직히 니가 나 좋아한다는 게 별로 안 기뻐.”
어딘지 쓸쓸한 그녀의 얼굴에 유지웅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너, 대체 왜 그래?”
“그렇잖아. 난 너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걸. 너한테는 차라리 어느 나라 왕녀 같은 여자가 어울릴 거야. 근사하고 당당하고, 모두가 우러러 보는 그런 태양 같은 여자 말이야…….”
사실 유지웅은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몰랐다. 그냥 그녀가 급격히 벌어진 사회적인 차이에 자격지심을 가진 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너 좋아하는데, 그걸론 안 돼?”
“사실 니가 날 여자로서 정말 좋아하는지, 아니면 소꿉친구라서 정 때문에 그러는지 난 잘 모르겠어. 괜히 너랑 사귀거나 했다가 나중에 잘못되면 소꿉친구였던 사이마저 깨져버리잖아. 난 그게 무서워.”
정효주는 우울한 표정을 짓고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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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