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66)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65화
“레굴루스 덕분에 공주도 복숭아도 되어 보네요.”
이런 아기자기한 애칭은 난생처음이라며 소년 팬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귀엽네.’
팬들과 이렇게 마주할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뭉클한 감정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예찬의 마음을 적셨다.
“예찬 님, 앞으로도 계속 응원할게요!”
주먹을 불끈 쥔 소년 팬을 위해 예찬은 자신도 주먹을 쥐어 가볍게 손을 부딪쳤다.
“고마워요, 우리 복숭아.”
“어후.”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를 내며 호응한 소년 팬은 옆으로 넘어갔다.
예찬의 옆자리에 있던 배새벽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음.”
예찬의 앞에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년 팬은 배새벽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되자 침묵했다.
어색하게 눈을 굴리던 소년이 배새벽의 얼굴이 나온 페이지를 펼쳐서 건네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저기 내 이름은…….”
“알아.”
배새벽은 정말로 이름도 듣지 않고 사인을 시작했다.
아는 사이였나보다.
‘같은 학교? 아니면 중학교 동창?’
배새벽은 출석 일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 전 정의탁과 같은 학교로 전학 절차를 밟았다.
새로운 학교에는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았고, 그전에 다니던 학교는 입학하고 두 달여 만에 전학을 간 셈이니 중학교나 초등학교 동창일 수도 있었다.
“예찬아! 나 기억해?”
“당연하죠. 오늘은 회사 안 갔어요? 주말에도 불러내서 힘들다고 했잖아요.”
“와, 진짜 다 기억하는구나…… 나 감동했어!”
두 사람의 사연에 살짝 귀를 기울이고 싶었지만, 눈앞에 있는 팬이 더 중요했다.
“이거 내가 만든 화관인데, 혹시 써 줄 수 있을까?”
팬이 조심스레 생화로 만든 화관을 건넸다.
예찬은 손을 내밀어 화관을 받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씌워 주세요.”
“예, 예찬아. 누나 수전증 있어…….”
팬은 정말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예찬의 머리 위에 화관을 얹었다.
“어때요? 예뻐요?”
“……죽어도 좋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팬이 다른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예찬은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누나가 죽으면 난 싫은데.”
“……!”
입을 틀어막은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팬은 겨우 진정하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예찬아, 자극이 너무 세……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줄래?”
예찬은 사인을 마무리한 앨범을 정중히 내밀며 대답했다.
머리에 썼던 화관도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히 벗어서 돌려주었다.
“다음번엔 참고하겠습니다, 누나.”
배웅까지 완벽하게 마친 예찬은 다음 팬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아까 누구였어? 친구?”
사인회가 끝나고 차로 돌아오자 정의탁은 기다렸다는 듯 배새벽에게 물었다.
예찬도 기억 한편에 잠시 밀어 두었던 소년 팬의 얼굴을 떠올렸다.
“누구?”
그러나 배새벽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우리 또래인 남자 복숭아분 있었잖아.”
“아.”
정의탁이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기억난 모양이었다.
짧은 감탄사를 뱉은 배새벽이 안전띠를 매며 대답했다.
“반장이었어요, 전학 오기 전에.”
“어쩐지 똑소리 나게 생기셨더라! 반장이라니 잘 어울리네!”
채은성은 어째서인지 자기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전 학교면 길어야 두 달 다닌 거 아니야? 그것도 츄마프 합숙 안 하는 날만.”
“그렇죠.”
배새벽의 대답을 들은 범세혁이 머리를 좌석에 기대며 늘어졌다.
“그럼 그 친구, 아니, 복숭아분은 새벽이 보러 온 거야? 나는 완전히 내 팬이실 거라고 착각해 버렸네.”
“아, 사실 나도. 그래서 잠깐 의기양양했었다, 크윽.”
범세혁과 선우이경이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탔었다며 고해 성사를 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배새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보러 온 건 아닐걸요. 제가 나와서 츄마프를 봤다고 하긴 했는데, 절 좋아한다기보다 되게 민망해만 하던데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민망함을 이겨 낼 만큼 강한 팬심이 소년 이클립틱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묘한 기대감이 차 안에 흘렀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소년 팬이 자신의 열혈 팬이라 생각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중 아이돌 경력이 제일 긴 예찬도 생각했다.
‘이렇게 다들 착각할 정도면 정말 모두를 사랑해 주는 팬이시네.’
소년 팬을 포함해 오늘 사인회에 와 준 이클립틱, 나아가 레굴루스에게 귀한 사랑을 주는 전 세계의 모든 이클립틱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사이 매니저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얘들아, 점호 좀 부탁할게!”
“네, 일이요.”
예찬이 익숙하게 숫자를 외쳤다.
차가 움직이기 무섭게 배새벽과 범세혁은 깊은 꿈나라를 유영하고 있었다.
머리만 닿으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의 소유자들다웠다.
그와 달리 첫 사인회의 감회에 젖어 있는 몇몇 멤버들의 눈에서는 잠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담스럽게 반짝거린다고 해야 하나…….’
자연스럽게 리스피릿의 첫 사인회가 떠올랐다.
첫 리셋 땐 말 그대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간신히 데뷔를 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팬 사인회를 한다는 것 자체에 감격해 다들 바보처럼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땐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질질 짰던 거 같기도 하고.’
눈물샘이 고장 난 사람들처럼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 고맙다느니 미안하다느니 붙들고 잘도 울어 댔었다.
– 우리 진짜 앞으로 더 잘하자. 아니, 나만 더 잘할게! 너흰 완벽해!
– 무슨 소리예요, 희샘이 형. 형이야말로 제가 아는 형 중 최고인걸요.
– 어흐흐흑! 형들, 우리 진짜 평생 함께하는 거예요! 태어나는 날은 달랐어도 죽는 날은 같아야 한다고요!
– 나 진짜 열심히 살 거야. 형이랑 너희들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사람이 꼭 될 거야.
리셋을 반복하며 흐려졌던 기억이 오늘따라 기분 나쁘게 선명했다.
바로 옆에서 박마루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예찬의 상념을 깬 것은 조금 전 사인회를 되새기는 멤버들의 목소리였다.
“태어나서 머리띠를 이렇게 많이 써 본 건 처음이에요.”
옆에서 곤히 자는 배새벽을 힐끔거리던 채은성이 먼저 운을 띄웠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무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 모자랑 왕관도요. 저 오늘 왕관만 다섯 개 넘게 쓴 거 같아요.”
입이 간지러웠던 건 정의탁도 마찬가지였는지 반가운 기색이 듬뿍 묻어나는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난 팬들이 만족하셨을지 좀 걱정이야. 나름대로 바꿔 쓸 때마다 표정이랑 자세에 신경 쓰긴 했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는 심상록도 이야기에 합류했다.
멤버들의 말처럼 레굴루스의 기념비적인 첫 사인회를 위해 팬들이 단단히 준비하고 온 게 느껴졌다.
레굴루스는 데뷔와 동시에 수제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공지를 냈다.
예외는 오로지 편지뿐이었다.
팬 사인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팬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멤버들에게 바로 씌울 수 있는 모자나 목걸이를 양손 가득 들고 왔다.
‘그것도 전부 칼같이 돌려주기로 해서 혹시 정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들 가보로 간직한다며 들고 가셨지.’
“편지도 진짜 많이 받았지, 다들?”
“네!”
선우이경의 말에 정의탁이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날 기세로 강렬히 머리를 끄덕였다.
“한동안 편지만 읽어도 배부를 것 같다.”
“저도요.”
“오늘 잠은 다 잔 거 아니야?”
“정독하려면 밤새워도 부족하죠!”
“설레는 와중에 찬물 끼얹어서 미안하지만, 오늘은 못 읽어요.”
가만히 멤버들의 말을 경청하던 예찬이 끼어들었다.
“네? 왜요?”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져 있던 정의탁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근래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렇게 앙칼지게 눈을 뜨니 이놈도 역시 보통 인상은 아니었다.
정의탁은 눈앞에서 용돈을 흔들다가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넣은 친척을 보는 것 같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달리 선우이경과 심상록은 짚이는 데가 있는지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야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모르잖아. 회사에서 한 번 검토해야지.”
“아니, 그렇게까지…….”
이상한 팬도 없었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심하지 않냐며 정의탁이 말끝을 흐렸다.
“우리 읽으라고 써 주신 건데, 직원분들도 다 읽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팬들의 마음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건 훌륭한 태도였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예찬은 정론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우리가 주관적으로 오늘은 ‘괜찮다’, 아니면 ‘괜찮지 않다’를 나누는 것보다, 예외 없이 전부 검수하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어, 그건 확실히 그러네요…….”
예찬의 말에 정의탁이 곧장 수긍했다.
자신이 팬을 판단하는 게 더 실례일 수 있다는 걸 금방 깨달은 모양이었다.
‘말이 통하는 놈들이라 편하군.’
선우이경이 위로하듯 정의탁의 어깨를 두드렸다.
“팬들도 혹시 주인을 잘못 찾아온 편지를 우리가 읽는 것보단, 직원분들이 한 번 봐주시는 걸 더 바라실 거야.”
“맞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검수 없이 아티스트에게 그대로 전달했다고 하면 더 화를 내실걸요.”
“은성이 네가 말하니까 되게 믿음직스럽다.”
진성 아이돌 팬인 채은성이 동의하자 멤버들의 신뢰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얘들아. 너희가 받는 거 말고 쓰는 것도 웬만하면 다 회사의 검수를 받는다고 생각해야 해.”
운전에 집중하는 줄 알았던 매니저도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말을 받았다.
“지금까진 너무 바빠서 SNS는 회사 측에서 운영했지만, 슬슬 너희들도 써 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 물론 너희가 쓴 글이랑 찍은 사진을 회사에서 올리는 방식으로 말이야.”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다니, 크나큰 발전이었다.
‘사람 좀 뽑는다더니, 제법 잘 채워 넣었나 보네.’
예찬이 내심 감탄하는 사이에도 매니저의 말은 계속되었다.
“레인이나 허블 같은 소통형 앱이나 라이브를 할 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하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는 건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거잖아.”
매니저 또한 일취월장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완전히 이쪽 사람 다 됐네. 훌륭해.’
“네, 건호 형! 알겠습니다!”
“저도 알겠습니다.”
선우이경이 먼저 힘차게 손을 들고 대답하자 깨어 있는 멤버들도 뒤이어 동의했다.
“그럼 SNS는 언제부터 올릴까요? 오늘? 내일?”
‘이런, 거기 꽂힌 거였나.’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강해솔마저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하루에 몇 개만 올려야 한다, 뭐 그런 제한은 없죠?”
“숙소 도착하자마자 올리면 안 돼요?”
“오늘 마침 첫 팬 사인회 했으니까 딱 맞지 않나요?”
“이게…… 운명?”
“애, 애들아. 잠시만 기다려 봐.”
흥분한 멤버들은 올리고 싶은 사진이 잔뜩 쌓여 있다며 매니저를 달달 볶았다.
득달같이 달려든 멤버들을 진정시킬 건 예찬밖에 없었다.
“여러분, 운전하는 사람 그만 괴롭힙시다. 숙소 가서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고, 지금은 끝!”
“네~”
순식간에 조용해진 멤버들을 한 번 둘러본 예찬은 좌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오늘 남은 건 알콩 메이커 첫방뿐이고, 내일은 음방이랑 사인회, 그리고 DBS 라디오.’
이번 주도 정말 끝이 보이고 있었다.
‘다음 주 음악 방송에 반영되는 성적은 내일 일요일까지…….’
예찬이 석연치 않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리스피릿은 DBS의 방송에 나오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