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23)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22화
도지윤 팀장이 14층으로 올라온 것은 뮤비 촬영 당일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 날이라 들었는데…… 오늘도 연습실에 나오셨군요.”
감탄한 건지, 질린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멤버들을 둘러본 도 팀장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여기 이 세 분이 앞으로 여러분의 스케줄 관리를 맡아 주실 겁니다.”
도지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남자를 매니저라며 멤버들 앞에 들이밀었다.
“지원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다들 천천히 말씀 나누세요. 저는 이만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도지윤은 재빠르게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
“…….”
멤버들과 사회 초년생 티가 팍팍 나는 매니저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멤버들이 촬영 스태프들의 차를 타고 다니다 못해, 아예 자기들이 운전하고 다닌다는 성화에 매니저랍시고 대충 뽑아서 던져 준 게 빤히 보였다.
어찌 되었든 앞으로 징글징글하게 붙어 다녀야 할 사이기에, 예찬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굴루스 리더 하예찬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예찬의 뒤를 이어 멤버들도 줄줄이 인사를 했다.
“엇,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김건호입니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매니저였으나 사교성이 좋은 몇몇 멤버의 질문 공세에 금방 마음이 풀어졌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예찬은 김건호 매니저의 나이가 스물넷이고 막 군대를 다녀왔으며, 첫 직장으로 레굴루스의 매니저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도 놀랍지 않다. 오히려 경력직을 뽑아다 줬으면 그게 놀라웠겠지.’
예찬이 속으로 NJ를 씹는 동안에도 심상록과 선우이경의 주도하에 멤버들과 매니저들은 대화를 이어 갔다.
“저랑 이경이가 스물셋이니까 말 편하게 하세요.”
“아, 그럴까…… 요?”
“에이, 앞으로 자주 봐야 하잖아요! 편한 게 제일이죠, 형!”
어느 정도 새 식구의 환영이 끝난 분위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예찬이 주의를 끌었다.
“이제 세 시간 뒤엔 이동해야 해서요. 가서 가볍게 안무 맞춰 보고 다시 쉽시다.”
뮤비 촬영 전에 마지막으로 안무를 맞춰 보기 위해 연습실에 나온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좋아! 먼저 노래 없이 살짝 해 본 다음 노래 틀고 한 번만 제대로 해 보자.”
예찬의 말에 선우이경이 자리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다른 멤버들도 군소리 없이 일어나는 걸 본 매니저가 어색하게 선 채로 주춤거렸다.
“아, 형은 편하게 앉아 계시면 돼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선우이경이 한쪽 벽에 나란히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그 사이 멤버들은 타이틀곡 도입부 위치에 맞춰서 자리를 잡았다.
예찬은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그럼 시작한다. 하나, 둘, 짝짝짝.”
선우이경이 입으로 세는 박자에 맞춰 아홉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규 매니저가 레굴루스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볍게랬는데…… 오래 안 걸린댔는데…….’
바닥과 운동화가 내는 마찰음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선우이경이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노래 틀고 다시 맞춰 보자.”
이번에도 한 번만이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 * *
급하게 샤워를 마치고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탄 멤버들이 뮤비 촬영장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이 한창 준비 중이었다.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도지윤 팀장이 멤버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들어 보니 오늘 감독님이 상당한 베테랑이라고 하더군요.”
‘정확히는 베테랑이었던 거지만.’
리스피릿의 데뷔곡 뮤비를 촬영했던 감독은 그 뮤비를 커리어 하이로 남기고 서서히 침몰하는 중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들과 경쟁하기에 너무 노쇠했을 뿐.
그 후로도 근근이 활동을 이어 갔으나 이전처럼 강렬한 무언가가 담긴 창작물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리스피릿이 벌써 4년 차니, 알 사람은 다 알고 거르는 감독을 NJ 이놈들은 참 잘도 주워 왔다.
‘일정이 빡빡하니 입 다물고 따라가고 있지만…… 정말 내 입맛대로 스태프들을 배치하고 싶다.’
그래도 기본은 아는 감독이니 훗날 다시 보기 괴로운 물건이 나오진 않으리라.
“오늘 뮤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네! 도 팀장님도 계속 계시나요?”
범세혁의 질문에 도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촬영이 시작되는 것까지만 보고 들어가야 합니다. 내일 아트 디렉터분과 미팅이 있어서요.”
도지윤 팀장은 타임 테이블의 경우 내부에서 디자인했지만 앞으로 공개될 콘셉트 포토나 앨범 디자인은 전적으로 아트 디렉터에게 맡길 예정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음, 모레가 포토 1차 공개일인데 아주 잘 돌아가는군.’
결과물의 퀄리티가 기간과 비례하진 않는다지만 해도 너무했다.
이런 일정이라니, 누가 뭐라 해도 굉장한 악덕 고용주였다.
모르긴 몰라도 돈을 시세보다 후하게 주는 게 분명했다.
정말 돈이라도 많은 회사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예찬은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컷. 좋네, 다음 장면 갑시다.”
누가 봐도 시큰둥한 얼굴로 컷을 외친 감독이 길게 기른 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데굴데굴? 데굴레굴? 아무튼 NG도 안 나고 아주 잘하고 있어요.”
“감독님, 레굴루스입니다.”
“아, 알지, 알아.”
촬영 내내 그룹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 없는 뮤비 감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이름은 좀 외우셔야죠, 선배님!”
뮤비 감독을 NJ에 추천한 당사자인 신 PD가 핀잔을 주었다.
“아니, 안다니까? 준일이 네가 얼마 전에 찍은 서바이벌 그룹이잖아.”
주변에서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몇 번 봤다며 뮤비 감독이 혀를 찼다.
“너는 옛날에는 꿈과 희망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더니, 애기들 고혈을 빨아먹는 방송이나 만들고.”
뮤비 감독이 과장되게 혀를 차자 신 PD가 발끈했다.
“고혈이라뇨! 그리고 츄마프에 꿈과 희망이 얼마나 넘쳤는데요! 봐요, 여기 이 아홉이 그 결정체 아닙니까?”
“얼씨구. 그래, 부정 투표도 너한텐 꿈과 희망 언저리에 있나 보지?”
부정 투표 언급에 신 PD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슬쩍 레굴루스 멤버들의 눈치를 살핀 신 PD가 뮤비 감독에게 속삭였다.
“아, 선배님! 그거는 부정 투표라고 뭐 결론 난 거 아니거든요? 어디서 이상한 뉴스 좀 보고 오신 거 같은데…….”
“이상한 건 네 머리통이지, 이놈아!”
뮤비 감독이 한심하다는 듯 신 PD를 향해 소리쳤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수상하던데 그걸 네가 몰랐겠냐?”
“선배님, 목소리 좀 작게…….”
“꼴에 창피하긴 해?”
‘속이 다 시원하군.’
이미 츄마프는 지나간 일이라 생각했으나, 신 PD가 욕을 먹는 걸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 어깨가 들썩거릴 것 같았다.
“감독님, 츄마프 잘 아시는 거 같지?”
심상록이 작게 물었다.
예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치고 촬영은 묘하게 성의 없이 한단 말이지?’
업계에서 내로라하던 시절의 감독이 겨우 햇병아리에 불과했던 리스피릿을 상대할 당시 열정과 카리스마가 넘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피사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더 이상 불태울 무언가가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불이 꺼진 예술가라는 건 언제 봐도 슬프군.’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아등바등하던 과거가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튼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주세요, 아셨죠?”
신 PD가 후배 체면 좀 살려 달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저 말이 하고 싶어서 굳이 선배, 선배 거리며 말을 붙인 모양이었다.
“난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코웃음을 친 뮤비 감독의 태도는 그 후로도 딱히 변하지 않았다.
원래 기대치가 낮았던 예찬은 별생각이 없었으나, 신 PD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자꾸 뮤비 감독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자꾸 방해하면 나가 있으라고 한다?”
“선배, 저도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리얼리티 촬영!”
예찬은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진짜 신 PD 나가라고 할까.’
제 나름대로 레굴루스를 위해 행동하고 있는 건 알겠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신 PD가 말을 할수록 멤버들은 실시간으로 풀이 죽고 있었다.
‘자꾸 저렇게 말을 하니까 뮤비 감독이 이상하게 찍고 있는 것 같잖아.’
어디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이야기를 좀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예찬의 귀로 비명이 들렸다.
“와! 이서후 씨!”
“어떡해!”
“하하, 안녕하세요. 네, 제가 바로 이서훕니다.”
‘누구라고?’
뒤쪽이 소란스러운 걸 느끼고 고개를 돌린 순간.
배새벽의 부친이자 국민 배우라 불리는 이서후가 생글생글 웃으며 촬영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빠!”
필요 이외엔 입을 열지 않는 배새벽이 드물게 큰 소리를 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이서후 배우님 아니야?”
‘아니, 저건 누구야?’
배새벽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서후의 이름을 외친 뮤비 감독이 득달같이 입구로 뛰어갔다.
오늘 보여 준 맥없는 모습과도, 이전 리스피릿 시절 봤던 날카로운 모습과도 완전히 달랐다.
빙글빙글 이서후의 주변을 돌고 있는 감독을 향해 이서후가 웃었다.
“안녕하세요, 윤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짜 오랜만이네!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야?”
감독의 물음에 이서후가 배새벽이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짓했다.
“오늘 우리 알콩이 데뷔 뮤직비디오 촬영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뮤비 촬영을 윤 감독님이 하신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알콩이? 아니, 데굴루스에 서후 배우님 아들이 있었다고?”
“레굴루스에요, 감독님. 인터넷에서 한창 시끄러웠는데 모르셨어요?”
“아, 나 같은 늙은이한텐 인터넷은 너무 어려워. 주변 사람들이 얘기해 주는 거나 귀동냥으로 듣는 거지.”
아무래도 조작 논란으로 탈탈 털린 신 PD 얘기는 업계 사람들이 신나게 퍼 날랐으나, 배새벽의 가족 관계는 전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PD들 입장에선 전자가 더 재밌는 뉴스긴 하지.’
“와, 그래도 후배 방송이라 본방송까지 다 챙겨 봤는데 전혀 몰랐네. 레굴루루 중 누가 배우님 아들이야?”
“레굴루스에요, 감독님. 아들은 새벽이인데요…….”
잠시 근처로 다가온 레굴루스 멤버들을 바라본 이서후가 미소 지었다.
“이제 다들 제 아들이나 마찬가지죠.”
‘저희 오늘 처음 만났는데요, 아버님?’
이서후의 눈빛만 보면 최소 십 년 이상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핀 아버지 그 자체였다.
과연 국민 배우다운 연기력이었다.
“윤 감독님 실력이면 말해 봐야 입만 아프겠지만, 제 아들들 잘 부탁드려요, 감독님.”
살갑기 그지없는 이서후의 말에 뮤비 감독이 넋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나만 믿고 있으라고!”
“감사합니다.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간단하게 주전부리를 좀 가져왔거든요. 드시고 하세요.”
촬영장 밖으로 나오자 커피 트럭과 피자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간단한 주전부리…….’
‘레굴루스 파이팅’이라고 적힌 판넬 앞에서 감독과 사이좋게 인증 사진을 찍은 이서후는 요즘엔 이런 게 유행이라던데 아들 덕분에 해 본다며 웃었다.
이서후가 다가오는 스태프들의 사진과 사인 요청을 전부 들어주었다.
덕분에 한참 후에야 레굴루스 멤버들은 그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굴루스의 리더 하예찬입니다.”
“반가워요. 우리 알콩이가 신세 지고 있는데 이제야 인사를 하게 되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예찬이 환하게 웃으며 빠르게 이서후를 훑었다.
과연 지금 보여 주고 있는 아들 바보 아버지가 이 남자의 본심일지, 아니면 아내인 배해선처럼 새까만 속내를 숨기고 있을지 파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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