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71)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70화
“뭐를 해? 화해? 그리고 너 지금 우리라고 했냐?”
어이가 없으니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예찬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정찬양은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 리스피릿을 꺾으니 어땠어? ‘호로새끼’한테 복수해서 시원했어?”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는지 알 수 없었다.
예찬은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정찬양은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말을 계속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지. 갑갑했지? 리스피릿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흠이 났으니까.”
“리스피릿한테 기스가 난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정찬양과 반대로 예찬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대꾸했다.
정찬양은 고민하지 않고 곧장 말을 받았다.
“그게 아니지, 예찬아.”
말로 꺼내지 않은 예찬의 불만이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정찬양은 가벼운 태도로 뒷말을 이어 갔다.
“리스피릿에겐 정이 떨어졌어도 리바디는 다르잖아.”
“…….”
리바디.
정찬양의 입에서 리바디의 이름이 나온 순간, 허를 찔렸다기보다 올 게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뮤직캐슬에서 리스피릿을 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 마음을 어지럽히던 게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예찬은 누구보다 리바디를 잘 알았으니까.
‘리스피릿의 커리어가 망가지면, 리바디들은 생각 없는 멤버놈들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힘들어 하겠지.’
“어때? 정답이지?”
‘오냐. 정답이다.’
예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서 외면했을 뿐이었나.’
머릿속에 자욱했던 안개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난 네가 했던 걸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야. 그러니 어떻게 보면 네가 있을 때의 리바디나 마찬가진데, 넌 깔끔하게 선을 그을 수 있어?”
절대 그렇게 못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이었다.
“그거 때문에 내가 했던 말까지 전부 따라 한 거냐?”
예찬의 질문에 정찬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땐 네가 나타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뭐, 결과적으론 이렇게 더 이득이 되었지만.”
정말로 운이 좋았다며 정찬양이 실실 웃었다.
놈의 말대로 완벽에 가까웠던 리스피릿의 이름 뒤에 오늘 자로 지저분한 꼬리표가 달렸다.
그리고 예찬은 그 꼬리표가 붙은 당사자인 리스피릿보다 당사자를 걱정할 리바디가 신경 쓰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부글부글 끓는 예찬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정찬양이 말했다.
“이걸 알려 주려고 친절하게 트로피도 양보했어. 어때, 효과적이지?”
정찬양의 눈이 기분 나쁘게 빛났다.
잠시 뜸을 들인 정찬양이 추억이라도 회상하듯 속삭였다.
“난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거든. 너보다도 더.”
“어, 헛소리 잘 들었다.”
예찬의 시큰둥한 태도에도 생글생글 웃던 정찬양이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난 네가 리바디가 아닌 리스피릿 멤버들에게 진작 정이 떨어졌어야 했다고 생각해. 그 많은 기회를 더 좋게 썼으면 좋았을 텐데, 내내 걔들이랑 그대로 데뷔한 게 이해가 안 갔다고.”
“다짜고짜 팀원 디스냐?”
예찬은 코웃음을 쳤다.
“두 번째, 아니 세 번째까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너도 학습 능력이 있는 인간인데 그다음부터는 깔끔하게 갈아 치우는 게 맞지 않나?”
제 딴에 맺힌 게 많았다는 듯 미간을 구긴 정찬양을 보며 예찬은 다시 시비를 거는 대신 더 해 보란 듯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지켜보는 나는 더 떨어질 정도 안 남았는데, 넌 비위가 좋은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잘도 그 낯짝들이랑 마주 보고 있더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된 멤버들의 행패를 떠올리고 있는지 정찬양의 눈이 탁하게 흐려졌다.
이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정찬양이 예찬을 바라보았다.
“하예찬, 남들은 가지고 싶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기회를 그렇게 머저리처럼 날려 버리는 게 옳다고 생각해?”
정찬양의 분노는 어느새 리스피릿 멤버들에게서 예찬으로 옮겨붙었다.
예찬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넌 왜 그 꼴 보기 싫은 애들이랑 데뷔했는데?”
정찬양은 잠시 입가에 손을 얹고 고민하더니 말했다.
“전관예우?”
“뭐?”
“아닌가? 좀 다른가?”
혼자 중얼거리던 정찬양이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내가 그 쓰레기들을 데리고 지금까지 해 온 건 전부 너를 위한 거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남 탓도 이 정도면 병이다. 그것도 지독한 불치병.
예찬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생각난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뱉었다.
“네가 아니라 내가 열일곱 살 연습생으로 처음 눈을 떴을 때, 본능적으로 알았어. 이제 이 세상에는 하예찬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예찬이 한때는 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정찬양은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하예찬이 반복했던 그 여러 번의 인생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오로지 내 이정표가 되기 위한 삶이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너무 가여운 거야.”
단어 선정이 그야말로 주옥같았다.
얼이 빠진 예찬은 대답하는 것도 잊고 정찬양을 바라보았다.
정찬양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했던 걸 그대로 따라 했지. 나라도 네 넋을 기리는 마음으로 말이야. 지금까지 내 행동들은 너를 향해 바치는 진혼곡이었던 거야.”
거기까지 말한 정찬양은 예찬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소매 안쪽으로 소름이 일었다.
“어렵지는 않았어. 리셋창이었을 시절부터 네가 지나온 모든 날이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거든.”
“네가 나를 왜 기려, 네가 뭔데?”
예찬이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가관이었다.
“정찬양, 노선 똑바로 하자. 너랑 나는 친구도 뭣도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철천지원수지. 내 자리를 뺏어 놓고 나를 위해서 날 따라 했다니, 네가 들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냐?”
말을 하다 보니 더 화가 치밀었다.
예찬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따졌다.
“친구가 아니라 원수라…….”
턱을 쓰다듬으며 예찬의 말을 곱씹던 정찬양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근데 네가 나한테 자리를 뺏긴 건 버튼을 눌러서잖아.”
예찬은 이번에도 귀를 의심했다.
“뭐?”
“내가 버튼을 누르라고 한 적 있었나? 선택을 한 건 너야.”
귀찮다는 듯 정찬양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말이…… 안 통해.’
예찬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한결 의기양양해진 정찬양이 입을 놀렸다.
“예찬아, 왜 이렇게 어렵게 살려고 해? 여기서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나랑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변하는 게 뭐 있어? 어차피 리바디를 사랑하는 네가 리스피릿을 망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잖아. 그냥 내가 너를 좋게 생각한다는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편하지 않을까?”
“…….”
“나는 정말로 너나 레굴루스와 다툴 마음이 없어. 그러니까 앞으론 서로 상관하지 말고 각자 갈 길을 가자.”
정찬양의 주둥아리에서 레굴루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 놈이 리바디를 언급했을 때처럼 불쾌해졌다.
“다툴 마음이 없다고? 츄마프 때부터 네가 이쪽에 시비를 건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무엇보다 나한테 애틋하단 놈이 할 짓은 아니지 않아?”
정찬양은 곤란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예찬아, 미지라는 건 공포야.”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액자처럼 만든 정찬양은 그 프레임을 통해 예찬을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난 리셋창이었고, 네 선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야. 그래서 너만큼이나 작은 변수에도 결과가 크게 변한다는 걸 알고 있지.”
여전히 예찬을 응시하며 정찬양이 말했다.
“나도 내 나름의 인생 계획이 있는데 갑자기 상상도 하지 못한 네가 튀어나온 거야. 내 안에서는 이미 무덤에 들어가 백골이 된 지 오래인 네가 말이야! 당연히 머릿속에 위험하다고 경고 경보가 울리지 않았겠어?”
“…….”
“넌 좀 피해 의식이 있는 애니까 아마 네가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내가 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가 좀 과하게 대응한 건 인정해.”
자연스럽게 예찬을 깐 정찬양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얼마 전까진 널 내 인생에서 빠르고 완벽하게 배제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
거기까지 말한 정찬양은 이번엔 손가락을 내리고 그대로 예찬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렇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넌 하예찬이잖아. 내가 세상에서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는 하예찬. 그렇다면 무서울 게 없지.”
속이 시원하다며 정찬양이 기재개를 쭉 켰다.
“너도 멀쩡히 이 세상에 있겠다, 나도 진혼곡이니 뭐니 때려치우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 보려고.”
손을 마주쳐 짝 소리를 낸 정찬양은 분위기를 가볍게 바꾸려 했다.
“너랑 내가 네 말대로 ‘친구’는 아닐지언정 이 세계에서 동떨어진 단 둘뿐인 존재인 건 맞잖아. 과거는 묻어 두고 앞으론 사이좋게 서로 응원해 주자. 그래야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덜 외롭지 않겠어?”
‘아까부터 친구란 단어에 미묘하게 감정을 싣는 것 같은데…….’
예찬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너 아까부터 그렇게 대놓고 떠들어도 되겠어?”
조심성 없는 태도를 나무라는 말에 정찬양이 손을 내저었다.
“아, 녹음. 미안한데 그건 안 됐을 거야. 나 그런 거에 안 당하게 설계되어 있거든.”
의미심장한 말에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정말로 먹통이 되어 있었다.
“주인공 보정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거지. 내가 원하지 않으면 몰카나 녹음은 불가능해. 어때? 너보다 훨씬 대단하지 않아? 참고로 나도 녹음하지 않았으니까 걱정은 하지 마. 이런 SF 소설 같은 말을 어디다 흘려 봐야 비웃음만 사지 않겠어?”
정찬양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아, 저거 인간 아니었지.’
예찬은 눈앞에 있는 놈의 정체를 새삼 자각했다.
예찬은 정찬양, 아니 사람의 가죽을 뒤집어쓴 리셋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리바디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없냐?”
“아, 리바디…… 리바디 입장에서도 리스피릿이 다 망하기 전에 나라도 솔로로 성공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리셋창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했다.
“솔직히 널 따라 해서 나한테 이끌린 거니까, 이게 날 좋아하는 건지 널 좋아하는 건지 헷갈려서 영 정이 안 갔거든.”
이 이상은 들을 가치가 없었다.
예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리셋창의 시선이 예찬을 따라 올라왔다.
예찬이 입을 열었다.
“야, 리셋창.”
본인이 듣기에도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해? 너랑 나는 화해를 할 수가 없어. 화해는 싸운 놈들이나 하는 거지.”
예찬의 머릿속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점차 선명해졌다.
예찬은 정찬양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리바디한테도 너 같은 쓰레기에게 계속 속는 것보단, 네가 망해서 속상한 게 나을 거 같다.”
예찬의 눈에 정찬양과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더한 불꽃이 튀었다.
“넌 내가 책임지고 끌어 내려줄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