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8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83화
눈물, 아니 먹물 흘리는 낙지를 수습하는 일은 채은성이 맡게 되었다.
‘양념 맡는다고 하길 잘했다…….’
양념장 비율을 기억하는 것이 예찬뿐이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체 얼마나 세게 쥐었길래 먹물이 이렇게 터져 나오는 거야?”
채은성은 투덜거리면서도 성실하게 낙지를 닦았다.
흐릿하게 먹물 자국이 남은 이마를 문지르며 범세혁이 웃었다.
“웃지 마라, 정든다.”
범세혁은 그길로 채은성이 다듬던 채소를 이어 다듬으려 했으나 예찬과 채은성이 기겁하고 말렸다.
칼을 잡은 범세혁이 너무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난 뭘 하지?”
요리뿐만 아니라 가사 전반에 재능은 없지만 양심은 있는 범세혁이 일거리를 원하는 눈으로 예찬과 채은성을 바라보았다.
무임승차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갸륵했으나, 솔직히 그냥 얌전히 있는 게 돕는 거였다.
‘그렇다고 애를 마냥 세워 둘 수도 없고.’
잠시 고민한 끝에 예찬은 범세혁에게 새로운 지령을 내렸다.
“범세혁, 넌 플레이팅을 맡아. 플레이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플레이팅……!”
예찬의 의도를 읽었는지 싱크대에 앞에 서 있던 채은성도 한마디 보탰다.
“그래, 요리는 하는 걸로 끝이 아니지. 플레이팅으로 제대로 된 요리를 완성한다고 해도 무방하지!”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
범세혁이 수상함을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한 예찬은 재빨리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일단 낙지볶음을 담으면 맛있어 보일 것 같은 그릇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 봐.”
“알았어! 둘 다 나만 믿어!”
다행히 범세혁은 두 사람의 의도대로 의욕에 불탔다.
그 후 요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채은성이 본인을 ‘채 셰프’라고 지칭한 것은 역시나 과장이었으나, 그래도 보통은 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채은성, 한번 먹어 봐.”
예찬의 권유대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양념 맛을 본 채은성은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예찬은 자신의 감상을 덧붙였다.
“뭔가 애매한데 정확히 뭐가 부족한지 모르겠어. 넌 어때?”
“……맛있는데?”
“……그래?”
그럴 리 없었다.
예찬은 다시 국자를 들어 그릇에 양념을 약간 덜었다.
‘역시 뭔가 부족한데.’
그러나 채은성은 뭐가 문제냐는 듯 여전히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예찬은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꿨다.
“좀 더 매우면 좋겠다든지, 달면 좋겠다든지, 그런 생각 안 들어?”
“전혀?”
‘이 자식, 진심인데?’
설탕이나 고춧가루를 더 넣고 맛을 보게 했지만 채은성의 반응은 똑같았다.
“맛있는데? 아까랑 뭐가 달라졌어?”
“…….”
‘그러고 보니 채은성은 뭐든 잘 먹었던 거 같기도…….’
아무래도 ‘맛있다’의 기준이 남보다 훨씬 폭넓은 것 같았다.
결국 예찬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자기 입에 꼭 맞는 낙지볶음을 완성했다.
“데코의 마지막은 참깨지.”
“범세혁, 좀 하는데?”
채은성의 독려에 범세혁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알 수 없는 코끼리 모양 그릇에 낙지볶음을 조심스레 담은 범세혁은 굉장히 뿌듯해 보였다.
“완성입니다.”
예찬의 말에 턱을 괴고 요리를 구경하고 있던 심사 위원들이 요리에 관심을 보였다.
“냄새 괜찮네.”
“중간엔 좀 아찔했는데 말이죠.”
“이 팀은 플레이팅 점수 좀 받아야겠다.”
다들 먹물 뿜은 낙지를 보며 한껏 긴장했던 모양인지, 멀쩡한 요리가 나왔다는 데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이 팀이 은근 팀워크가 좋더라.”
“맞아요.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 주는 모습, 아주 보기 좋았어요.”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심사진은 하하호호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쯤에서 예찬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감이 왔다.
“10점 만점에 평균 1점, 9점, 7점으로 하얀색 팀의 우승입니다!”
‘냉정한 놈들. 과하게 칭찬할 때 알아봤다.’
장기 자랑과 마찬가지로 입에 발린 말은 점수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다소 허망한 결과 발표 이후, 트레이너들과 MC 앤드류를 데리고 신 PD는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사이 할 일이 없던 멤버들은 주방 정리를 도왔다.
“저흰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재밌었습니다.”
“언제든 또 불러 주세요.”
인터뷰가 전부 끝나자마자 심사진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요리하는 데만 장장 세 시간을 썼으니 시간을 오래 잡아먹긴 했다.
“그러면 조만간 또 봐요.”
숙소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간 멤버들을 향해 웃던 이가원은 예찬과 눈을 맞추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여러분, 이제 전화번호부를 바꿔 볼까요?”
그러나 이가원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다.
신 PD가 부르는 소리에 멤버들은 한결 한산해진 거실로 돌아갔다.
“일단 다들 멤버들을 어떻게 저장해 놨는지 공개하겠습니다!”
직접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 주는 건 좀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멤버들은 다른 팀이 요리하는 사이, 자신의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을 적어서 제작진에게 전달했다.
신 PD의 신호에 맞춰 거실 TV 화면에 언제 만들었는지 깔끔하게 정리된 표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예찬 씨는 멤버들을 그룹명과 이름, 그리고 호칭으로 저장했네요. 그런데 딱 한 사람, 해솔 씨만 ‘해솔이 형’으로 저장한 이유가 있을까요?”
신 PD의 물음에 예찬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우연입니다. 깜빡하고 안 바꾼 거죠.”
신 PD가 흥미롭다는 듯 다시 물었다.
“호오, 그렇다면 이제 알았으니 레굴루스 강해솔 형으로 바꿀 생각이 있다는 뜻일까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네,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네요.”
옆에 서 있던 채은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찬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사실 저렇게 저장해야 보기 편하긴 해.”
“에이, 너무 정 없지 않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멤버들인데!”
“리더! 좀 더 따뜻하게 저장해 줬으면 좋겠어요!”
외부인들이 돌아가서 마음이 편해졌는지 제작진들도 하나둘 말을 얹었다.
“자자, 다들 조용! 일단 다른 멤버들 것도 다 보고 얘기해 봅시다!”
신 PD의 말에 소란스러움이 차차 잦아들었다.
“다음은 우리 맏형 심상록 씨의 전화번호부입니다! 공개해 주시죠!”
두 번째 표로 화면이 바뀌었다.
심상록의 전화번호부
― NJ 해솔
― NJ 새벽
― NJ 세혁
?
― NJ 예찬
이번엔 무려 회사 이름이 앞에 붙어 있었다.
“보통 이렇게 저장하지 않나요? 이게 제일 깔끔한데…….”
심상록이 멋쩍은 듯 뺨을 긁적거렸다.
“그래도 예찬이보다는 낫다! 성은 뗐잖아.”
“합격입니다!”
예찬을 제외한 멤버들의 열렬한 지지가 이어졌다.
‘나나 심상록이나…….’
다음 순서는 이미 전화번호부를 공개했던 선우이경이었다.
― ㄱ강해솔
― ㄱ배새벽
― ㄱ범세혁
?
선우이경은 표 옆에 가서 서더니 진지한 얼굴로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얘들아, 너희가 우리 엄마 아빠보다도 위에 떠. 이게 사랑이지 뭐가 사랑이겠니?”
“네, 다음 보여 주시죠.”
예찬은 선우이경의 말을 빠르게 끊고 다음 차례를 외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이 순서대로 표가 나왔다.
강해솔은 성과 이름에 두 형들만 ‘형’을 붙여 놓았다.
다소 차가운 저장법이었으나 크게 불만의 소리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왜, 뭐.”
다만 뺨을 찌르는 예찬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강해솔이 입을 삐죽거리며 퉁명스럽게 팔짱을 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눈으로 말하고 있거든? 그리고 갑자기 웬 존댓말?”
“반말을 하기엔 형님과 심적인 거리가 느껴져서요.”
“너 진짜…….”
“거기, 그만 속닥거리시죠!”
신 PD의 지적에 강해솔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음은 범세혁의 차례였다.
범세혁의 전화번호부
― (?。∂)
― (?_?)
― (?ω?)b
― /(? × ?)\
?
“…….”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범세혁이 문자를 보낼 때 거의 한 문장마다 이모티콘을 넣는 놈인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보다 누가 누구야? 저 화난 얼굴 누군데. 나야, 정의탁이야?’
심상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세혁아, 저거 우리를 이모티콘으로 저장한 거지?”
“네, 맞아요! 전에 새벽이가 폰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생각했어요. 데뷔하면 멤버들 이름을 나만 알 수 있는 이모티콘으로 저장하기로요!”
이렇게 하면 혹시 폰을 잃어버려도 멤버들의 번호가 유출될 걱정이 없다며 범세혁이 뿌듯하게 웃었다.
‘범세혁 네 폰인 줄 알고 훔쳤는데 여덟 개만 저렇게 저장되어있으면 누가 봐도 그게 멤버 번호잖아.’
“그건 됐고! 그보다 저 두 번째 줄에 있는 화난 이모티콘 누구예요?”
범세혁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살그머니 정의탁의 눈을 피했다.
“그게 뭐예요! 차라리 말로 해요!”
물론 정답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확인받은 정의탁은 길길이 날뛰었다.
예찬은 조용히 숨을 돌렸다.
‘내가 아니었군.’
범세혁의 다음은 우휘겸의 전화번호부였다.
“뭐야, 휘겸이도 성까지 붙여서 저장했네! 그거 봐, 기역 붙인 내가 제일 특별하게 저장한 거라니까?”
“다들 정이 없다, 정이 없어!”
선우이경과 채은성이 목소리를 키우는 가운데 채은성의 표가 공개되었다.
채은성의 전화번호부
― 겸
― 경이 형
― 록이 형
― 배알콩
― 솔이 형
― 찬
― 탁
― 혁
‘……저게 다 누구야?’
이번에도 낯선 이름들이 펼쳐졌다.
누가 묻기도 전에 채은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원래 전화번호부는 별명으로 저장하는 게 국룰 아닙니까? 네?”
예찬은 표를 가리키며 대답해 주었다.
“근데 별명 아니잖아. 너 마음속으론 우릴 저렇게 부르고 있는 거냐?”
“아니! 아닌데! 완전 아닌데!”
‘진짜였냐.’
그 와중에 혼자 이름 맨 끝 글자가 아닌 엄한 별명으로 저장되어 있던 배새벽이 손을 들었다.
“저는 왜 배알콩인데요.”
“응? 그야 귀엽잖아.”
“……은성이 형은 태명이 뭐였어요?”
모른다고 하면 채은성의 부모님께 전화라도 할 기세였다.
“자자, 일단 전화번호부를 다 보자니까요!”
이번에도 절묘하게 대화를 끊은 신 PD는 막내 라인의 전화번호부를 마저 공개했다.
정의탁의 전화번호부는 깔끔했다.
― 상록이 형
― 새벽이
― 세혁이 형
― 예찬이 형
?
물론 짓궂은 형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뭐야, 너무 심심한 거 아니야?”
“사랑하는 어디 갔어, 사랑하는.”
“존경하는 붙여야지, 존경하는.”
“형들보다 훨씬 정 넘치거든요!”
이번에도 정의탁이 발끈하고 나서야 다음 차례인 배새벽으로 순서가 넘어갔다.
“우리 막둥이는 형들을 어떻게 저장했으려…….”
양껏 정의탁을 놀리고 뿌듯해하던 선우이경의 입이 벌어졌다.
예찬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배새벽의 전화번호부
― 강해솔
― 범세혁
― 선우이경
― 심상록
― 우휘겸
― 정의탁
― 채은성
― 하예찬
‘형’도 붙어 있지 않은 누구보다 깔끔한 전화번호부였다.
멤버들의 경악에 어린 시선이 배새벽을 향했으나 배새벽은 더없이 당당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