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7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73화
“넌 참 배알도 없다. 걔네 라이브가 눈에 들어와?”
이희샘의 날카로운 말에 김대훈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김대훈은 슬며시 정찬양의 얼굴을 살폈다.
간접 등만 켜져 있어서 그런지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화난 거 아니지? ……화났나? 아, 희샘이 형은 뭔 말을 저렇게 해? 좀 좋게 돌려서 할 수 없나?’
연습생 시절부터 은근히 벽이 느껴졌던 정찬양이었으나, 얼마 전부터는 눈만 마주쳐도 절로 주눅이 들었다.
그 증상은 특히 숙소에서 심해졌다.
어쩌다 정찬양의 옆을 지나갈 때면 행여나 발걸음 소리가 거슬릴까 봐 까치발을 들고 걷는 수준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자꾸 밖에선 까불게 된단 말이지…….’
김대훈은 숙소 내에선 한 마리 얌전한 양이 되어 정찬양과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들었다.
그러나 정찬양이 타인의 평판에 예민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밖에만 나가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꾸 정찬양이 그어 둔 보이지 않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건드리게 되었다.
“잠깐 얘기 좀 해.”
“…….”
정찬양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이희샘부터 시작해 다른 멤버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살폈다.
정찬양의 시선이 닿은 순간, 김대훈은 눈을 질끈 감고 달아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진짜 거북해.’
“…….”
침묵이 길어졌다.
김대훈은 어쩌면 정찬양이 이희샘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찬양이랑 말을 섞는 것보단, 무시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는 이희샘을 달래는 쪽이 더 속 편할 거 같았다.
“무슨 얘기?”
그러나 정찬양은 태블릿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친절하게 되물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찬양은 단 한 번도 멤버들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박하게 군 적이 없었으니.
“몰라서 물어? 지금 아무 사이트나 들어가도 우리 까는 글로 난리라고!”
그래서 이희샘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저렇게 툴툴거리고 있는 것이겠지.
“네가 하자고 해서 급하게 낸 앨범이잖아! 근데 이게 뭐야? 괜히 커리어에 금만 가고! 이럴 거면 앨범 안 냈지!”
‘와, 희샘이 형 며칠 전부터 저기압이더니 화풀이 쩌네.’
지난주까지만 해도 1위 트로피가 또 잔뜩 늘었다며 헤실거리던 사람이 뱉기엔 다소 뻔뻔한 불평이었다.
정찬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 인터넷도 확인할 줄 알았어?”
“뭐?”
“기분 안 좋을 때마다 너무 티를 내서 팬들 눈치 보게 만든단 얘기가 심심하면 올라오는데, 전혀 바뀔 기미가 없어서 형 폰은 인터넷이 안 되는 줄 알았지.”
이 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정찬양의 입에서 막힘없이 말이 술술 쏟아졌다.
“뭐? 무, 무슨……!”
난데없는 폭언에 이희샘이 말을 더듬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찬양이 성큼성큼 멤버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 그거랑 지금 얘기가 무슨 상관이야?”
이희샘이 코앞에서 멈춰 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찬양을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정찬양이 싱긋 웃었다.
“그럼 커리어 얘기를 해 볼까? 지금까지 형이 못 하겠다고 갑자기 펑크 내는 바람에 박살 난 평판이며 스케줄에 커리어가…….”
정찬양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지나간 이희샘의 과오를 짚었다.
“그것도 지금 얘기랑 상관없잖아! 왜 옛날 일을 끄집어 오고 난리야?”
‘끝났네.’
뭘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승패가 갈린 모양새였다.
그러나 정찬양은 한번 칼을 뽑으면 무를 써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다질 때까지 집어넣지 않는 성격이었나보다.
“그래? 그런데 인터넷을 들어가 볼 줄 알았으면서 왜 진작 방점 챙기자고 안 했어? 지난주부터 이번 주 1위는 레굴루스 아니냐고 시끄러웠는데. 아, 혹시 인터넷이 지난주엔 안 터졌어?”
그런 거였다면 이해한다며 정찬양이 이죽거렸다.
박마루는 이미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이희샘을 뒤쪽으로 슬며시 끌어당기며 정찬양을 만류했다.
“찬양아, 형한테 말이 너무 심한…….”
“지금 찔려야 할 사람이 희샘이 형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삐딱하게 벽에 기대선 정찬양의 입 밖으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답게 잠 좀 자고 싶다며. 그렇게 쉬엄쉬엄 살아 놓고 1위 못 한 건 아쉬워? 너무 염치가 없지 않나?”
– 잠 좀 잡시다, 잠 좀. 우리도 사람인 거 아시죠?
– 그래요. 슬슬 쉬엄쉬엄해도 괜찮잖아요.
자신들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멤버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싸우자는 거야?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맞아! 그리고 이번에도 1위를 할 줄 알았으니까 좀 쉬자고 한 거지! 너야말로 이렇게 될 걸 알았으면 방점 챙겨야 한다고 얘기해 줬으면 좋잖아!”
“근데 다들 의외다.”
박마루와 최선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정찬양은 정말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고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정말 1위가 중요해? 난 다들 통장에 따박따박 입금되는 돈만 중요한 줄 알았는데.”
“정찬양, 너 말을 그렇게까지……!”
“그럼 내가 이런 생각 안 하게 좀 열심히들 살지 그랬어, 애초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끊은 정찬양이 지긋지긋하단 눈으로 멤버들과 다시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몰려와서 남의 배알이 있느니 없느니 먼저 긁어 놓고 제대로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하긴 별로 대화할 생각이 없었으니 이렇게 나왔겠지. 퇴물이니 뭐니 욕먹는 게 짜증 나니까 괜히 내 탓 하면서 징징거리려던 거 아니야?”
“…….”
반박할 수 없었다.
“다들 열심히 사는 게 정서에 안 맞는 사람들인 거 같은데, 그동안 나한테 맞춰 주느라 고생했어. 그래도 평생 먹고살 만큼 벌었을 테니 고맙게 생각하진 않을게. 앞으론 같이하자고 안 할 테니 각자 잘 먹고 잘 살아 보자고.”
박마루의 어깨를 탁탁 두드린 정찬양은 그대로 다시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복도에 뻘쭘하게 남겨진 네 사람은 패잔병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가장 가까운 방으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닫히는 문 틈새로 정찬양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김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 * *
레굴루스의 음악 방송 첫 1위 기념 라이브가 끝나자, 공식 계정에 방송국 대기실에서 찍어 둔 기념사진과 기념 영상이 연달아 올라왔다.
“오늘 잠 못 자겠는데?!”
예찬의 홈마 박모 씨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분명 그게 바로 천국일 것이었다.
맥주잔에 꽂아 둔 장미꽃들의 향이 오늘따라 더 향기로웠다.
이번 주에 로즈데이가 껴 있다고 레굴루스가 음방 역조공을 할 때마다 한 송이씩 준 것들인데, 시드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잘 말려서 보관해야 하나?’
리스피릿의 팬들이 설치는 것도 지금 같아선 애교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 우휘겸 학폭러 새끼가 낯짝 당당히 들고 다니는 거 개꼴받네 ㅆㅂ 백퍼 돈으로 매수한 게 뻔한데 다 알고도 속아 주는 거냐 진짜 모르고 속는 거냐?
‘응, 그래도 이런 건 못 참지.’
박모 씨는 빠르게 PDF로 딴 파일을 첨부해 NJ 측으로 메일을 보냈다.
– 정찬양 보고 있으면 부모님 없이 자란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나만 느끼는 건진 모르겠는데 암튼 사랑받지 못하고 큰 사람 특유의 티가 남;;
‘응, 이것도 신고.’
말만 둥글게 하면 다인가. 하는 내용은 패드립인데.
레굴루스 팬 사이트에서도 공공의 적이 된 리스피릿을 선 넘게 욕하는 글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다들 적당히를 모르는군.’
내일, 아니 오늘 저녁에 방송될 엔카운트다운에서는 다시 리스피릿이 1위를 차지할 터였다.
그땐 또 어떤 난장판이 될지 벌써 머리가 아팠다.
‘우리 애들은 먹금 잘하던데.’
박모 씨는 잠시 조금 전 봤던 스타 라이브의 채팅창을 떠올렸다.
별의별 개소리가 난무하는 와중에도 멤버들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채팅창을 읽어 나갔다.
멤버들 눈에만 악플들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닐 테니, 자연스럽게 안 보이는 것처럼 무시했다는 뜻이었다.
‘애들은 보면 볼수록 다들 괜찮단 말이지.’
박모 씨는 고개를 젓고 다시 오늘 자 기념사진으로 눈을 정화했다.
눈물을 다 닦지 못한 멤버들이 많아서 그런지 액정 너머에서 묘하게 짠내가 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기쁨의 눈물만 흘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른 새벽, 사전 녹화를 마친 멤버들은 곧장 차를 타고 이동했다.
“오느라 고생했어!”
“예찬이 형! 반가워여!”
낯선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오래간만에 만난 얼굴들이 멤버들을 반겼다.
“뭐야, 태랑이. 예찬이만 반가워? 형 섭섭하려고 한다?”
“어우, 이경이 형도 반갑져! 다들 편하게 들어와여.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선우이경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기태랑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이쪽에 앉으면 돼, 이쪽!”
남지유가 아직 숨도 고르지 못한 멤버들의 등을 떠밀었다.
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의자 앞에 앉은 예찬이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남지유를 향해 말을 건넸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죠? 미안해요, 형. 이때 말고는 비는 시간이 없어서…….”
“뭐?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이다, 야! 시간 충분해! 걱정하지 마!”
남지유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지난주 금요일, 기태랑에게 남지유와 함께하는 유튜브 채널에 나와 줄 수 있는지 부탁받은 예찬은 멤버들과 의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정말로 시간이 없는 터라 음악 방송 사전 녹화와 본방송 사이의 짧은 틈에 녹화를 마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두 시간이면 충분하고말고!”
완벽하게 계획을 세워 왔으니 자기만 믿으라며 남지유가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리고 시작된 촬영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남지유와 기태랑의 다소 어색한 진행, 어디서 구한 건지 손발이 맞지 않는 스태프들,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 등등 문제는 산처럼 많았지만, 그중 제일은 따로 있었다.
“으앗, 죄송해여!”
“아, 괜찮습니다.”
실수로 컵에 든 음료를 채은성의 다리에 쏟은 기태랑이 닦을 걸 찾아온다며 카메라 화면 밖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하, 하, 하. 태랑아 MC가 사라지면 어떡해.”
남지유가 웃으며 이를 갈았다.
츄마프 시절에 보여 주지 않았던 살벌한 면모에 레굴루스 멤버들이 감탄하는 사이, 예찬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채은성을 살폈다.
그렇다.
오늘의 가장 큰 문제는 채은성이었다.
채은성은 이 스튜디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딱 열두 글자를 말했다.
처음 ‘채은성입니다’하고 인사했던 것을 제외하면 방금 괜찮다고 한 것 말고는 입을 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너…… 낯가리냐?’
시선이 느껴졌는지 채은성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뭘 봐? 앞을 봐야지.’
초조한 듯 손가락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주제에 입 모양으로만 잘도 말을 했다.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예찬은 어이가 없어도 가슴이 들끓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