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2)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1화
“센터는 바꾸지 않고 가자.”
박나길은 단호한 눈빛으로 조원들을 돌아보며 정의탁의 어깨를 짚었다.
성격 급한 김수영이 판을 깔아 주고 김주영마저 그 판에 올랐으니, 두 사람에게 설득된 척 센터를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박나길의 태도는 결연했다.
역시 예찬이 판단한 것처럼 전체적인 그림을 볼 정도의 셈은 할 수 있는 놈이었다.
“나길이 형, 하지만…….”
“예찬이 말대로 의탁이는 우리 조가 의논해서 뽑은 센터야.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누가 의탁이를 뽑았고 뽑지 않았고는 중요하지 않고.”
박나길은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예찬을 바라보았다.
“예찬이 말대로 조원 모두의 선택이고, 조원 모두가 책임질 거야.”
김수영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꽤 믿음직스러운데?’
아무리 사이가 좋은 그룹이라 할지라도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생판 모르는 놈들을 모아 둔 이런 개인 서바이벌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고작 무대 하나를 같이할 팀이지만 그 팀의 리더를 맡은 이상 이런 문제를 제때 끊어 줄 강단이 필요했다.
예찬은 제법 괜찮게 리더의 임무를 수행한 박나길을 조금 다시 보았다.
그 후의 연습은 조용히 진행되었다.
정의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계속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고, 나머지 조원들은 딱히 지적하지 않고 지나갔다.
‘머리로 몰라서 저러는 게 아닌 걸 아니까 뭐라고 할 말도 없지.’
그러나 예찬은 이대로 두 손 두 발 놓고 정의탁이 정신을 차리기만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노력하겠다는 말만 믿고 있다가 베네핏이 전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어. 본인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자기 전에 잠깐 산책이라도 하러 나가서 마음 좀 잡아 줘야겠군.’
연습생으로 가득한 식당 안에 자리를 잡고 앉은 예찬이 기계적으로 젓가락질을 반복하는 정의탁을 보며 해야 할 말을 고른 순간이었다.
“와, 의탁이 옆자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자 식판을 든 범세혁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뭐야. 세혁이 너희 조원들은 어쩌고?”
같은 연습실을 쓰다 보니 말을 텄는지 박나길이 반갑게 범세혁에게 말을 걸었다.
“자리가 부족해서 저랑 새벽이만 이쪽으로 왔어요.”
범세혁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배새벽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요즘 세상에 안경을 벗으면 미남입니다, 컨셉이라니…….’
앞머리를 덥수룩하게 내리고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예찬은 배새벽의 맨 얼굴이 얼마나 반지르르하게 생겼는지 잘 알았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아이돌이 아니라 배우가 되지만.’
손꼽히는 배우 전문 소속사인 오브 엔터 배해선 대표의 외동아들인 배새벽은 츄마프에서 탈락한 이듬해 혜성처럼 영화계에 등장했다.
이윽고 신인상부터 시작해 탐욕스럽게 상과 배역을 쓸어 모으던 배새벽은 훗날 왜 츄마프에 출연했던 것인지 묻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이돌이란 직업을 동경했으며, 지금도 동경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찬의 눈이 의욕으로 반짝였다.
‘이번엔 그 꿈을 이뤄 주지.’
예찬은 맞은편에서 조용히 수저를 번갈아 움직이는 배새벽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나저나 연습할 때 좀 들었는데 ‘Erased’ 노래 좋더라. 왜 여태까지 몰랐지?”
예찬이 잠깐 배새벽에 대해 떠올리는 동안 범세혁과 조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익숙한 사람이 곁에 있어서 그런가, 정의탁의 안색이 한결 편해 보였다.
“형은 댄스곡 아니면 잘 안 들으니까 모르죠.”
“하하, 들켰다. 특히 그 ‘Erased,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부분이 좋은 거 같아. 이게 센터 파트인가?”
범세혁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의탁의 파트를 불렀다. 당장 녹음실로 끌고 가고 싶을 만큼 ‘잘’.
예찬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 타이밍에 하필 그 파트를 부른다고?’
범세혁은 정의탁의 중간 평가를 보지 못했으니 악의는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의탁이 거하게 말아먹은 파트를 제대로 된 연습도 없이 완벽하게 불렀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예찬을 포함한 보컬 5조는 전부 같은 마음이었는지 다들 뭐라고 말은 못 하고 정의탁의 눈치를 살폈다.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은 걸 눈치채지 못한 범세혁은 갑작스럽게 모두 입을 다문 게 의아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정의탁은…… 방금 관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와, 와아. 세혁이 너는 댄스 멤버인데 노래도 되, 되게 잘한다.”
돌연 찾아온 고요함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김주영이 어색하게 범세혁을 칭찬했다.
“그 파트가 좋다는 걸 보니 의탁이 노래가 좋았나 보네.”
예찬은 당장이라도 범세혁을 쥐어박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주먹을 억누르며 태연한 척 정의탁의 얼굴에 슬며시 금칠했다.
“맞아! 의탁이 파트 맞지? 의탁이 목소리랑 잘 어울려서 연습하다가 나도 모르게 자꾸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더라고.”
“그, 그렇지? 나도 의탁이가 진짜 잘 부른다고 생각해!”
“그럼 그럼. 의탁이 정말 잘하지.”
범세혁의 칭찬에 이때다 싶었는지 김주영과 박나길이 정의탁을 띄웠다. 티가 나도 너무 티 나는 칭찬이었다.
그러던 순간.
“뭐, 그 실력이 실전에서도 발휘돼야 할 텐데 말이죠.”
찬물을 끼얹는 김수영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보다 더 가라앉았다.
“수영아.”
김수영을 향해 박나길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정의탁은 별다른 반응 없이 식판을 정리했다. 박살 난 분위기가 더 박살 나기 전에 예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차라리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장소를 옮기는 게 효과적이었다. 김주영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 그럼 연습실로 갈까요?”
김주영의 말에 다 같이 연습실로 이동하려는 찰나, 예찬은 식탁 아래로 범세혁의 운동화를 가볍게 건드려서 시선을 돌렸다.
‘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눈이 마주친 범세혁은 고개를 젓는 예찬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보자.”
가라 앉은 분위기 속에서 연습이 끝났다.
박나길의 말이 끝나자 저 멀리 서 있던 범세혁이 빠르게 다가왔다. 댄스 조는 단체 연습이 진작 끝났는데 정의탁을 기다리느라 혼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찬은 짐을 챙기는 정의탁 옆에서 무언가 말을 거는 범세혁을 보다가 먼저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흐릿하게 들리는 소리엔 컨디션이라든지 괜찮냐는 단어들이 섞여 있었다.
‘난 같은 방이니 이따 상태 보고 얘기해 봐야겠군.’
혹시 범세혁과 얘기해서 상태가 좋아진다면 가장 좋고, 만약 여전히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다 해도 그때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의탁의 기분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샤워까지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여전히 상태가 영 아니었다. 예찬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일단 좀 재워서 피로를 풀고 얘기를 해야겠군. 뭐라고 말을 걸지? 넌 잘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근데 그건 너무 거짓말처럼 들릴 텐데…… 하, 생판 모르는 놈 기 세워 주기 힘드네.’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던 예찬이 선잠에 막 빠져들 무렵,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끼익, 하고 조심스레 사다리를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게 무슨…….’
예찬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이 아득하게 보였다.
‘……방문?’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예찬은 자리에서 몸을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옆을 보자 미동도 없이 정자세로 잠들어 있는 우휘겸이 보였다.
그럼 나간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정의탁이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공표된 적은 없지만 매 리셋마다 인터넷에선 츄마프 합숙 중 합숙소에서 도망친 연습생이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었다.
당연히 방송에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고 흔한 뜬소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 당사자가 예찬의 조원이 되면 이야기가 달랐다.
‘진짜로 도망치면 망한다.’
이미 예찬이 츄마프에 참여한 순간부터 과거는 달라졌고, 그동안 알았던 지식은 참고할 순 있어도 확신해선 안 됐다.
과거에는 작은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도 지금은 충분히 자진 하차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조는 누가 하차하든 말든 상관없어! 근데 내 조에서는 절대 안 돼!’
예찬은 급하게 신발을 구겨 신고 정의탁을 찾아 나섰다.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라 그런지 캄캄한 복도는 고요했다.
‘건물 밖? 아니면 옥상?’
잠깐 계단을 번갈아 바라보던 예찬은 이내 선택했다.
* * *
“여기서 뭐 해요?”
“그러게. 나 뭐 하고 있지?”
예찬의 대답에 정의탁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들고 있던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합숙소 뒤편의 공터에서 가벼운 점퍼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목에 수건까지 걸고 있는 정의탁은 누가 봐도 이른 조깅을 나온 차림새였다.
그에 비해 베개에 눌린 머리에 잠옷 바람을 한 예찬은 신발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옥상이 아니라 밖이 맞았네.’
몇 회차였는지 츄마프에서 정의탁이 지나가듯 고소 공포증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혹시 몽유병 있어요?”
“아니야…….”
새벽부터 혼자 놀라서 뛰어다닌 것 치곤 허무한 결말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예찬은 그대로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그래도 역시 찜찜한 것보다 제대로 확인하니 낫군…….’
예찬이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예찬을 내려다보는 정의탁의 얼굴에 이대로 지나쳐 갈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그냥 가라.’
그러나 홀로그램 창의 마음은 이번에도 예찬과 엇갈렸다.
[선택지 발생!>헤매는 어린양의 마음을 보듬어 주세요!
― 네가 이 담을 넘어갔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잖아.
― 뭔가 문제는 없니? 이 형아한테 다 털어놔 보렴.
― 너 범세혁 싫어하지. 다 티 난다.
[10> [9> [8>‘선택지 꼴 좀 봐라.’
예찬은 기운 없이 선택지를 꾹 눌렀다.
“나, 네가 이 담을 넘어갔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잖아.”
“네?”
정의탁의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예찬은 뻔뻔하게 합숙소 담벼락에 한 손을 가져다 댔다.
“용케 안 넘어갔네.”
“……촬영 중에 거길 넘어가면 연예계에서 아웃이죠.”
“그치.”
아이돌은 좋으나 싫으나 무대에서 도망가선 안 됐다. 멘탈이 박살 났을지언정 아이돌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제대로 중심을 잡고 있는 모양이라 예찬은 안심했다.
한숨을 쉰 정의탁이 예찬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래 아침마다 이렇게 운동해?”
“네, 습관이 되어서 안 하면 찌뿌둥하더라고요.”
“그럼 어제도?”
“했죠.”
“전혀 몰랐네.”
“형 어제 새벽부터 편곡하러 갔잖아요. 일어났는데 아래층 침대가 비어 있어서 놀랐거든요? 휘겸이 형은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주무시는 거 같고요.”
그러고 보니 지난 새벽엔 예찬이 일찍 나갔었다. 예찬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럼 그제는?”
“그제 쉬어 봤더니 컨디션이 영 아니라서 어제부터 다시 시작한 거예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순순히 대답하는 정의탁은 평소 범세혁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무척 순순했다.
“……같은 방인데 이렇게 얘기해 본 게 처음이네.”
“그러게요. 방에 들어가면 바로 잤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리스피릿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예찬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가볍게 입 밖으로 꺼냈다.
“넌 범세혁이랑 있을 때랑 좀 다르네.”
범세혁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정의탁이 얼굴을 확 구겼다.
“그 형이랑은 오래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그 형은 너무 생활력이 없잖아요. 보고 있으면 뭔가 부글거려서 잔소리도 하게 되고, 그냥 내버려 두면 사고를 치니까 몇 번 도와줬더니 이젠 문제가 생기면 세혁이 형도 그렇고 다들 나부터 쳐다보고!”
새벽의 고요함이 용기를 준 것인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속사포처럼 본심을 뱉어내던 정의탁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뭐…… 아이돌 하는데 생활력이 왜 필요하겠어요. 내가 이러는 게 우습지. 보컬 포지션 주제에 댄스 포지션인 세혁이 형보다 노래를 못하는데 양심도 없이…….”
‘기준이 범세혁이면 너무 가혹한데.’
오랫동안 범세혁과 알고 지내서 그런 것인지 정의탁의 기준은 너무 높았다.
예찬이 생각했을 때 합숙소에서 범세혁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그와 우휘겸 정도였다. 예찬 본인도 스탯은 비슷하기에 경험과 요령으로 좀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상이었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진심으로 우울해하고 있는 정의탁을 보고 있으니 방금 튀어나왔던 선택지가 떠올랐다.
― 너 범세혁 싫어하지. 다 티 난다.
선택지에는 분명 정의탁이 범세혁을 싫어하는 것처럼 쓰여 있었지만,
“범세혁이랑 같이 데뷔하고 싶은 거야?”
예찬의 생각은 달랐다.
정의탁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눈동자를 가엾게 떨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