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15)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14화
레굴루스가 송네 피오르 근처의 숙소에서 해가 뜨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NJ 주식회사 엔터테인먼트 빌딩 근처의 정류소에 내린 작곡가 PiPiPi, 본명 피대기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헛것을 보나?’
요 몇 달간 자신을 괴롭히던 예찬의 얼굴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웃는 얼굴, 살짝 찡그린 얼굴, 쑥스러운 얼굴…….
‘아니, 헛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면 병원 가야지.’
갑작스럽게 닥친 위기감에 세차게 고개를 털자 그제야 전광판이며 벽에 걸린 사진에 박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 하예찬의 스무 살을 축하합니다.
– Happy Birthday, 예찬
– 영원한 왕자님, 하예찬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아.”
아무래도 지하철 같은 곳에서 종종 보던 생일 축하 광고인 모양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PiPiPi의 뒤로 예찬의 씩 웃는 얼굴 사진을 랩핑한 버스가 지나갔다.
PiPiPi는 잠시 광고에 적혀 있는 숫자를 확인했다.
– 20XX0723 여름 햇살보다 눈부신 너의 미소
7월 23일이라면 오늘이다.
스마트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한 PiPiPi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예찬에게 인생 최고의 생일 선물을 주게 되어 버렸다.
PiPiPi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USB를 한 번 더듬고 NJ 빌딩을 향해 힘차게 발을 뻗었다.
레굴루스의 하예찬.
실력은 확실하지만, 그 이상으로 건방지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감히 이 내가 곡을 준다고 하는데 거절하다니!’
레굴루스가 데뷔 앨범을 급히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친히 손을 내밀자 돌아왔던 그 문자 메시지는 아직도 꿈에서 피대기를 괴롭혔다.
–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필요 없는데요……;;
필요 없다.
무엇이?
설마 나 PiPiPi의 곡이?
믿을 수 없었다.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마.
내 앞에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 그때 선심 쓰듯 곡을 내주리라.
이를 갈던 PiPiPi의 투지는 레굴루스의 데뷔 앨범 ‘Inaugurate’가 발매되고 사그라졌다.
계정엽 작곡가의 손이 들어간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곡들을 순서대로 듣고 난 뒤, PiPiPi는 예찬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이 정도로 잘났으면 좀 건방질 수 있지!’
이미 이런 곡들이 있으니 더 이상 앨범에 넣을 게 필요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 정도면 피대기의 곡을 사양할 만했다.
‘물론 한 번이라도 들어 봤으면 내 완벽한 작품을 감히 거절하지 못했겠지만!’
PiPiPi는 예찬이 ‘감히’ PiPiPi가 얼마나 대단한 곡을 준비했는지 몰라서 그랬던 거니 천재 작곡가 선배로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로 했다.
‘뭐, 다음 앨범에 넣으면 되니까. 지금이라도 이 곡을 들려주고…….’
자신이 레굴루스를 위해 준비했던 곡을 다시 들어 본 PiPiPi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뇌했다.
……이걸로 되나?
과연 이걸로 그 하예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건가?
난생처음, 자신이 쓴 곡에 의문이 들었다.
그 감정은 지난 츄마프 경연에서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걸작 ‘시나브로’를 예찬이 편곡한 것을 들었던 순간과 비슷했다.
PiPiPi의 눈앞에 그날의 무대가 떠올랐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바탕화면에 옮겨 두었던 곡을 치운 PiPiPi는 그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작곡에 매달렸다.
하나를 완성하고 레굴루스의 ‘Day & Day’를 듣고, 또 하나를 완성하고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들었다.
미친 듯이 곡을 쌓은 PiPiPi에게 얼마 되지 않아 레굴루스가 벌써 다음 앨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다급해진 PiPiPi는 예찬에게 지금까지 만든 곡들을 들어 보라는 장문의 문자를 보냈고, 마음만 받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하예찬……!’
이쯤 되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다시는 상종을 안 하겠다고 할 만한데 한번 끓기 시작한 열정은 쉬이 식지 않았다.
‘반드시 내가 만든 곡으로 레굴루스가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야 만다!’
매정한 문자를 받은 후, 다시금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곡을 작업한 PiPiPi는 당당하게 NJ 빌딩에 입성했다.
“어떻게 오셨나요?”
친절한 접수처 직원에게 PiPiPi가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다.
“레굴루스의 하예찬 씨를 보러 왔는데요.”
예찬의 이름을 듣자 직원이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차. 상대방은 아이돌이지.
피대기는 조금 반성했다.
다짜고짜 아이돌 멤버를 만나러 왔다니, 극성팬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작곡가 PiPiPi라고 하는데요.”
“아, PiPiPi 씨.”
PiPiPi는 이름을 밝히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든 당연히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나 비대한 자아였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접수대 직원은 츄마프를 전 회차 본방 사수한 애청자였다.
그녀는 PiPiPi의 이름을 듣자 어렵지 않게 그를 떠올렸다.
“……어, 약속이 되어 있으신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접수처 직원에게 있어 NJ에 내려온 한 줄기 빛, NJ의 사랑둥이, NJ의 희망인 레굴루스는 지금 해외 출장 중이다.
그래서 요 며칠 회사에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고 있지 않은가.
“아니요.”
직원의 질문에 PiPiPi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상대로 역시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온 모양이다.
접수처 직원은 잠시 고민했다.
매뉴얼대로 하자면 돌려보내는 게 맞다.
그렇지만 아직도 출퇴근길 플레이 리스트에 ‘시나브로’가 끼어 있는 전직 공주님이자 현직 복숭아로서는 PiPiPi를 이대로 내보내기 아쉬웠다.
‘사람은 좀 나사 풀린 것 같지만 곡은 좋잖아? 여기까지 와서 예찬 씨를 찾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얘기일 텐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접수처 직원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 예찬 씨는 안 계셔서요. 혹시 업무 관련된 일이시면 레굴루스 전담팀과 연결해 드릴까요?”
이것은 결코 사심이 아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한 판단이다.
결코 ‘시나브로 ver. 레굴루스’ 같은 게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 * *
송네 피오르는 과연 이 고생을 하고 올 가치가 있는 장소긴 했다.
저 멀리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광활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지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던 스태프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화색이 돌았다.
이번에도 촬영은 빠르게 끝났고, 서준우 작가는 멤버들을 모아 작업물을 짧게 모니터링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케줄이 완전히 끝나고 이쪽저쪽을 향해 인사하는 레굴루스를 향해 서준우 측의 스태프들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또 봬요!”
“응원할게요!”
“앨범도 살 거예요!”
“레굴루스 파이팅!”
수장인 서준우가 레굴루스에게 워낙 호의적이었던지라, 그쪽 스태프들은 다음에 또 함께 작업을 할 것이라고 자연스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도 우리가 해외로 나와야겠지?’
그래도 고생을 들인 이상으로 뽑힌 결과물을 보니 다음번에도 기꺼이 수고를 할 마음이 들었다.
서준우 작가 일행과 헤어진 레굴루스는 이번엔 미리 수배해 둔 비행기를 타고 오슬로로 돌아왔다.
“생일 축하해!”
짐만 덩그러니 맡겨 두었던 오슬로 시내의 숙소에서 레굴루스는 소소하게 예찬의 생일 파티를 열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왔다는 장식들로 방을 꾸미고, 근처 베이커리에서 값비싼 케이크를 사 왔지만 영 아쉽다며 고깔모자를 쓴 선우이경이 입맛을 다셨다.
“진짜 깜짝 놀랄 만한 파티를 준비하려고 했는데. 하필 생일에 여길 오다니 너무 갑작스러웠어.”
어차피 예찬은 휴가 날짜를 잡을 때부터 멤버들끼리 무언가 준비하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선우이경이 원하는 반응은 절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마워요.”
그러나 예찬은 굳이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감사를 전했다.
드물게도 조금 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선우이경이 피식 웃고서 예찬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내년 생일은 각오해. 아니지, 잊고 있어. 완전히 잊고 있다가 깜짝 놀라라.”
예찬은 ‘그 전에 형 생일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요.’라고 태클을 거는 대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은 해 볼게요.”
기분이 좋은 예찬은 더없이 관대했다.
도지윤 팀장이 전화로 전해 준 PiPiPi의 NJ 방문 소식에도 유하게 반응했다.
– 지금 작업하는 앨범에 들어갈 곡을 주고 싶으시다고 하시더군요.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저한테도 문자가 오긴 왔었던 거 같네요. 그런데 오늘 방문하겠단 연락은 없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딱히 PiPiPi의 곡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도 팀장이 이미 넙죽 받아들였다면 굳이 안 된다고 어깃장을 놓을 생각도 없었다.
‘PiPiPi가 곡을 못만드는 건 아니니까. 팀장님 체면을 봐서라도 뭐, 한자리 정도는 내 줄 수 있지.’
그러나 스마트폰 스피커를 통해 건너온 도지윤의 말은 예찬의 생각보다 더 레굴루스를 존중하는 내용이었다.
– 앨범 작업은 전적으로 레굴루스 멤버들의 몫이라 제가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라고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그러면 예찬 씨나 멤버들과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혹시 PiPiPi 작곡가님과 작업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도지윤 팀장은 예찬이 그렇다고 하면 입국 이후로 날을 잡고, 아니라고 하면 회사 선에서 선을 긋겠다고 덧붙였다.
“…….”
– 예찬 씨?
“아, 죄송해요. 어, 사실 어느 정도 트랙 리스트 구성이 다 나와서요. PiPiPi 작곡가님께는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예찬은 한동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LEE 엔터 사장이 사고를 치고 수습해 달라고 울면서 달려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와는 너무나 다른 도 팀장의 대응은…… 새삼스럽지만 감동적이었다.
– 예찬아, 이 안무가한테 안무 받기로 했는데 어쩌지? 꼭 타이틀곡 안무로 써 준다고 약속도 했는데…….
– 사장님, 타이틀곡 안무 작업이 끝난 게 언제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 아니, 그런데 진짜 진짜 간절하게 부탁을 해 가지고……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도 뻥뻥 쳐 버렸는데 어떻게 안 될까? 우리 천재 만재 아이돌의 신, 나의 신! 예찬아! 제발! 플리즈으으?!
– ……후우.
일을 못하는 직원은 갈아치웠지만, 사장마저 그렇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본성은 착하고 무엇보다 리스피릿 멤버들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느껴지기에 괜찮지 않냐고 생각해 왔다.
자신을 존중해 주는 멀쩡한 상사를 위에 두고 나서야 예찬은 깨달았다.
‘나 그때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었구나…….’
도지윤 팀장의 깔끔한 대응을 맛보자 그간 묵은 체증까지 함께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자신은 괜찮았던 게 아니라,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으니 사장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나만 탈출해서 미안합니다, 리바디.’
회사와 사장을 욕하던 리바디들의 글을 떠올리며 예찬은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튼 여전히 기분 좋은 생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