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72)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71화
“……후회할 텐데.”
“그건 앞으로 네가 할 거고.”
깔끔하게 정찬양의 어깨에서 손을 뗀 예찬은 후련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대로 문까지 걸어간 예찬이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돌렸다.
정찬양은 처음 리스피릿의 대기실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예찬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니, 뭐 잘 알지도 못하네. 앞으론 어디 가서 아는 척하지 마라.”
뭐라도 되는 양 같잖게 굴던 놈에게 한 마디를 남긴 예찬은 미련 없이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빈틈없이 문을 닫은 예찬은 건물 출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처음엔 경보 수준이었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어느 순간부터 예찬은 방송국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후련해!’
리스피릿을 밑바닥으로 떨어트리기로 결심한 이래,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리던 무언가의 정체가 드디어 확실해졌다.
그리고 예찬은 정찬양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 요 며칠 부피가 눈에 띄게 커진 그 가시를 완전히 빼 버리기로 결심까지 마칠 수 있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리바디가, 또 어쩌면 리스피릿의 남은 멤버들이 신경 쓰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지 확신이 섰다.
그러니 앞으로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하예찬!”
출구에 다다랐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예찬을 불러 세웠다.
“채은성? 왜 여기 있어?”
“당연한 거 아니야! 너 기다렸지!”
급하게 다리를 멈춰 세우자 채은성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얼굴보다는 머리가…….’
마지막에 봤을 땐 분명 잘 세팅된 상태였는데 지금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야, 너 머리 엉망이다.”
예찬의 지적에 채은성이 갑갑하다는 듯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내려쳤다.
얼마나 세게 치는 건지 살벌한 소리가 음울하게 복도를 울렸다.
‘저렇게 치면 멍 안 드나?’
채은성은 표독스럽게 예찬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게 중요해? 전화는 왜 안 받아!”
아직 방송국 안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채은성은 입을 크게 뻐끔거리며 비명처럼 외쳤다.
“전화했었어?”
“그럼 안 했겠어?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선배가 불렀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갔…… 너, 너, 너 코, 코피!”
성질을 내던 채은성이 맹렬하게 말을 더듬으며 예찬의 얼굴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동시에 뜨끈한 무언가가 꿀렁거리며 코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요 며칠 너무 피곤했나.’
신경 쓸 일이 많은 데다 스케줄도 빡빡해서 좀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예찬이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뒤지는 사이, 코밑으로 우악스러운 손길이 들이닥쳤다.
채은성의 머리를 난장판으로 만든 건 본인의 손이었는지 피 냄새와 함께 헤어스프레이 향이 훅 코를 찔렀다.
“너 맞았어?!”
정말 놀랐는지 이번엔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목소리로 채은성이 외쳤다.
“채은성아, 목소리가 크다.”
코와 더불어 입까지 반쯤 틀어막힌 예찬이 차분하게 만류했음에도 채은성의 목소리는 줄어들 줄 몰랐다.
“누가 이랬어?”
‘얼씨구.’
이름만 말하면 당장 쫓아갈 기세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그런지 알면 어쩌려고?”
“양쪽 다 터트려 버리겠어.”
‘뭐를. 코를?’
예찬은 여기서 정찬양의 이름을 대면 어떻게 될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어른스럽게 참아 냈다.
“누구한테 맞았으면 저 멀리서부터 질질 흘리면서 왔겠지, 여기서 터졌겠어?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
아직도 무식하게 코를 막고 있는 채은성의 손을 밀어내고 손수건으로 코밑을 훔쳤다.
심각한 건 아니었는지 그새 피가 멎어 있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예찬의 피로 더러워진 채은성의 손이었다.
“화장실 좀 들러서 손 씻고 가자.”
“됐어. 차에 물티슈 있어.”
‘아무도 안 갔군.’
채은성이 여기서 알짱거리고 있는 걸 봤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손바닥과 손등에 번진 피를 대충 확인한 채은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먼저 출구로 향했다.
차에서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고 있을 멤버들이 신경 쓰이는 모양인지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다.
그 뒤에 바짝 따라붙은 예찬은 멋쩍은 마음을 숨기며 한 마디를 던졌다.
“먼저 좀 가라는데 말 되게 안 듣네.”
“너라면 퍽이나 먼저 가겠다?”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투로 대꾸한 채은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흠…….”
채은성의 말대로였다.
좀 전엔 침착함을 잊고 당장 정찬양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그렇게 뛰쳐나가면서 먼저 돌아가라고 하면 무슨 사고를 칠지 두려워서 누가 돌아갈 수 있겠는가.
‘차분하게 설명하고 갈걸.’
정찬양 따위가 뭐라고 그리 서둘렀는지.
뭐에 씌어 있던 걸지도 몰랐다.
‘지금은 머리도 마음도 시원해졌지만.’
주차장에 서 있는 익숙한 차를 발견한 예찬은 손이 지저분한 채은성을 대신해 차 문을 열었다.
“예찬이랑 은성이 왔어?”
나머지 멤버들도 채은성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까 봐 내심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차분한 심상록의 음성에 예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우리가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건데.”
“알긴 아네. 단독 행동을 할 거면 일단 육하원칙에 맞춰 얘기를…….”
예찬의 사과에 심상록과 강해솔의 답이 갈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얽혔다.
‘이 상황 낯설지 않은데……?’
예찬은 며칠 전 차에서 비슷한 대화가 오갔던 걸 떠올리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심상록에게서 눈을 뗀 강해솔이 예찬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뭐야? 너 코피 났어?”
‘이런.’
닦는다고 닦았는데 완벽하진 않았나 보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멤버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코피요?”
“예찬이 형 맞았어요?”
“누구한테?”
“예찬이가 맞아서 코피가 터졌다고?”
그사이 예찬의 뒤를 따라 차에 탄 채은성이 말했다.
“우휘겸, 거기 물티슈 좀 주라. 손이 지저분해서 문을 못 닫겠어.”
“어어.”
코피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떨리는 눈으로 예찬만 바라보던 우휘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티슈를 찾았다.
“여기 받…… 그거 피야?”
채은성을 향해 물티슈를 내밀던 우휘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응.”
차 안에 흐르는 묘한 공기를 채은성만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팔을 뻗어 물티슈를 채 간 채은성은 자신에게 꽂힌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지 태평하게 손을 닦았다.
“……은성이가 예찬이 코피 터트린 거야?”
나름대로 눈치를 봤는지 범세혁이 작은 목소리로 옆에 앉은 정의탁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주변이 너무나 고요했기에 모두의 귀에 선명히 들렸다.
“뭐?! 무슨 헛소리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티슈를 정리하던 채은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억울해 죽겠는 목소리가 차 내부를 울리고 나서야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그렇지? 그럴 리 없는 거 아는데 순간 깜짝 놀랐네.”
“타이밍이 오해 사기 딱 절묘했어요.”
“난 사회면 진출까지 생각했다…….”
“아까 은성이가 꼭 자기가 건물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너무 강경하게 주장했잖아. 그래서 둘이 진짜 싸움이라도 한 줄 알고 머리가 하얘졌네.”
선우이경에 이어 배새벽에 강해솔, 심상록까지 다행이라며 말을 얹었다.
채은성이 문을 닫으며 눈을 세모꼴로 떴다.
“대체 절 어떻게 보신 거죠? 저 주먹질, 폭력, 싸움, 이런 거랑 되게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요?”
조금 전까지 상대의 쌍코피를 터트리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채은성이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채은성의 매서운 눈길이 예찬에게 옮겨 갔다.
“이렇게 부실한 애를 때리다니, 그건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잖아요!”
“……너 말이 심하다?”
“시끄러워, 8등.”
“……!”
소심한 항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뿐더러 괜히 팔씨름 순위만 끄집어냈다.
예찬은 눈을 흘겼다.
‘그래, 우투리라 좋으시겠어요.’
멤버들이 평소처럼 투닥거리는 걸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운전석에서 눈치를 살피던 매니저가 한결 가뿐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얘들아, 이제 출발해야 하니까 점호 좀 하자. 그리고 예찬이랑 은성이는 안전띠 꼭 하고.”
“네, 일이요.”
마침 주제를 바꾸고 싶었던 예찬이 곧장 대답했다.
“팔 있어요.”
“마지막 구, 번호 끝이요.”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점호와 함께 차분하게 정돈되었다.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지금까지 멤버들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익숙한 이클립틱들의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창가에 앉은 멤버들이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하자 비명 같은 환호성이 들렸다.
“그래서 코피는 왜 난 건데? 선배한테 얻어맞고 온 건 아닐 테고. 과로야?”
언제 물티슈를 챙겼는지 예찬의 코밑을 꼼꼼히 닦으며 강해솔이 물었다.
“아마?”
애매한 대답에 강해솔은 고개까지 내저어 가며 혀를 찼다.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요새 정신 빼고 다니면서 일은 또 죽어라 해 대고. 좀 적당히 해, 적당히.”
“와, 강해솔한테 적당히 하라는 말을 들어 버렸어.”
“까분다.”
과로의 아이콘한테 들을 말이 아니라며 과하게 놀란 시늉을 하자 강해솔이 무섭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아직도 얼굴에 닿아 있는 물티슈의 움직임이 너무나 조심스러웠기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예찬아, 누구 만나고 온 건지 물어봐도 돼?”
이번엔 뒤쪽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는 범세혁의 질문에 예찬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리스피릿의 정찬양 선배님.”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쓸데없이 사소한 거짓말이 쌓이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거지.’
“뭐?! 정찬양 선배님?! 너 선배님이랑 친해? 번호는 언제 교환했어?”
예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제일 놀란 것은 채은성이었다.
좀 전에 예찬을 걱정했던 게 거짓말처럼 눈동자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다.
‘확 정찬양한테 맞았다고 거짓말해 버릴까 보다.’
또다시 어른스럽지 못한 충동이 작게 피어올랐다.
“별로 안 친해. 번호도 교환 안 했고. 그런데 갑자기 와 보라시니까 놀라서 뛰어갔던 거야.”
예찬의 대답에 채은성은 부러워 죽겠다는 듯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선배님이 무슨 얘기 하셨어?”
“그냥 잘 지내보자던데.”
이런저런 말이 앞뒤로 붙긴 했지만 핵심만 요약하자면 그랬다.
“그걸로 끝? 그 얘기를 하려고 불렀다고? 그렇다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어? 전화는 왜 안 받은 건데?”
채은성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예찬에게 들러붙었다.
한참 동안 열의 넘치는 채은성의 질문에 대답해 주고 나서야 차 안이 조용해졌다.
중간중간 끼어들던 다른 멤버들과 달리 어느 순간부터 침묵을 유지하던 선우이경이 그제야 지나가듯 한마디를 건넸다.
“고생했어.”
“네, 뭐…….”
예찬은 머쓱한 듯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돌이켜 보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를 하루가 창밖의 노을과 함께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