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1화
츄즈 마이 프린스(Choose My Prince) 99.
줄여서 츄마프 99는 흔한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돌 서바이벌이 단물 다 빠졌을 즈음 나온 프로그램.
듣기만 해도 손발을 펴기 힘들 만큼 오글거리는 동화 속 왕자님 콘셉트를 앞세운 이 프로그램은 방영 전까지 모두가 입을 모아 망할 것으로 점쳤었다.
그러나 막상 주제곡 무대가 선공개되고 방송이 시작되자 여론은 바뀌었다.
비주얼과 실력을 모두 갖춘 상위권 연습생들과 가혹한 경연 방식, 그리고 악마도 손에 땀을 쥐고 볼 만큼 짜릿한 편집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데뷔한 그룹도 금방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로 성장했음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리셋 3회 차부터는 차후 라이벌이 될 요소를 정리하는 예찬의 손에 난도질당해 볕 보는 일 없이 시들었다.
[7> [6> [5>줄어드는 숫자를 응시하는 예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오랜 시간 회귀자로 살아온 본능이 지금 선택해야만 한다고 외쳤다.
예찬은 뻣뻣한 손을 들어 개중 덜 과격해 보이는 선택지를 눌렀다.
“공주님들, 예찬이 꼭 지켜봐 주세용.”
촬영장에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얼굴과 꼭 어울리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말투인데 내용만 과하게 따로 놀았다.
선택지를 누르기 위해 쭉 뻗은 검지는 마치 카메라 너머의 시청자를 가리키는 동작처럼 보였다.
이 끔찍한 부조화를 만든 예찬은 생각했다.
맹세컨대 데뷔 좀 해 보겠다고 여기저기 밸도 없는 놈처럼 고개를 들이밀었던 첫 번째 리셋에서도 이렇게 수치스러웠던 순간은 없었다고.
그때 예찬의 앞으로 홀로그램 창이 팡, 터지듯 떠올랐다.
[선택지 완료!> [축하합니다! 선택지를 훌륭하게 완수한 당신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1 포인트가 추가됐어요!> [레벨 업!> [축하합니다! 레벨 업을 한 당신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1 포인트가 추가됐어요!> [상태창에서 스탯과 보상을 확인해 보세요.>……이건 또 뭐야?
예찬이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보조 진행자가 아주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예찬 군, 수고했어요. 하하, 이거 생긴 것과 갭이 있는 친구네. 그럼 들어가 봐요.”
예찬은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어떤 상황이든 무조건 예의 바르게.
오랜 시간 정상에서 버티려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반복하며 세트 밖으로 나온 예찬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
다행히 지금 있는 스튜디오는 예찬이 수없이 드나들던 N-net 건물 안에 있었다.
예찬은 인적이 드문 위층 화장실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세면대에 붙어 있는 거울로 가슴팍에 달린 명찰이 보였다.
[하예찬 : 개인 연습생]“개인 연습생?”
LEE 엔터가 아니라 개인 연습생이라는 표시에 예찬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크게 잘못된 게 분명했다.
개인 칸으로 들어간 예찬은 변기 커버를 내리고 주저앉았다.
‘리셋 횟수를 초과했다고 했어.’
이어 플레이어 하예찬을 폐기한다는 글자가 나오고 홀로그램 창이 조각났다.
예찬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조각난 홀로그램 창은 이상한 선택지와 함께 파랗게 변해서 돌아왔다.
이상한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니 속이 울렁거렸다.
‘정신 차려, 하예찬.’
애써 토기를 억누른 예찬은 우선 홀로그램 창이 말한 상태창과 보상을 확인하기로 했다.
‘상태창.’
플레이어 ― 하예찬 Lv. 2
비주얼 : A
노래 : A
춤 : B
랩 : F
언변 : D
반짝임 : C
칭호 : 리셋이 끝난 플레이어
포인트 : 2
눈으로 상태창을 쭉 훑은 예찬은 조용히 눈을 감고 리셋 창을 불렀다.
“리셋.”
…….
“리셋.”
…….
“리셋……!”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찬물로 세수를 하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예찬은 차분하게 자신의 상황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리셋을 하면 언제나 LEE 엔터에 입사한 날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LEE 엔터 입사라는 과거는 사라졌고, 거울에 비치는 얼굴은 열일곱이라기엔 너무 성숙해 보였다.
‘그보다 츄마프는 내가 스무 살 때 나오는 프로그램이잖아.’
리셋 전에는 연습생 신분으로 회사 연습실에 박혀 시청했었던 방송이었다.
리셋 후에도 멘토로 참가한 적은 있어도 연습생으로 참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찬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은 다행히 지문으로 잠금이 해제되었다. 가장 먼저 날짜를 확인했다.
예찬이 기억하고 있는 츄마프 방영 해와 같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스마트폰과 같이 들어 있던 신분증도 확인했다.
하예찬이란 이름 석 자와 생년월일은 똑같이 적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주소에는 난생처음 보는 빌라가 쓰여 있었다.
적혀 있는 주소를 머리 한쪽에 입력한 예찬은 다시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깔려 있는 SNS 어플들을 확인했다.
‘아이튜브와 츄위터, 임스타 정도인가.’
무언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SNS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글자 한 자 남긴 적 없는 구독용 계정들이었다.
이번엔 연락처 앱을 열었다.
텅 빈 목록이 낯설었다.
예찬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이젠 눈 감고도 외워 버린 번호들을 저장했다.
‘일단 리스피릿 멤버들, 이필성 사장님, 김 감독님, HBS 이 PD님, CBC 윤 PD님, 신 작가님, 해솔이 형, 베베 형, 그리고…….’
안면부터 트고 친분을 다시 쌓아야 하겠지만, 인맥이 반인 이 업계에서 능력 있는 PD의 연락처를 알아 둬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내친김에 갤러리도 확인해 봤지만 얼마 안 되는 풍경 사진이 전부였다.
그사이 단 하나뿐인 인물 사진은 본 적 없는 교복을 입고 있는 예찬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얻을 정보는 더 이상 없다고 판단한 예찬은 스튜디오를 벗어나 택시를 잡았다.
방금 막 외운 집 주소를 부른 예찬이 좌석에 깊게 몸을 기댔다.
대체 왜 여느 때처럼 연습생 첫날로 리셋이 된 게 아니라 과거도, 시점도 변해 버렸을까.
전혀 단서를 찾지 못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일단 쉬면서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가로수, 다리, 빌딩, 버스, 멤버들…….
멤버들?
‘쟤들이 왜 여기서 나와?’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친 예찬은 창문을 뚫을 기세로 달라붙었다.
“저, 소, 손님?”
택시 기사의 당혹스러운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광고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예찬은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리, 스피릿.’
검색창에 네 글자를 입력하자 주르륵 그룹의 정보가 펼쳐졌다.
데뷔 일과 소속사, 데뷔 앨범에 최신곡까지.
익숙한 이름과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찬은 빠르게 멤버 이름을 훑었다.
‘이희샘, 박마루, 정찬양, 최선…… 정찬양?’
익숙한 이름 사이에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끼고 정작 예찬의 이름은 쏙 빠져 있었다.
예찬에게 무시당한 택시 기사는 민망했는지 라디오 볼륨을 조금 키웠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그룹이 어제 새 앨범을 냈어요. 청취자분들, 이젠 다들 아시죠?]예찬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이번 타이틀은 심지어 리더 정찬양 씨가 직접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럼 한 곡 듣고 올까요?]차 오디오를 통해 너무나 잘 아는 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예찬은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
“미친놈인가?”
“소, 손님. 라디오 끌까요?”
이번에도 가여울 정도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 택시 기사의 말은 예찬에게 들리지 않았다.
‘이거 내 곡이잖아!’
비슷한 수준이 아니었다.
예찬이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곡이 딱 한 가지, 메인 보컬의 목소리만 바뀐 채로 나오고 있었다.
“차 좀 돌려주세요.”
곡이 끝나고 예찬이 말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잠시 후, 오랜 시간 몸담은 소속사 건물 앞에 선 예찬은 한결 냉정함을 되찾았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리스피릿의 데뷔부터 지금까지 행보를 인터넷으로 살펴보았다.
리스피릿은 놀라우리만치 예찬이 가장 최근에 리셋하면서 밟은 길을 그대로 걷고 있었다.
예찬이 직접 부딪히고 깨진 끝에 선택한 최선의 길이다.
바뀐 것은 단 하나.
예찬의 자리를 정찬양이라는 놈이 꿰찼다는 것뿐.
리스피릿의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입구를 지나 예찬은 주차장 입구 옆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이 시기에 딱 주차장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지.’
매 리셋마다 반복되던 고장이었기에 예찬은 리스피릿 멤버들이 주차장 밖으로 나올 것을 확신하고 기다릴 수 있었다.
익숙한 밴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예찬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이따 치킨 시켜 먹을까?”
“활동기에 미쳤냐?”
“스타 라이브 켜고 먹으면 되지 않…… 으억, 깜짝이야!”
주차장을 빠져나오다 나무 밖으로 성큼 걸어 나온 예찬을 발견한 박마루가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찬은 낯익은 멤버들 사이에 껴 있는 이질적인 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야, 너 나 알지?”
박마루의 뒤에 서 있던 정찬양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잘 관리된 인형 같은 낯짝과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왜 네가 있는 거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정찬양이 예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찬양이 형 아는 사람인가?”
“분위기 보니 우리 스토커는 아닌 거지?”
숙덕거리는 멤버들을 돌아본 정찬양이 싱긋 웃었다.
“내 친구야. 너희 먼저 들어가 있을래?”
“괜찮겠어요? 저 사람 표정이 완전 험악한데.”
“괜찮아. 친구라니까?”
정찬양이 김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지 멤버들은 먼저 자리를 뜨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예찬은 코웃음을 쳤다.
“하, 망나니 새끼들이라 그런지 도둑놈이랑 잘 맞나 봐.”
정찬양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이내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한 정찬양이 그림처럼 웃었다.
“‘옛’ 동료들에 대한 평가가 박하네.”
“뭐래 도둑놈이.”
이번엔 좀 더 긴 정적이 흘렀다.
정찬양은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도둑놈이라니. 내가 뭘 훔쳤다는 거야?”
“지금 네가 가진 거 전부 내 거잖아, 이 도둑놈아.”
세 번째 도둑놈 발언에 정찬양은 주먹을 꾹 쥐었다.
징글징글한 웃는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니 이제야 봐줄 만했다.
“너 말이야. 초면에 너무 무례하지 않아?”
예찬이 한 번 더 코웃음을 쳤다.
“초면은 개뿔. 야, 너 리셋창이지?”
드디어 정찬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한 예찬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순식간에 무표정이 된 정찬양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예찬을 바라보았다.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 건조했다.
“맞아.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긴 세월 예찬을 지켜본 리셋창이 태연하게 긍정했다.
리셋창 정찬양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분명 삭제했을 텐데 어떻게 존재하는 거지?”
예찬이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도둑놈 질문에 대답이나 하고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해 보이냐?”
“……나랑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거 같은데,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내 걸 내놓으라고 떼쓰러 온 건 아니겠지?”
사람 좋은 척하는 건 그만두기로 한 모양인지 예찬의 신경을 긁기 위해 단어를 고른 것이 티가 났다.
예찬은 기다렸다는 듯 정찬양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설마. 돌려줄 거면 애초에 훔쳐 가지도 않았겠지.”
살이 에일 듯 차가운 예찬의 목소리에도 정찬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예찬, 우리 정확히 해 두자. 훔쳤다는 말은 옳지 않아. 애초에 네가 가졌던 건 전부 내 능력으로 얻은 거잖아.”
정찬양은 과장되게 양손을 들더니 예찬과 눈을 맞췄다.
“있는 거라곤 꽉 찬 나이밖에 없는 망한 회사의 7년 차 연습생, 그게 원래 네 자리야.”
애초에 리셋이 없었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예찬의 뇌리에 똑똑히 새겨 주겠다는 듯 정찬양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 지금 내가 가진 건 네게 아니라 내 거라고.”
예찬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후, 깊게 한숨을 내쉰 예찬이 순식간에 정찬양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자식이 누굴 호구로 보나. 야, 도둑놈의 새끼야. 리셋은 네 말대로 네 능력이지. 근데 리셋한 후로 했던 말, 행동, 선택 다 내가 한 건데 그게 왜 내 게 아니야? 그동안 내가 혼자 구르면서 찾은 답이 어떻게 네 거야?”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내뱉는 말들이 정찬양을 향해 쏟아졌다.
으득. 이 가는 소리에서 광기마저 느껴졌다.
있는 거라곤 꽉 찬 나이밖에 없는 망한 회사의 7년 차 연습생이 얼마나 처절하게 정상까지 갔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 정상의 자리를 유지했는지.
바로 옆에 붙어 다 보았으면서 그걸 감히 제 것이라 말하는 상대가 더할 나위 없이 역겨웠다.
“여기 왜 왔냐고 했지? 응, 남의 거 훔친 상도덕 없는 도둑놈한테 꼭 해 줄 말이 있어서 왔어.”
서늘한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내가 인생의 쓴맛을 보여 줄게, 이 호로새끼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