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5)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4화
‘요샌 정말 개나 소나 아이돌 한다고 나대는군.’
아이돌 덕질 장장 20년에 달하는 회사원 박모 씨는 이번 달에 데뷔한 아이돌들의 무대를 쭉 훑어봤다가 입맛만 버렸다고 혀를 찼다.
한 해에 데뷔하는 아이돌의 수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지만 그만큼 허수도 늘었다.
‘아니지. 이 정도면 허수밖에 없는 수준 아니야?’
뭣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동네 축제에 초대 가수로 온 올림포스 소속 아이돌의 무대를 보고 말 그대로 사랑에 빠져 버린 그녀는 그 후 오빠들을 바꿔 가며 끊임없이 덕질을 이어 갔다.
과거에 비하면 아이돌들의 평균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였다.
다만 그에 비례해서 덕후들의 보는 눈도 높아졌기에 그녀는 꽤 오랜 시간 자신의 심금을 울리는 새로운 오빠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SNS에 접속하자 마침 박모 씨의 구 오빠 중 하나인 유피테르의 이가원이 막 새 게시물을 올린 참이었다.
gawon_jupiter : 드디어 주제곡 무대 공개!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니까 첫 방송 많이 기대해 주세요^^
촬영장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셀카 다음 장에는 무대 단체 컷 캡처가 올라와 있었다.
‘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트레이너로 나간다고 했었지.’
이미 단물 다 빠진 포맷에 꽂아 넣다니 올림포스도 요새 감이 떨어졌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박모 씨는 자연스럽게 이가원의 사진을 저장했다.
기억하고 있는 프로그램 이름을 아이튜브에 검색하자 N-net의 따끈따끈한 새 영상이 가장 상단에 떴다.
‘돈 바른 티는 나네.’
섬네일에 보이는 무대와 연습생들의 의상이 제법 때깔 좋았다.
박모 씨는 대기업의 자본 맛이나 좀 볼까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밝은 반주가 깔리고 어두웠던 무대에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가운데에 서 있는 연습생이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린다.
‘오, 좀 생겼는데.’
흔히 배우상으로 분류하는 미형의 얼굴이었다. 무표정이 미소로 바뀜과 동시에 노래가 시작됐다.
[Choose your prince. 네가 선택하는 세계, 그 끝에 내가 있기를.]첫 소절만 들었을 뿐인데 벌써 덕후의 촉이 곤두섰다.
이건 된다.
박모 씨는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이윽고 세트장 전체의 조명이 켜지며 삼각형 대형으로 서서 춤을 추는 아홉 명의 연습생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얼굴 무슨 일이야?!’
센터를 맡은 연습생의 얼굴도 충분히 한 그룹의 비주얼 담당을 맡을 만하다고 흡족하게 생각했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심 봉사도 눈을 번쩍 뜨게 만들 것 같은 미남이 양옆으로 튀어나왔다.
한쪽은 근 5년간 데뷔한 아이돌 중 최고의 비주얼로 꼽히는 정찬양과 나란히 세워도 전혀 꿇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한쪽은 무뚝뚝하고 차갑지만 어쩐지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진지하게 전개하게 만드는 희대의 냉미남이었다.
‘온냉 얼굴 합 미쳤네. 아니, 잠깐. 이거 실화야?’
박모 씨는 잠깐 현기증이 났다.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세 연습생을 잡던 카메라가 조금 더 뒤로 물러서자 이번엔 다른 미남 둘이 옆에서 튀어나왔다.
‘이게 다 같은 그룹이면 한국 아이돌 역사를 새로 쓰는 수준 아니냐?’
설레발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심지어 다섯 다 말도 안 되는 레벨의 안무를 식후 산책이라도 하듯 가볍게 소화하고 있었다.
무대가 움직이고 다른 연습생들이 합류함에 따라 박모 씨의 광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랐다.
제습함에 고이 모셔 두었던 카메라를 꺼낼 때가 온 모양이었다.
같은 시각.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고3 수험생이 되는 예비 수험생 최모 양은 양손을 모으고 모니터 액정을 경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왜냐면 미래의 남편 얼굴을 처음 본 날이니까.
아침부터 열심히 문제집과 씨름을 했으니 잠깐 머리를 식힌다는 명목으로 들어간 아이튜브에서 그녀는 남편과 조우했다.
처음 카메라에 하얀 얼굴이 비쳤을 때부터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Choose me princess. 네가 선택한 세계, 그 끝에 내가 있어.]서늘한 미남이 프린세스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자 숨이 턱 막혔다.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엔딩 원샷에서 입술을 깨물고 웃는 모습은 또 어떤가.
최모 양은 지구도 부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스무 번 정도 그 장면을 돌려 봤다.
그렇게 갈증을 어느 정도 채우고 나니 댓글에 달린 프로필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 츄마프의 홈페이지를 켠 최모 양은 이름순으로 나열된 99명의 아이돌을 빠르게 스캔했다.
‘있다, 하예찬!’
거의 마지막까지 스크롤을 내리고 나서야 그녀가 찾던 연습생이 나왔다.
오빠, 아니 남편은 이름까지 완벽했다.
최모 양은 수험 기간 동안 끊기로 결심한 SNS에 접속했다.
‘겨울 방학이니까 아직 괜찮지.’
정신 승리를 하며 들어온 SNS는 아니나 다를까 아이돌 간잡이 하는 걸 좋아하는 지인들로 난리가 나 있었다.
아직 첫 방송은커녕 딸랑 무대 하나와 프로필이 공개되었을 뿐인데, 지인들은 벌써 희망하는 데뷔 조 조합이니 미는 연습생이니 바쁘게 떠들고 있었다.
최모 양은 닉네임 앞에 붙여 두었던 동결이란 단어를 슬그머니 지웠다.
‘……아직 겨울 방학이니까!’
그녀는 방학만 끝나면 바로 접을 거라고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하며 근 한 달 만에 SNS에 새 메시지를 올렸다.
– 예찬, 휘겸, 이경, 해솔, 용호, 승헌, 은성, 의탁, 기철 밉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음기즈 아이돌이 드디어 데뷔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 * *
“엔딩 민망해!”
심상록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꽤 인상적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민망한 모양인지 귀 끝이 빨갰다.
‘하다 보면 익숙해질 텐데.’
“상록이 완전 멋있었구먼, 뭘!”
GE 직원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심상록의 어깨를 두드렸다.
“맞아요, 형. 멋있었어요.”
옆에서 범세혁도 생글생글 웃으며 거들었다.
홈페이지에 프로필도 공개되었다는 직원의 말에 혹시 잘못 나온 게 없는지 함께 확인한 세 사람은 다시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휘겸이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찬은 심상록의 혼잣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노래를 틀었다.
지난 닷새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있어 본 결과, 심상록은 정말 표리일체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오지랖 넓고 주변 잘 챙기는 전형적인 호인인 심상록을 예찬은 자신의 그룹 네 번째 멤버로 정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어도 좋고, 지난 닷새간이 연기였다면 그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온종일 연습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을 텐데, 그런 순간에도 자신이 보여 주고자 하는 인간상을 연기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프로지.’
대열에 합류한 예찬은 정면의 거울을 통해 심상록의 얼굴을 한번 살폈다.
어느 쪽이든 함께 가기로 정했으니 우휘겸과 엮이는 일은 피하게 하고 싶은데, 범세혁에 이어 저 오지랖이 태평양인 놈은 어떻게 단속해야 할지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였다.
자정부터는 1차 온라인 투표가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세 사람은 새벽이 훌쩍 넘은 시간까지 연습에 몰두하느라 완전히 투표에 대한 것은 잊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차례차례 공개되는 티저들과 자기소개 영상도 딱 한 번씩만 모니터링했을 뿐, 세 사람은 묵묵히 연습에만 매진했다.
“의탁이는 아직도 제주도야? 서울에 왔으면 여기서 같이 연습해도 되는데.”
생방송 무대를 이틀 앞두고 심상록이 범세혁과 같은 소속사 연습생인 정의탁의 안부를 물어 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수건으로 땀을 닦던 범세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의탁이는 뭐 하고 있을까요?”
그걸 우리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예찬이 기억하고 있는 츄마프 99에서 정의탁은 항상 범세혁 버스를 잘 타서 승승장구한다고 욕을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둘 사이는 무척 끈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범세혁이 잘나가니까 방송에서만 친한 척을 한 건가?’
레크리에이션 때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역시 잠깐 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될 일이었다.
“내일모레가 촬영인데 슬슬 올라와서 연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심상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연락해 볼까요?”
굳이?
예찬은 입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주워 삼켰다.
딱히 예찬과 심상록의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는지 범세혁은 곧장 정의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 너머로 정의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탁아, 뭐 해?”
– ……연습하죠.
“제주도에서?”
– 저 서울 온 지 나흘 됐거든요?
순간 목소리에 왈칵 서러움이 묻어났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예찬은 미심쩍은 눈으로 범세혁을 보았다.
“그래?”
– 처음 제주도 내려갈 때부터 주제곡 공개되는 날에 온다고 했었잖아요!
“어…… 그랬나? 근데 왜 연락 안 했어? 서울 왔으면 같이 연습하지.”
– 형이 GE가서 룸메들이랑 연습하는 거 재미있다면서요. 저랑 말고 거기서 계속한다는 뜻 아니었어요?
얘 삐친 거 같은데.
슬쩍 심상록을 보자 지금이라도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 게 아닌지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당사자인 범세혁은 불편한 기색 없이 태연했다.
“난 그냥 여기 재밌다는 말이었는데…… 너 온 거 알았으면 같이 연습했지.”
– ……정말요?
“당연하지. 왜 의심해? 우리 사이좋지 않나?”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진심으로 한다니 놀라웠다.
정의탁의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다.
– 알겠어요. 아무튼 전 루벨에서 연습하고 있었어요.
“혼자 하려면 힘들지 않아? GE로 와서 같이 하자.”
– 아뇨, 저 가면 거기 형들도 불편하실 테고.
0.1초 만에 칼 같은 거절이 돌아왔다.
예찬은 확신했다. 저 자식 백퍼 낯가린다.
“여기 상록이 형이랑 예찬이만 있는데 둘 다 사람 좋아해서 괜찮아.”
‘사람 좋아해서 괜찮아.’라니, 일단 분석이 형편없는 건 넘어가더라도 꼭 강아지라도 소개하는 말투였다.
– 형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진짠데. 상록이 형이 먼저 너 오라고 했어.”
– ……그래요? 그래도 잘 모르는 사람이랑 남의 회사에 신세를 지는 건 제가 불편해요. 형, 이 말 심상록 형한테 그대로 전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전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미 당사자가 실시간 라이브로 듣고 있었다.
심상록의 표정이 한층 더 미묘하게 변했다.
“의탁아, 이거 스피커폰이라서 형이 들었어.”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범세혁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잠시 스마트폰 너머로 비명이 울렸다.
그 후 정의탁과 심상록은 지켜보는 예찬의 숨이 막힐 정도로 어색하게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 세혁이 형? 잠깐 나가서 통화해요.
“응? 그래.”
목소리를 음울하게 깐 것이 딱 봐도 잔소리를 퍼부을 게 빤히 보이는데 범세혁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마냥 천진난만했다.
예찬과 심상록에게 먼저 연습을 시작하라고 말을 남긴 범세혁이 스마트폰을 들고 연습실 밖으로 향하며 물었다.
“여기 오는 게 불편하면 내가 갈까? 둘이 연습할래?”
– ……아뇨, 저 혼자 해도 돼요.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나온 정의탁의 목소리는 어딘지 지금까지와 색이 달랐다.
예찬은 범세혁이 닫고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건 좀 싸한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