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08)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07화
긴장감 넘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으나, 예찬은 당당하게 제작진에게 스마트폰을 받아 냈다.
[요즘 세상 참 좋아요. 번역기만 돌리면 어느 나라 말인지도 알아서 알려 주거든요. 이미지도 번역이 되고요.]예찬이 애플리케이션을 켜는 사이 갑자기 주태현이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사정, PPL이었다.
유피테르의 숙소 안.
레굴루스처럼 나란히 앉아 방송을 시청하던 유피테르 멤버들이 들고일어났다.
“아, 주태현 발연기! 광고주님께 사과해라!”
“태현이 아이돌 몇 년 차?”
눈이 썩을 것 같다며 강연록이 얼굴을 가렸고, 이가원은 웃는 낯으로 사람을 살살 긁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보자.”
입을 삐죽거린 주태현이 탄산수를 입에 털어 넣었다.
데뷔 9년 차인 유피테르는 여전히 한 숙소에서 살고 있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나가 살 집을 찾고 또 그 새집에 짐을 옮기는 게 귀찮아서였다.
군대에 다녀오면 자연스럽게 흩어지겠거니 막연히 생각만 하는 실정이었다.
그 사이 화면 속 ‘주하채배’ 팀의 네 사람은 쪽지에 나온 글자를 번역기에 입력했다.
[I 띄고 T, U, O, I…….] [잠깐만. U 다음에 뭐라고?]평균 키를 훌쩍 넘는 남자 넷이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꼴이 웃겼다.
같은 팀이 되고 싶었던 예찬과 강해솔을 둘 다 놓친 팀 정하기가 지나간 이후, 내내 뚱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던 황시우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지 인식된다고 해 놓고 왜 저러고 있어?”
“필기체라 잘 안 읽히더라.”
“저런. 제작진이 잘못했네. 제대로 광고하려면 정자체로 쓰셨어야지.”
이가원이 혀를 차는 가운데, 마침내 번역기에 글자를 전부 입력한 예찬이 번역 버튼을 눌렀다.
[이탈리아어였나 보네. 뜻은 ‘피에 젖은 보물이 발아래 놓여 있습…….’]“…….”
생각보다 엄한 문구에 예찬이 말꼬리를 흐렸다.
유피테르의 숙소도 조용해졌다.
알파벳을 부르기 위해 힌트 쪽지를 들고 있던 채은성의 손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호, 호, 호, 혹시, 어, 어, 얼룩이, 커, 커, 커피가 아니라…….] [피인가?]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악! 악! 아아아아악!]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채은성을 대신해 배새벽이 합리적인 의문을 제시했다.
힌트를 내던진 채은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은성이가 겁이 많더라고.”
화면 속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 채은성을 옹호하듯 주태현이 유피테르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후배의 추태를 굽어살피는 따뜻한 선배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연습생 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함께한 멤버들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방금 네 목소리도 들린 거 같은데?”
“씁, 어디서 은성이한테 묻어가려고.”
“어휴, 쫄보…….”
“…….”
* * *
같은 시간, 레굴루스의 숙소에도 똑같이 채은성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예찬이 귀를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거실을 뒤흔들던 비명 소리가 갑작스레 뚝 끊기고 화면이 ‘스승의 은혜’ 팀으로 바뀌었다.
유피테르의 메인 보컬인 이가원과 심상록, 강해솔, 정의탁이 진지한 얼굴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이 팀의 시작 지점이 산의 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막 엄청난 비밀이 밝혀질 것 같은 순간에 장면이 아예 바뀌어 버리자 방송에 집중하고 있던 멤버들이 술렁거렸다.
“아니, 그래서 방금 뭔데? 피에 젖은 보물이 있다고?”
“예찬이네는 공포 체험이었구나. 우린 극기 훈련이었는데…….”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당연히 눈치챘겠지만, 저 진짜로 겁먹은 거 아닙니다.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
“근데 은성이 말고 다른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주섬주섬 주워 삼키던 채은성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채은성은 배새벽의 옆에 딱 붙더니 선우이경을 노려보았다.
“장난치지 마시죠, 이경이 형. 세상에는 해도 되는 장난과 해선 안 되는 장난이 있어요. 귀신이라니 너무 유치하고 진부하네요.”
일단 막내 뒤에 숨어서 할 얘기는 아니었다.
선우이경이 어이가 없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귀신 얘기가 아닌데…….”
선우이경의 말대로 예찬의 귀에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현장에서 직접 보기도 했지.’
세로로 입을 길게 벌린 주태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찬은 채은성보다 한 박자 늦게 소리를 지르고 반 박자 빨리 입을 다문 덕에 묻힐 수 있었던 주태현의 비밀을 지켜 주었다.
힌트에 쓰인 문구를 알아낸 이후 채은성과 주태현은 힌트 쪽지를 만지지도 못했다.
‘무슨 바보들의 합창이냐고.’
진짜 피일 리가 없지 않냐는 예찬의 말에 채은성은 그런 건 모르겠고 아무튼 못 만진다고 울었다.
주태현은 여기서도 작게 고개만 끄덕이며 묻어갔다.
[잠깐, 얘들아. 우리 여기 그늘에서 선크림 좀 바르자.]“오, PPL 시간.”
이가원이 레굴루스 멤버들을 불러 세우는 것을 본 선우이경이 엄지를 세웠다.
예찬은 겁쟁이 듀오를 머릿속에서 치우고 화면에 집중했다.
선크림의 로고가 잘 보이도록 적절한 각도로 들어 올린 이가원은 선크림을 꼭 발라야 하는 이유와 들고 있는 선크림의 장점을 열심히 나열한 뒤 팀원들의 손에 하얀 크림을 쭉 짜 줬다.
좀 웃긴 것은 다들 메이크업을 한 상태라 손에만 선크림을 열심히 바르고 있었단 것이었다.
[손에도 잊지 말고 발라 줘야 해. 선크림을 보통 얼굴과 목에만 바르는데, 햇빛은 손을 피해 가지 않거든.]상황을 포장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팀원들 손에 선크림을 콩알만큼 얹어 준 이가원은 마지막에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자기 손등엔 그 배는 되는 양을 짜고 말았다.
이번에도 이가원은 침착했다.
[이럴 땐 당황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돼.]이가원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강해솔의 손을 붙잡더니 손등끼리 쓱쓱 문질렀다.
화면 속 강해솔이 뻣뻣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으으.”
레굴루스의 숙소 내에 선배님 앞에선 차마 낼 수 없던 강해솔이 질색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퍼졌다.
‘가엾게도…….’
어깨동무 이상의 신체 접촉에 학을 떼는 강해솔이었으나, 대선배의 손길을 뿌리칠 순 없었는지 화면 속 강해솔은 그저 견디고 있었다.
예찬은 이번엔 SNS 말고 실시간 스트리밍 채팅창을 확인했다.
– 훈녀생정이다
– 훈녀생정ㅋㅋㅋㅋㅋ언제적이야ㅋㅋㅋㅋㅋㅋㅋ
– 선크림만 있으면 썸 상대와 자연스러운 스킨십 쌉가능
– ?훈녀생정이 뭔데
– 핸드크림의 시대는 갔다 대세는 선크림이다
– 가원아 자연스러웠다
– 백년해로하세요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이 요란스러웠다.
핸드크림을 많이 짰다며 상대의 손을 잡는 조금 낡은 스킨십 유도법은 예찬도 알고 있었다.
‘이런 드립을 준비해 오는 팬들이 사인회에 꽤 있으니까.’
유행하는 드립은 아이돌들이 꿰고 있으니 일부러 좀 지난 걸 준비해 오는 건지, 아니면 그 팬에겐 그 드립이 최신이었던 건지까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예찬은 가끔은 알고서도 속아 주었고 때로는 네 속을 훤히 알고 있다며 역으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다음 사인회 때는 핸드크림이 아니라 선크림을 들고 오는 팬들이 많을 것 같았다.
‘특히 해솔이 형한테.’
이왕이면 야외 팬 사인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이제야 산 정상에 오른 ‘스승의 은혜’ 팀도 힌트를 찾기 시작했다.
[이거 힌트일까요?] [오, 나무토막이네. 잘했어, 의탁이. 그럼 이렇게 생긴 걸 더 찾아보자.]가장 먼저 힌트를 찾은 정의탁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존층까지 치솟았을 것이다.
‘알기 쉽다니까.’
지금 소파에 앉아 있는 정의탁도 자신의 활약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자꾸 어깨를 움찔대고 있었다.
잠시 후 나무토막을 모아 온 네 사람이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십자가 모양으로 맞춰진 나무토막엔 한글로 된 짧은 문장 하나와 십자가의 긴 쪽을 따라 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길은 이어져 있다? 무슨 뜻이지?] [그러게요.]“퍼즐은 우리보다 간단하네.”
채은성의 말대로 몇 안 되는 조각을 맞추기만 하면 바로 멀쩡한 힌트가 나왔다.
힌트를 찾으러 오는 길이 험했으니 나름대로 밸런스를 맞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게 무슨 뜻인지…….”
“의탁이 스포 좀 해 봐라.”
“네? 거절할래요!”
[아! 알겠다!]그때 신중하게 십자가를 들여다보던 강해솔이 외쳤다.
화면 속 ‘스승의 은혜’ 팀원들과 화면 밖 레굴루스 멤버들의 집중이 최고조로 높아진 그 순간,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확실히 말해 두지. 보물은 우리가 차지한다. 알겠나, 제군들?]“어우! 너무하네! 아니, 시우 선배님께 드린 말씀은 절대 아니옵니다!”
듣는 사람이라곤 레굴루스 멤버들밖에 없음에도 선우이경은 빠르게 자기 말을 정정했다.
다른 멤버들도 또 불이 붙으려는데 흥이 식었다는 듯 불만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꽤 욕을 먹을 것 같은 편집이었다.
‘나름대로 긴장감을 주려고 한 거 같긴 한데, 좀 과했군.’
방송이 끝나면 간만에 유피테르 팬덤이 제작진을 패는 진풍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유피테르의 리더 황시우가 팀장인 ‘꽃미남즈’의 시작 지점은 무척이나 낯익은 곳이었다.
“아마 방송엔 안 나올 것 같은데, 황시우 선배님이 촬영하면서 자꾸 여기가 하예찬의…… 여기서 강해솔이…… 중얼거리셔서 좀 무서웠잖아.”
선우이경이 가짜로 훌쩍훌쩍 우는 시늉을 했다.
그렇다.
‘꽃미남즈’가 도착한 곳은 바로 예찬과 강해솔이 밥 먹듯이 드나드는 회사 14층 작업실이었다.
“뭐야, 우리만 야외였어요? 완전 더웠는데!”
정의탁이 불공평하다며 툴툴거렸다.
선우이경이 그런 정의탁을 달래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조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우린 협찬 템이 실내에 적합했거든.”
“우리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예찬이 덧붙였다.
정의탁의 목소리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이경이 형네 거는 아직 안 봐서 모르겠지만, 번역기는 밖이어도 상관없잖아요. 어딜 같이 묻어가시려고.”
“쳇.”
적당히 넘어갈 것이지.
[그러면 다들 힌트를 찾는다, 실시!] [실시!]이동하는 도중에 황시우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범세혁은 기운이 펄펄 넘쳤다.
온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범세혁이 ‘실시’를 외치더니 몸을 휙 틀었다.
곧이어 제작진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세혁 씨! 이 안에 있어요, 이 안에!] [밖엔 없어!] [아, 그래요?]의욕이 좀 과했는지 그대로 작업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범세혁을 제작진이 붙잡았다.
황시우는 그런 범세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더니 이번엔 우휘겸을 붙잡고 편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자, 봐라. 여기에 있는 이 뜬금없는 카메라. 수상하지?] [……수상합니다.] [촬영 중에 이유 없는 카메라 같은 건 없어. 분명 여기 뭔가가 있는 거다. 바로 이렇게 말이지. 대단하지?]정말로 카메라 근처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힌트를 찾아낸 황시우가 의기양양하게 힌트를 흔들어 보였다.
[……대단합니다!]우휘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예찬은 생각했다.
‘애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다음에 또 이런 촬영이 있다면 황시우의 동선엔 이유 없는 카메라를 배치해 두라고 제작진에게 꼭 언질을 주어야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