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65)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64화
“하, 오늘도 재미있었다. PD님 감사합니다~”
한 시간 남짓의 리얼리티 방송이 끝나고 소파에서 불쑥 일어난 선우이경이 신 PD를 향해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하하, 뭘요. 전부 여러분이 활약해 주신 덕분이죠!”
어깨에 힘이 들어간 신 PD가 코를 씰룩거리며 으쓱거렸다.
예찬은 덕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간 예찬은 그제야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아까 정의탁처럼 다른 사람이 보면 좀 그러니.’
멤버들 중에 인터넷을 체크하지 않는 건 츄마프 시절에 했던 예찬의 충고를 지금까지 따르는 심상록이나 마지막으로 인터넷이 담기엔 너무 큰 그릇인 범세혁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알아서 찾아보고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날것의 반응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방송 직후는 특히 자정이 안 돼서 정신 건강에 해롭지.’
딱히 검색창에 레굴루스 관련 키워드를 입력하지 않아도 리얼리티에 대한 글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었다.
‘레굴루스 디온에 3화 요약, 오늘 재미있었던 포인트, 대기업의 협찬 클래스…… 이거 재미있겠네.’
제목을 쭉 훑던 예찬은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게시글을 클릭했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feat. 우휘겸]우휘겸 유죄…… 얘 땜에 오늘 방송 혼자 곱씹으면서 머리 뜯고 있음
첨 방송 봤을 땐 192번이나 인사한 게 걍 웃기고 피디 개쌤통이넼ㅋㅋ 했었거든?
근데 갑자기 그렇게 인사를 하게 된 이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 거 같은 거
애기가 스태프한테 아이스크림 주려고 돌아봤다가 안 거잖어…… 마음씨가 왜 이렇게 곱냐고 정말ㅠㅠㅠㅠㅠ
– 양아치의 얼굴에 천사의 영혼이 깃든……
└ 양아치는 선 넘었다고 쓰던 중에 얼굴 봤는데 양아치 맞네ㅋㅋㅋㅋ
– 나도 오늘 그 부분 넘 좋았음 봉투 첨엔 완전 빵빵했는데 스태프들 만나면서 점점 작아져
– 츄맢 때부터 보면 애가 순한 거 같은데 은근 예능감 있음ㅋㅋ
└ 인정ㅋㅋㅋ 순한 얼굴로 인사는 계속하는 패기
└└ 순하기만 해선 츄마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 헐 그냥 피디 꼬시다 했는데 글 보니까 갑자기 몽글몽글해지네
– 딱 봐도 짜고 친 것 같은데 휙줌들 호들갑 그만
└ 어그로들 달려오는 걸 보니 우리 애들이 핫하긴 한가 봄
└└ 내 생각에 백퍼 퇴바디임 님 새끼들 앨범 망해서 열받은 걸 왜 남의 잔칫집에 와서 풀어ㅠㅠㅠ
└└└ ?? 망한 앨범 박수 셔틀 메들리를 하고 있는 건 누구??
└└└└ 봐봐 리바디 맞다니까
인증이 필요 없는 익명 커뮤니티다 보니 댓글 창은 어김없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다들 어그로가 꼬이면 일단 리바디라고 생각하는군.’
이 정도면 단기간에 철천지원수가 된 아이돌 팬덤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다른 사이트나 SNS를 둘러봐도 대체로 비슷한 반응이었다.
‘우휘겸이 예능 캐가 되다니…… 역시 이 업계는 뭐든 단언할 수 없다니…… 응?’
스크롤을 내려가며 호의적인 반응을 캡처하는 사이,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발신자는 기태랑이었다.
– 예찬이 형, 저 기태랑입니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편지냐?’
흐린 눈으로 길게 이어지는 인사말을 건너뛰자 본론이 나왔다.
평소 ‘여여’ 거리던 애교 섞인 어미와 달리 메시지는 맞춤법 검사기라도 돌려본 것처럼 깍듯했다.
– 다름이 아니라 사실 저와 지유 형이 아이튜브 채널을 기획하고 있는데 레굴루스를 어떻게 한 번 모실 수 있을까요?
그 뒤로는 또 인사말만큼 길게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어 송구하기 그지없다는 말을 늘려서 적어 두었다.
‘뭐 하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남지유랑 같이 아이튜버로 나서려는 건가. 아이튜브라…….’
츄마프에서 떨어진 연습생 중 상위권 몇몇을 모아 프로젝트 그룹을 기획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거기 이름을 올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예찬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남지유와 기태랑이면 둘 다 이미지는 괜찮지.’
그렇지만 이렇게 두루뭉술한 이야기에 흔쾌히 응할 순 없었다.
– 너랑 지유 형 둘이서 하는 거야, 아니면 비타랑 같이하는 거야? 그리고 정확히 어떤 콘텐츠를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
기태랑과 달리 용건만 간략히 적은 사무적인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자세히 작성한 것 같은 장문의 메시지를 읽어 본 예찬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 우리가 이번 주까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일단 다음 주 월요일까지 회사와 멤버들이랑 이야기해 보고 대답해도 될까?
– 네! 당연하죠!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예찬이 형! 불 꺼도 돼요?”
어느새 방에 들어왔는지 침대 아래에서 정의탁이 말을 걸었다.
“그래, 이제 자야겠네.”
잠깐 시간을 확인한 예찬이 대답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사전 녹화 때문에 당장 잠들어도 몇 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거실 쪽이 시끄러웠지만 리얼리티가 끝나고 곧장 샤워하러 들어간 심상록이 나오면 알아서 해산시키리라.
‘예전엔 절대 이렇게 남한테 못 맡겼는데 말이지.’
팀 내에 잔소리꾼이 있다는 건 꽤 믿음직한 일이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예찬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주말에는 음악 방송이 주중보다 이르게 방영하기 때문에 그 후에 사인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레굴루스의 이름을 걸고 어엿한 아이돌이 되어 진행하는 사인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와, 왜 이렇게 떨리지?”
“의탁아, 그럴 땐 심호흡을 하면 된대. 자, 따라 해 봐.”
범세혁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시범을 보이려 했으나 정의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세혁이 형 속도를 따라 하다간 호흡 딸려서 기절할 거 같으니 사양할래요.”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사전 녹화가 있었음에도 피곤해 보이는 멤버는 없었다.
오히려 얼굴과 몸짓에 설렌 기색이 역력했다.
“얘들아, 김밥이라도 좀 먹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매니저가 종이봉투를 흔들며 대기실 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입에 넣은 거라곤 물과 샐러드밖에 없던 멤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매니저에게 몰려들었다.
“와아, 김밥인데 밥이 안 들어 있어…….”
신나게 포장을 뜯은 범세혁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범세혁의 말처럼 매니저가 사 온 김밥엔 밥이 들어 있지 않았다.
채 썬 당근이 우선 절반을 차지했고, 나머지 반은 파프리카와 오이, 단무지, 그리고 단백질원인 닭가슴살과 어묵, 달걀, 게맛살이 채우고 있었다.
범세혁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낯선 생김새의 김밥에 당황한 눈치였으나 매니저는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다이어트 김밥이래! 멋지지?”
“건호 형, 최고예요.”
예찬은 아낌없이 그런 매니저를 칭찬했다.
잠시 망설였던 멤버들은 금세 포기하고 하나둘 김밥을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맛있는데.”
“건강한 맛…….”
“……뭐야, 노란 거 단무지가 아니잖아?”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선우이경의 말에 예찬은 남아 있는 김밥을 살폈다.
‘정말이네?’
“노란 거 단무지 아니에요?”
좀 부은 것 같다며 음식물 섭취를 사양한 정의탁이 관심을 보였다.
“파프리카야, 파프리카.”
“빨간 것도 파프리카인데?”
“와, 어쩐지 단무지 맛이 안 나더라!”
“이건 사기 아니에요?”
작은 걸로도 쉽게 시끌벅적해지는 놈들답게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먹을 거에 되게 진지하단 말이지.’
“단무지는 무인데 너무하네!”
예찬은 조용히 김밥을 집어 먹으며 진심으로 분개하는 멤버들을 구경했다.
허기만 간신히 달랜 후 이어진 팬 사인회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이번 팬싸 때문에 앨범 백 장이나 샀어. 근데 왜 내가 만든 과자를 못 받는다는 거야? 내가 뭐 이상한 거라도 넣었을 거 같아?”
물론 돌발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찬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팬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혹시 과자 찍은 사진 있어요?”
“어? 어어, 여기…….”
당황한 팬이 얼떨결에 자리에 앉으며 스마트폰 갤러리를 뒤졌다.
화면 속에는 예찬을 본떠 만든 캐릭터 쿠키와 예찬의 이니셜 쿠키, 사자 모양 쿠키 등이 앙증맞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만든 사람의 진한 애정이 절로 전해졌다.
“진짜 예쁘다. 만드느라 정말 힘들었겠어요.”
“그, 그치? 그런데 아예 입장하면서 뺏어가잖아!”
처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팬이 투정을 부렸다.
예찬은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눈으로 맛있게 먹었으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 으응…….”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며 팬이 대답하자 예찬은 사인을 마친 앨범을 그녀에게 내밀며 웃었다.
“쿠키 고마워요.”
앨범을 받아 든 팬은 멍하니 고개만 끄덕거리다 옆으로 넘어갔다.
그녀보다 더 무례한 팬도 있었으나, 이미 츄마프 사인회로 단련된 멤버들에겐 그리 큰 시련이 아니었다.
‘수십 장씩 우리 앨범을 사고 오신 이클립틱들이니까.’
랜덤 추첨이나 선착순으로 대상자를 뽑았던 츄마프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멤버들에 대한 태도에 호감이 전제되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팬들이 오늘 여기에 온 걸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새삼 다짐하며 예찬은 눈을 빛냈다.
그 사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팬이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낮은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찬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인사를 받았다.
‘이 사람 차례군.’
처음 사인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굉장히 눈에 띄는 팬이었다.
왜냐면 다른 팬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불쑥 솟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음악가온에도 오셨었죠?”
“헉! 어떻게 아셨어요?”
예찬이 아는 체를 하자 긴장했던 것도 잊었는지 상대의 목소리가 커졌다.
예찬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봤으니까?”
“와, 예찬 님이 날 보셨구나…….”
“크흠.”
갑자기 튀어나온 호칭에 진짜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헛기침으로 위기를 넘긴 예찬이 물었다.
“평소에 그렇게 불러요? 예찬 님이라고.”
“네? 어떻게 아셨어요?”
“방금 말했어요.”
“제가요?”
언제 말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래, 눈앞의 팬은 소년이었다.
예찬과 말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는지 소년 팬은 준비해 온 것 같은 이야기들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저 츄마프 때부터 팬이었는데, 한 번도 사인회 당첨된 적이 없어서…… 근데 그때 만났으면 저한테도 공주님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럼요, 공주님.”
예찬은 사인을 마친 앨범을 소년의 쪽으로 밀며 미소 지었다.
“으아!”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소년 팬은 돌려받은 앨범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