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6)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5화
츄마프 1화 방영 전날, 마지막 3차 티저가 공개되었다.
엔카운트다운 생방송 녹화를 위해 대기실에 구겨 넣어진 상태로 예찬과 연습생들은 막 올라온 마지막 티저를 함께 시청했다.
당연히 연습생들의 반응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와, 의탁이다.”
스치듯 화면에 정의탁의 얼굴이 지나가자 범세혁이 반갑다는 듯 현실 정의탁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앞뒤로 흔들었다.
“어지러워요!”
종이 인형처럼 팔랑팔랑 휘청거리며 정의탁이 나약하게 반항했다.
물론 범세혁은 더 신이 나서 좋다고 흔들어댔고.
“아, 세혁이 형 진짜!”
지난 첫 합숙 때 봤던 그대로 나사 빠진 형과 야무지지만 그런 형에게 속절없이 휘둘리는 동생의 모습이었다.
주변 연습생들 사이로 웃음이 번졌다.
예찬은 티저에 집중하는 척 자신보다 모니터 가까이에 앉아있는 정의탁의 표정을 살폈다.
‘착각이었나.’
범세혁과 통화 중 마지막으로 들렸던 정의탁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찬은 그 목소리가 영 신경에 거슬렸다.
아마 눈치 없는 범세혁은 모르는 어떤 앙금이 정의탁의 마음에 쌓인 거 아닐까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있는 둘 사이는 멀쩡해 보였다.
‘카메라 앞이라 내색하지 않는 걸 수도 있긴 한데…… 18살이 저렇게 연기를 할 수 있으면 너무 능청스럽잖아.’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정의탁은 아이돌이 아니라 배우의 길을 걷는 게 더 적성에 맞을 것이었다.
“와, 태랑이 잘 나왔다!”
“기 MC 멋있다!”
뭐?
연습생들의 환호성에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정의탁을 어떻게 떠봐야 할지 고민하던 것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예찬의 고개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화면으로 돌아갔다.
대기실 한편에 놓인 모니터 화면에는 합숙 첫날 연습생들이 레크리에이션에 참여하는 모습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게 왜 벌써 나와?’
예찬은 경악했다.
리셋 전에는 티저는커녕 본방송에도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다가 프로그램 종반에 비하인드로만 풀렸었다.
그랬기에 예찬은 우휘겸과 무려 다섯 게임 전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면서도 통편집을 걱정했을 뿐, 자신이 우휘겸의 절친이라 시청자들에게 눈도장 찍힐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대체 왜 티저에 나오는…… 아, 내가 너무 재미있었구나.’
화면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예찬은 이해했다.
아마 리셋 전 레크리에이션은 첫 합숙의 첫 촬영이 주는 긴장감에 쭈뼛거리기 바쁜 연습생들이 딱히 쓸 만한 그림을 뽑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예찬이 들어간 이번엔 달랐다.
예찬이 국가 대표 선수라도 된 것처럼 진지하게 미니 게임에 임하자 다른 연습생들도 점차 동조되어 마지막엔 거의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강당이 불타올랐다.
게다가 예찬과 우휘겸은 무려 5연승이라는 기록까지 냈으니 이래저래 써먹기 참 좋은 그림들이 나왔음이 자명했다.
화면 안에서 세상 진지하게 우휘겸을 목마 태우고 있는 자신을 보며 예찬은 무릎을 쳤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차라리 퀘스트를 실패하는 게 나을 뻔했다.
[연계 퀘스트 실패 시 스탯 중 하나가 랜덤으로 하락합니다.>‘말이 그렇다고, 말이.’
속으로 푸념이나 좀 해 보려 했더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튀어나온 홀로그램 창이 산통을 깼다.
만약 지금 레크리에이션 시작 전으로 다시 돌려보내 준다 해도 예찬은 더 열심히 하면 열심히 했지 퀘스트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우휘겸이랑은 더 엮일 일 없으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자.’
당연한 말이지만 GE에서 딱 한 번 모여서 연습한 이후로 우휘겸과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오늘도 같은 대기실을 쓰고 있는 데다, 앞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을 때는 심지어 옆자리에 앉았었지만 두 사람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츄마프 팀, 준비하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연습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앞뒤로 사전 녹화를 마친 팀을 배치해 둔 덕에 여유 있게 무대에서 위치 점검을 마친 예찬은 저리는 손끝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관객이 코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무대에 서자 지금까지와 다른 격렬한 감정이 요동쳤다.
마지막 리셋을 한 게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으니 이런 무대에 선 것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너무 먼 과거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예찬이 기분 좋은 긴장을 다스리고 있을 무렵 스피커를 타고 츄즈 마이 프린스 99의 주제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듭된 연습으로 이제는 들리기만 하면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어두웠던 세트장이 순식간에 밝아지고, 예찬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바로 본업을 잘할 때였다.
* * *
회사의 노예 박모 씨는 왈칵 치미는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면 안 된다! 이 역사적인 무대를 0.1초라도 놓칠까 보냐!’
눈을 부릅뜬 박모 씨는 미리 점찍어 둔 연습생들의 얼굴을 핥듯이 노려보았다.
츄마프 참가자들의 주제곡 생방은 츄마프와 엔카운트다운 양측 모두 비밀로 하고 있던 나름의 서프라이즈 무대였다.
그러나 아이돌 덕질을 어느 정도 해 본 덕후라면 오늘 이 무대가 있을 것을 예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금요일에 첫 방송을 하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예능을 그 전날인 목요일 엔카운트다운에서 홍보하는 것은 관례가 된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방청권에 당첨되지 못한 박모 씨는 황금 같은 연차를 내고 새벽부터 선착순 입장 줄에 서 있었다.
그나마 1군 아이돌 무대가 없는 빈집 시즌이라 새벽부터 줄을 선 거지, 지지난 주였으면 리스피릿 팬들과 경쟁하기 위해 전날 퇴근을 방송국 앞으로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잠깐 공주님, 당신의 왕자가 여기 있어요.]‘그나저나 실제로 들으니까 성량 대박인데.’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가사에 어깨를 부르르 떤 박모 씨는 AR을 뚫고 퍼지는 소리에 감탄했다.
무대 영상에서는 편집으로 특별히 도드라지는 목소리가 없었는데, 현장에선 남다른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 이가 세 명 정도 있었다.
정확히 연습생들의 목소리가 공개된 티저가 없어서 이 미친 실력의 소유자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 픽이면 좋겠는데…….’
박모 씨의 눈에 오늘 이 무대는 전체적으로는 감히 이 실력으로 엔카운트다운에 오르면 안 될 만큼 완성도가 형편없었다.
그렇지만 S등급의 9명이 도입부에 보여 준 1분여의 무대만큼은 현직 아이돌들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이었다.
박모 씨는 마지막 소절까지 힘차게 노래를 마치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자신의 픽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오래간만에 정말 재미있는 덕질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생방송 무대 이후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츄마프 99에 관한 이야기로 제법 소란스러워졌다.
예찬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이었다.
– 오늘 자 가슴이 웅장해지는 츄마프 연습생 비주얼
– 츄유프 무대 넘어진 놈 셋 아니고 넷이더라ㅋㅋㅋ
– 카메라 너무 ㅅㅅㄹ만 잡지 않음?
– 엔카 생방 연생들 실물 후기 씀 (인증有)
– 츄유프 직관 후기 ㅍㅇ
– 가운데 셋 왜 엔딩 포즈 다 머리 쓸어 넘기는 거로 함?
대형 커뮤니티에 올라온 제목들을 쓱 훑으며 예찬은 생각했다.
‘셋이 아니고 넷이었냐.’
세 놈은 넘어지는 걸 봤는데 나머지 한 놈은 놓친 모양이었다.
마지막 꽈당의 주인공은 자기 전에 다시 보기로 확인하기로 하고 SNS로 넘어오자 무대를 앓는 대부분의 주접 글을 제하면 거의 투표를 독려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 여러분 케이팝 역사에 길이 남을 얼굴 천재 범세혁에게 투표해 주세요!
– 우리 상록이 이번엔 꽃길 걷게 해주고 싶어요.
– 하예찬 관상이 딱 아이돌 해야 할 상임. 그러니까 우리 애 같이 아이돌 만들어 주실 분?
긴장 때문인지 S등급을 뺀 나머지 등급들에서 뚝딱거리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자연히 카메라가 센터인 심상록을 자주 잡았는데, 덕분에 양옆에 붙어 있던 예찬과 범세혁도 덩달아 화면에 오래 얼굴을 비치게 되었다.
그 덕에 주제곡 무대가 공개되었던 날보다 세 사람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랑 범세혁은 옆에 낀 느낌이라 좋은 반응만 받아먹고 심상록은 은근히 욕을 먹는군.’
1차 티저로 이가원의 촉촉한 눈빛을 맛보기 체험한 유피테르의 팬들은 심상록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덕분에 노골적으로 분량을 가지고 심상록을 욕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물밑으로는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이 차마 찍을 수 없는 몸짓을 선보인 다른 연습생들의 잘못인데 억울한 일이었다.
예찬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
‘이건 안 좋은데.’
지금은 아직 작은 불씨에 불과했다.
다만 초반부터 이런 식으로 적립된 포인트들이 쌓이고 쌓여 심상록의 발목을 잡을 게 뻔했다.
심상록과 함께 가기로 했으니 이걸 시작부터 한 번 끊고 가는 게 맞는데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까지의 예찬은 문제가 생기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해 봤다가 안 되면 리셋을 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시간적 효율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도전이 막힌 지금은 전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예찬은 우선 심상록도 뒤에서 조용히 도는 부정적인 반응을 파악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방침을 정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은 밤인데 선 넘는 거지. 내일 연락해 보자.’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임을 확인한 예찬은 침대에 모로 누웠다.
‘돌려 말하다가 긁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전혀 모르고 있는 애한테 대놓고 얘기했다가 괜히 알게 되어 컨디션 망치는 것도 곤란하고.’
이것도 영 어색했다.
리스피릿 멤버들이야 리셋을 통해 수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았으니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예상되었으나 심상록은 완전히 무지의 영역이었다.
[선택지 발생!>당신의 고민을 덜어 드릴게요!
― 헤이 상록이 형, 반응 어디까지 봤어요?
― 악플이 신경 쓰이시죠? 그런 형을 위해 제가 앞으로의 대책을 세워 봤습니다.
― 저 형이랑 데뷔하고 싶어서 그런데요, 지금 인터넷 반응 아시나요?
뭐야, 이 미친놈이.
예찬은 흰 눈을 뜨고 선택지를 노려봤다.
평소엔 선택지 아래 띄우던 카운트다운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고민해 보라는 거야 뭐야?’
[띠리리링.>그 순간 스마트폰 화면에 거짓말처럼 심상록의 이름이 떴다.
예찬은 홀로그램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10> [9> [8>그제야 증발한 줄 알았던 카운트다운이 튀어나왔다.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예찬은 이를 악물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 예찬아. 늦은 시간에 미안. 혹시 자는 거 깨운 건…….
“형.”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예찬은 심상록의 말을 끊었다.
예찬의 손가락이 차분하게 선택지를 눌렀다.
“저 형이랑 데뷔하고 싶어서 그런데요, 지금 인터넷 반응 아시나요?”
– …….
전화기 너머의 심상록이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