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32)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31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음, 가볍게 말한다고 가볍게 들리진 않는군.’
온전히 예찬 본인의 사정도 아닌 것으로 이렇게 멤버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기 민망했다.
예찬은 일부러 더 과장해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당연히 좀 많이 무겁게 들리겠죠. 나도 내 얘기 아니었으면 그럴 거 같아요.”
분위기 쇄신을 위해 제스처마저 가볍게 했음에도 멤버들은 여전히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눈치만 살폈다.
‘이 자식들, 제법 뚝심 있군.’
예찬은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근데 처음에 민감한 부분은 패스하자고 했잖아요. 정말 저한텐 이제 별일 아니라서 이렇게 편하게 말한 거거든요.”
허세나 거짓말이 아니었다.
“부모님 일은 정말 오래전이라 아무렇지 않고, 형은 뭐…….”
잠시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생겨 버린 형을 떠올린 예찬은 태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죠.”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데뷔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없는 시간을 쪼개 여러모로 ‘하예찬’의 과거를 파 본 결과, 기자들이 알아낼 수 있는 선까진 전부 파악했다.
예찬의 형인 ‘하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는 예찬보다 딱 열두 살 더 많은 띠동갑이었다.
또 예찬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게임 회사에서 개발자 일을 하다가 지금은 퇴사한 상태였고.
선반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앨범에서 찾은 사진 속 얼굴엔 예찬과 닮은 구석은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교회 오빠 스타일?’
물론 하하경의 얼굴과 나이, 직업까지 알게 되었다고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사람에 대해 어떤 감정이 생겨나진 않았다.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는 예찬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선우이경이 예찬의 말을 받았다.
“그래! 형님은 분명 잘 지내실 거야. 형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예찬이도 잘 지내야겠네!”
아무래도 예찬이 강한 척을 한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오해였으나 정정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때까진 이경이 형이 잘 돌봐 줄게! 형만 믿어!”
선우이경은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마음껏 기대라고 말했다.
‘누가 누굴 돌본다는 건지.’
선우이경보다 배는 더 산 예찬으로선 그저 귀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심상록에겐 아니었나보다.
“그래, 예찬아. 뭔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형들한테 의지해.”
비장한 얼굴로 심상록이 눈을 빛냈다.
예찬은 굳이 찬물을 끼얹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서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편하게 얘기합시다. 뭐가 됐든 혼자보단 둘이, 둘보단 셋이, 셋보단 여럿이 해결하기 쉽잖아요.”
험난한 연예계 생활 도중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해결해 보겠다고 까불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걸 최대한 지양하려면. 작은 문제라도 서로 터놓고 얘기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야만 했다.
예찬의 눈치를 보느라 가여울 정도로 파랗게 질린 우휘겸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떨어지겠네…… 얼씨구? 이놈도 그러고 있네.’
살짝 옆을 보자 채은성도 만만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은 뭐였죠? 혈액형이랑 발 사이즈?”
여전히 공기가 묘하게 무거웠으나 예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다음 항목을 읽었다.
‘키랑 몸무게는 자연스럽게 넘겼군.’
어딘지 개운치 못한 공기 속에 예찬의 순서가 끝났다.
이제 스무 살짜리 동갑 사인방 중 생일이 가장 늦은 채은성의 차례였다.
“고등학교 때 예고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왔습니다. 부모님과 형, 그리고 남동생은 지금도 논산에 있습니다.”
“아, 나 논산 알아! 훈련소 있는 곳이잖아!”
어째서인지 반가운 기색으로 범세혁이 말했다.
채은성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덧붙였다.
“맞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는데, 기차역에 내린다고 총소리 안 들립니다. 길거리에 군인들만 있지도 않고요. 가끔 역에 내리자마자 훈련소 있고 훈련병들 쫙 깔려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논산‘시’고 훈련소는 시내에서 한참 들어가야 있어요.”
그간 맺힌 것이 많았는지 채은성은 속사포처럼 설명을 쏘아 댔다.
‘그런데 어딘가 평소랑 다른 느낌인데.’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이질감에 예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논산의 특산품은 딸기예요. 사실 전 서울로 온 이후엔 딸기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다른 지역의 딸기는 입에 맞지 않거든요.”
상대방이 괜히 호의로 딸기를 주면 곤란하다며 TMI를 남발한 채은성은 숨을 고르고 화이트보드를 확인했다.
‘역시 뭔가 이상한데.’
“키는 187cm고 몸무게는 65kg이에요.”
예찬의 폭탄 발언 이후 딱딱하게 굳어 있던 정의탁의 눈이 터무니없는 숫자에 돌아갔다.
“몇이요? 65?”
말도 안 된다며 정의탁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몸 구조가 나랑 달라요?”
이번에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의탁은 채은성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슬며시 들어 올렸다.
“와, 진짜 다들 어떻게 다 이러지?”
“의탁이 너도 말랐어.”
“저만 보면 그렇겠죠, 그렇지만 저보다 키는 크고 몸무게는 덜 나가는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면 상대적 퉁퉁이가 되지 않을까요?”
‘아하.’
정의탁까지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니 좀 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자식들, 아직도 나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군.’
얼핏 보면 평소와 비슷했지만 목소리에 섞인 열기가 한 김 식어 있었다.
‘그러면서 내 쪽을 자꾸 의식한단 말이야.’
대놓고 힐끗대지는 않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쪽으로 신경이 쏠려 있는 게 보였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더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게 기특했다.
예찬은 입 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고 두 사람의 만담을 한동안 따뜻한 눈으로 지켜봤다.
채은성 다음은 정의탁의 차례였다.
“전 몸무게 얘기 안 할 거예요. 빼고 얘기할 거니까 모른 척하시죠.”
비장하게 이야기의 포문을 연 정의탁이었다.
“본가는 제주도에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같은 동네에 사셨어요. 위로 누나가 셋 있고요.”
예찬은 츄마프 생방송이 끝나고 대기실에서 얼핏 봤던 정의탁의 누나들을 잠시 떠올렸다.
‘나이 차이가 꽤 있어 보였지.’
당시 정의탁의 머리를 미친 듯이 헤집으며 껄껄 웃던 누님들을 생각하면 늦둥이라고 오냐오냐 자랐을 것 같진 않았다.
“혈액형은 A형이고.”
“역시.”
“뭐가 역시예요?”
정의탁이 날카롭게 채은성을 노려보았다.
한 바퀴 눈을 굴린 채은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도 들어 봤을 것 같지만, A형은…….”
“참고로 전 혈액형별 성격 같은 거 안 믿어요. 인간 성격이 딱 네 가지라는 게 말이 돼요?”
정의탁은 딱 잘라 말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로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채은성이 물었다.
“……의탁이 너 MBTI는?”
“검사해 본 적이 없는데요.”
칼같이 돌아온 대답에 채은성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요즘 세상에 MBTI 검사를 한 번도 안 해 봤다고?”
범세혁이 옆자리에 앉은 우휘겸에게 슬며시 속삭이는 게 들렸다.
“휘겸이 넌 해 봤어?”
“……아니.”
우휘겸은 채은성에게 들릴세라 작게 대답했다.
덧붙이자면 예찬도 MBTI를 검사해 본 적이 없었다.
‘팬들이 무슨 유형일 거라고 분석하는 글은 몇 번 봤지만.’
예찬은 또다시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 전에 재빨리 막았다.
“MBTI는 신 PD님한테 얘기해서 콘텐츠로 만들어도 괜찮겠어.”
“앗, 그런가? 그러면 안 해 본 사람이 있는 게 오히려 좋을지도…… 좋아, 의탁이 넌 그때까지 MBTI의 M자도 검색하지 말고 있자.”
채은성의 빠른 태세 전환에 정의탁은 헛웃음을 흘렸다.
“의탁이 형, 다음 거.”
배새벽이 뚜껑을 닫은 매직펜으로 정의탁을 쿡 찔렀다.
여전히 채은성을 바라보고 있던 정의탁이 정신을 차렸다.
“가족력은 잘 모르겠어요. 이따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그리고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어요. 다른 때는 괜찮은데 가을엔 휴지를 달고 살아요. 약 먹으면 그렇게 심하진 않으니 활동하는 덴 지장이 없을 거 같고요.”
배새벽이 빠르게 필기를 마쳤다.
예찬은 자연스럽게 매직펜을 받아서 들었다.
“마지막은 새벽이 너니까 내가 쓸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배새벽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부모님이랑 계속 서울에서 같이 살았어요.”
모두의 머릿속에 배혜선과 이서후 부부가 떠올랐다.
이번엔 살짝 민망한 얼굴을 한 심상록이 손을 들었다.
“네, 상록이 형.”
다음엔 뭘 말해야 할지 고르던 배새벽이 심상록을 불렀다.
“그, 알콩 메이커가 워낙 유명했잖아. 혹시 학교 다니면서 알아본 사람들도 많았을까?”
배새벽에게 알새벽이란 별명을 선사해 준 게 신경 쓰이는지 어지간히 말을 고른 티가 났다.
“아.”
짧은 감탄사를 먼저 뱉은 배새벽이 설명했다.
“사실 제 또래 중엔 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요. 유명했다고 해도 잘 실감이 안 나요.”
“하긴. 새벽이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했던 프로그램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방송에는 제가 엄마 성을 따랐다는 얘기가 안 나와서 어른들도 잘 상상 못 하시더라고요.”
배새벽은 어렸을 적엔 알콩이와 닮았다는 말을 꽤 들어 봤다고 덧붙였다.
“그랬구나.”
오늘 하루 중 심상록의 눈이 제일 반짝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심상록은 배새벽의 키가 드디어 180cm에 진입했다는 말을 듣고도 무척 감격했다.
예찬은 좀 숨 돌릴 틈이 생기면 심상록을 저렇게까지 만든 ‘이서후의 알콩 메이커’를 꼭 찾아봐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 * *
‘연습하러 온 건데 정작 연습은 못 했네.’
짧고 굵게 끝내려던 자기소개는 이쪽저쪽으로 자유로이 가지를 뻗다 보니 상상 이상으로 시간이 걸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에 딱 한 번만 맞춰보자고 하면 다들 하겠지?’
연습하는 걸 좋아하는 놈들이니 흔쾌히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예찬이 형.”
복도로 나와 발걸음을 재촉하던 예찬의 옷깃을 누군가 잡아당겼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예찬이 뒤로 휘청였다.
급하게 옷을 놓은 손이 등을 받쳤다.
“괜찮아요?”
“어어, 왜 네가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놀란 토끼 눈을 한 배새벽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몰라서. 형, 생각보다 부실하시네요.”
‘이 자식, 정의탁이랑 놀더니 말본새가 옮았나?’
순식간에 부실한 놈으로 매도당한 예찬이 눈을 흘겼다.
“그래서, 왜 부른 건데?”
“아, 그게.”
‘얼씨구.’
이번엔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근처에 누가 없는지 사방팔방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한 배새벽은 예찬의 정면에 서더니 눈을 마주쳤다.
“믿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형.”
이번엔 예찬이 눈을 깜빡거렸다.
“……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