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188)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87화
이어진 세 번째 시합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쿵!]스태프의 시작 신호가 끝나기 무섭게 꽤 큰 소리와 함께 선우이경의 손등이 바닥에 닿았다.
배새벽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선우이경에게 여전히 잡혀 있는 손을 가볍게 빼내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다소 깍듯할 정도로 예의를 취한 배새벽은 뒤이어 카메라를 향해 당당히 브이를 그려 보였다.
분명 웃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 표정은 더없이 산뜻했다.
의외의 결과에 실시간 채팅창은 읽기 힘들 정도로 새 댓글이 쏟아지고 있었다.
– 와 실화임?
– 배알콩이 남자로 보인다
– 진짜 개빨랐다 ㄷㄷㄷ
– 이경이 우승 후보로 밀었는뎈ㅋㅋㅋㅋ 그렇지만 이런 반전 싫지 않습니다
– 브이브이브이브이브이브의브이
의외의 결과에 잠시 멈춰 있던 레굴루스 멤버들도 미친 듯이 요란을 떨고 있었다.
[새벽아 날 가져!] [새벽이한테 이상한 거 주지 마세요.]이성을 잃은 채은성의 외침은 정의탁에게 칼같이 정리되었다.
“와, 나 은성이가 저런 말 한 것도 몰랐어.”
“이경이 형, 충격이 대단했군요.”
화면 속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멤버들은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을 피웠으나 예찬과 정의탁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다음 경기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찬은 초조한 듯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정의탁을 힐끔 보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채은성이랑 붙은 것보다 쟤랑 붙은 걸 더 지우고 싶다. 모두의 기억에서도, 신 PD의 하드에서도…….’
그러나 그 끔찍한 시합은 지워지기는커녕 이제 곧 전국, 아니, 전 세계에 생중계될 예정이었다.
“예찬아, 다리 너무 떤다.”
“네? 제가요?”
심상록의 지적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 무슨 칠칠치 못한……!’
예찬이 입술을 안쪽으로 꾹 말아 무는 걸 본 선우이경이 한마디를 던졌다.
“에이, 상록아. 우리 예찬이가 얼마나 초조하면 그러겠어. 그냥 못 본 척해 주자. 예찬아~ 편하게 떨어도 돼!”
‘저 자식을 진짜…….’
“크크크.”
아무리 매섭게 쏘아 봐도 다음 시합의 결과를 아는 놈에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예찬은 정면에 설치된 리액션 카메라를 떠올리며 분을 삭였다.
이 이상 말을 섞어 봐야 신 PD 좋은 일을 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정의탁이랑 주고받은 말이라도 좀 편집해 줬다면…….’
물론 상대가 신 PD인데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4번 정의탁 선수와 5번 하예찬 선수, 앞으로 나와 주세요.]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앞으로 나오는 장면부터 아주 어마어마하게 편집에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아, 제발 살려 줘요!”
목을 좌우로 꺾는 자신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가는 걸 본 정의탁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예찬이 손목을 돌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비장한 배경음까지 곁들여지자 흡사 결승전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푸하하하!”
“편집 제대로네!”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그래서 더 웃겼다.
예찬은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돌리면 지는 거다, 고개를 돌리면…….’
[첫 상대가 예찬이 형이라니, 시시해서 하품이 나오겠네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을 배워야겠구나, 의탁아. 시합 끝나고 얼굴을 어떻게 들고 있으려고 그러니.]‘신 PD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선우이경이 부탁했던 파지직 전기 튀는 효과가 들어간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양손을 펼쳐 얼굴을 가린 예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 사이로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어느 정도 차단되니 조금이나마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은 아주 짧았다.
얼굴을 가린 직후, 시합이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
“세기의 시합이 시작하는군!”
“얘들아, 견뎌라……!”
멤버들의 놀림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간힘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위치에서 보자 부끄러움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두 살이나 어린 동생 한번 이겨 보겠다고 손등에 핏줄까지 세우고…… 하, 그래도 저때 저렇게 안 했으면 내가 9위였겠지.’
그래도 이긴 얼간이가 되었으니 정의탁보다는 나았다.
정신 승리를 하고 있는 예찬의 귀에 작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 차라리 대충해서 진 척할걸…….”
고개를 돌리자 무릎 위로 눈만 빼꼼 들어 올린 채 화면을 쳐다보는 정의탁이 보였다.
심지어 시합은 빨리 끝나지도 않았다.
편집을 어찌나 성심성의껏 했는지 아주 온 각도에서 찍은 화면을 다 보여 주고 있었다.
쿵, 하고 긴 대치 끝에 부들부들 떨리던 정의탁의 팔이 넘어갔다.
그리고 화면 너머의 예찬이 이날 했던 헛소리 중 지우고 싶은 개소리 TOP 5 안에 드는 말을 입 밖으로 뱉고야 말았다.
[좋은 시합이었어.]“으아아아악!”
“하! 예! 찬!”
“미쳤다! 찢었다!”
“뿌이뿌이뿌이!”
멤버들의 열렬한 환호가 숙소를 가득 채웠다.
‘옆집에서 항의 안 하나?’
간절히 인터폰을 바라보았지만 야속하게도 새까만 화면은 켜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 정의탁은 자신의 대답이 묻힐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와 함께 난리를 치는 멤버들을 살그머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얘들아, 의탁이 대답도 들어야지! 쉿!”
“쉿!”
심상록의 말에 멤버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누구 하나 놀리는 일엔 더없이 진지한 놈들다웠다.
[절 이겼으니까 우승해야 해요, 형.]덕분에 팔씨름 꼴찌의 명대사는 질 좋은 스피커를 통해 모두의 귀에 똑똑히 꽂혔다.
“하예찬 우승 가자!”
“아, 의탁이가 원하는 데 우승해야지!”
“예찬이와 의탁이의 우정을 응원합니다!”
“워 뜨겁다, 뜨거워!”
‘이 자식들…….’
여기서 화내 봤자 더 놀림감이 될 뿐이었다.
예찬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TV를 가리켰다.
“이제 다음 경기에 집중합시다.”
“예찬아, 얼굴이 빨갛다.”
“…….”
얼굴색은 통제가 안 된 모양이다.
예찬의 말문이 막히자 만족스러웠는지 망나니처럼 날뛰던 멤버들이 하나둘 다시 얌전해졌다.
“아, 진짜 재밌다. 오늘 방송 끝나면 다시 보기로 한 번 더 봐야지.”
“난 두 번 봐야지.”
“전 세 번.”
하는 소리는 여전히 밉살맞기 그지없었지만.
그새 채은성과 강해솔의 시합이 끝났는지, 강해솔을 위로하는 예찬의 모습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형, 생각보다 훨씬 오래 버텼어. 장하다, 강해솔!] [너 이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아, 끝이 안나네.’
완전히 잊고 있던 흑역사였다.
“아니, 우리 예찬이. 저런 대사는 또 언제 친 거야?”
“역시 리더! 예능 분량도 리더답게 가져가는군!”
팀에서 얄미움을 맡고 있는 선우이경과 채은성이 예찬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어휴.”
강해솔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고개를 완전히 들어 올린 정의탁이 수줍게 예찬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예찬이 형, 고마워요. 형 덕분에 저는 묻힐 것 같아요.”
예찬은 그 손을 꼭 붙잡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다행이다. 널 이기고도 우승을 못 해서 미안했는데.”
“악! 그거 하지 말아요!”
본인이 했던 말을 응용해서 들려주니 정의탁이 몸서리를 쳤다.
딱 원하던 반응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왜? 시시해서 하품이 나오니?”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그만해요!”
정의탁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며 예찬은 앞으로 남아 있는 개소리가 전파를 타는 것이 두려워지는 마음을 애써 잊었다.
‘……그것도 문제지만 지금까지 방송만 보면 내가 팔씨름 좀 하는 것처럼 나왔단 말이지.’
데굴데굴.
자그마한 오해가 굴러가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 * *
– 예찬이 8위 아닐 줄 알았다 ㅋㅋㅋ 8위라고 한 놈들 머리 박고 사죄해라 ㅋㅋㅋㅋ
– 지우개조 때 예찬이 힘캐로 빨렸던 거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일 듯
– 해솔이가 되게 약한가? 예찬이가 엄청 기특해하는데?
– 하예찬은 원래 강해솔이 숨만 쉬어도 기특해함
– 다음 라운드가 예찬이 대 은성이? 왜 내가 떨리냐
– 막둥이절대로우승해막둥이절대로우승해막둥이절대로우승해
– 예찬이가 휘겸이 목말 태웠던 얘기 하면서 절대 8위 아니라고 하고 다녔는데 아무도 안 믿어 줘서 너무 답답했음… 하 드디어 우리 리더가 오명을 벗는구나
예찬의 예상은 적중했다.
4강전 시합이 시작될 무렵, 예찬이 8위라는 진실은 헛된 루머로 일축되는 분위기였다.
편집에 공을 팍팍 들인 정의탁의 시합에서 과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예찬의 모습이 누가 뭐라 해도 우승 후보를 방불케 했기 때문이었다.
팔씨름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무렵엔 다들 ‘하예찬 팔씨름 뒤에서 2등’설을 폐기하고 예찬과 채은성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예찬의 팬이자 수험생인 최모 양도 마찬가지였다.
독서실에서 돌아온 최모 양이 ‘Regulus : Debut on air’를 튼 순간.
마침 예찬과 정의탁은 세기의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그 시합이 그룹 내 최하위권을 가리는 시합이었음을 이 시점에서 시청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최모 양은 기어이 승리를 쟁취한 예찬의 우승을 반쯤 확정 짓고 있었다.
‘역시 우리 예찬이! 못하는 게 없다니까!’
배새벽이 우휘겸을 꺾고 마침내 결승으로 가는 첫 번째 티켓을 손에 넣었을 땐, 자연스럽게 예찬과 배새벽의 경기를 상상해 볼 정도로 말이다.
[브이.] [브이래, 브이! 다들 들었어?] [배새벽, 사랑해!] [새벽아, 진짜 찢었다!] [형 멋있어요!]배새벽을 향한 형들의 응원은 이제 흡사 광기였다.
멋있으면 다 형이라며 선우이경은 거침없이 형을 부르짖었다.
‘생각보다 새벽이가 강적인데…… 리더 대 막내라, 뭔가 멋진대?’
어느 순간 트레이닝복 상의를 벗어 던진 멤버들은 맨투맨 셔츠를 입고 경기에 임하고 있었다.
덕분에 멤버들의 상체 라인이 좀 더 잘 보이는 것은 좋았지만 소매 길이가 에러였다.
‘팔씨름엔 반팔이 국룰 아니야?’
적어도 최모 양의 안에선 그게 상식이었다.
긴팔 맨투맨을 입은 예찬과 채은성을 바라보며 그녀가 조금 불평하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시합 전 한 마디를 시작했다.
웅장한 음악이 서서히 배경에 깔리기 시작했다.
[용케 여기까지 올라왔네.] [내가 할 말이야.] [졌다고 울지 마라.] [너야말로 시합 한 번 더 해서 졌다고 변명할 거면 지금이라도 더 쉬겠다고 해. 얼마든지 기다려 줄 테니까.]이대로 두면 한 마디가 아니라 열 마디를 할 기세인 두 사람을 스태프가 말렸다.
시합 직전에 손을 맞잡으면서도 두 사람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얘네 입으로 싸우는구나…….’
저렇게 입을 놀렸다가 지면 창피할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최모 양은 가엾게 물러날 사람이 채은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시작!] [쿵!]“……어?”
그러니까 순식간에 예찬의 손등이 테이블에 닿기 전까지는 말이다.
손쉽게 승리를 거머쥔 채은성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부실하다니, 뭔가 내가 미안한데……? 뭐랄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애를 때려눕힌 기분……?]채팅창은 배새벽이 다크호스로 부상했을 때만큼이나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전과 달리 올라오는 내용은 모두 똑같았지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예찬을 바라보던 최모 양은 생각했다.
‘이건 또 이거대로 좋…….’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