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28)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27화
레굴루스의 씨름 첫 상대는 JI의 블랑딕스, 직역하자면 흰색과 숫자 10이었다.
작년에 데뷔한 10인조 그룹인 블랑딕스는 이름에 걸맞게 지금까지 쭉 백발을 유지했다.
음악도 굉장히 실험적이었는데, 대중적으로 히트하진 못했으나 소수의 코어 팬덤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그룹이었다.
‘4년 차쯤인가, 이대로는 도저히 못 버티겠다고 멤버 전원이 삭발한 뒤로 다시는 탈색하지 않았지, 아마?’
대머리 아이돌을 만들 셈이냐며 울부짖던 블랑딕스의 리더가 생생히 떠올랐다.
‘뭐, 리셋 전부터 따지면 일곱 번이나 봤으니까 그럴 만하군.’
씨름에 그 리더는 참여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어느 정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예찬이가 씨름?”
“예찬이가?”
“씨름?”
“누가?”
“예찬이가?”
전광판에 참여 선수의 이름이 떠오르자 관중석에서 이클립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입으로 떠들어 봤자 없어 보일 뿐…….’
예찬은 다시금 결과로 증명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면 씨름 남자부 16강 제1경기, 시작하겠습니다! 블랑딕스의 BB 선수, 레굴루스의 채은성 선수 앞으로!]“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기합이 바짝 들어간 채은성이 무릎과 이마가 닿을 기세로 허리를 숙이자 BB도 얼떨결에 폴더폰 인사로 답했다.
“……!”
슬슬 허리를 펴려고 눈치를 살핀 채은성은 선배 BB가 아직 허리를 접고 있는 걸 보고 기겁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
그 직후 살짝 고개를 든 BB도 놀라서 더욱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 뒤로도 몇 번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 두 사람은 주변에서 이제 됐다고 만류한 뒤에야 어색하게 일어났다.
“……?”
둘 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팬덤들이 도대체 왜 웃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도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고, 예의 바른 인사와 달리 자비 없는 괴력으로 채은성은 가볍게 1승을 챙겼다.
“감사합니다!”
[블랑딕스의 강우 선수, 레굴루스의 우휘겸 선수 앞으로!]이어진 두 번째 시합도 빠르게 끝이 났다.
우휘겸의 깔끔한 밭다리 걸기에 상대 선수가 맥없이 넘어졌다.
[우휘겸 선수, 승! 먼저 2승을 거둔 레굴루스가 8강에 올라갑니다!]“레굴루스!”
“휘겸아아아악!”
“얘들아 잘했어!”
“멋있다!”
씨름 선수 셋을 끌어안고 좋아하던 나머지 멤버들이 이내 이클립틱들 앞으로 달려갔다.
멀리서도 큰 소리로 호응하던 이클립틱들의 비명이 더욱 거세졌다.
“채은성! 채은성! 채은성!”
“우휘겸! 우휘겸! 우휘겸!”
“하예찬! 하예찬! 하예찬!”
팬들이 여전히 샅바를 걸치고 있는 멤버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며 기뻐했다.
예찬은 손을 흔드는 것으로 환호성에 화답하며 생각했다.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거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닌가.’
“하예찬 완전 멋있다!”
“예찬아, 너 지금 완전 천하장사 같아!”
그래, 이 함성에 대한 보답은 다음 시합에서 보여 주면 되지 않겠는가.
예찬은 뿌듯한 얼굴로 지금을 즐겼다.
* * *
그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는 것을 예찬이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거 위험한데?’
의기양양하게 나서 놓고 볼품없이 깨졌다거나, 팀 단위로 빠르게 탈락 위기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단지.
[우휘겸 선수, 16강에선 밭다리 걸기를 사용하더니 이번엔 아주 완벽한 안다리 걸기를 보여 주네요!] [채은성 선수의 뒤집기! 훌륭하게 2승을 거둬 냅니다!] [4강에 진출하는 것은 무서운 신인, 레굴루스입니다!] [네, 시작하자마자 채은성 선수의 배지기! 이건 끝났죠! 이번 시합의 다크호스네요!] [우휘겸 선수, 이번에도 다리 기술로 금도현 선수를 꺾었습니다!] [레굴루스의 팬석에서 엄청난 환호를 보내고 있네요. 이렇게 결승 진출을 확정 짓는 레굴루스입니다!]다른 두 놈이 너무 잘해서 기회가 오질 않았다.
샅바를 맨 예찬은 모래판에 발도 디디지 않은 채 순식간에 결승전까지 와 버렸다.
예찬이 눈만 깜빡거리는 사이 남은 준결승도 끝이 났다.
지난 대회 우승팀이었던 OPE가 나머지 결승 티켓을 거머쥐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씨름 결승전은 점심시간 이후에 진행하겠습니다!]예찬은 주섬주섬 샅바를 벗으며 생각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멤버들을 보며 우투리의 후예라고 혀를 차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일 줄은 몰랐다.
16강과 8강, 그리고 준결승까지 두 놈은 단 한 번도 위기를 겪지 않았다.
어쩌면, 아니, 지금까지의 경기를 지켜본 결과.
굉장히 높은 확률로 예찬은 경기장 밖에서 구경만 하다가 우승 트로피를 받게 생겼다.
“좋아, 이대로 우승까지 가자!”
“……힘내자!”
각자 3연승을 따낸 채은성과 우휘겸이 의기투합하더니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대진 순서를 정할 때, 꼭 먼저 2승을 거두겠다는 채은성에게 어디 해 보라면서 코웃음을 쳤던 과거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진짜로 다 이길 줄은 몰랐지…….’
1승 1패의 결정적인 순간 등장해 팀을 승리로 이끌려던 계획이 완전히 박살이 났다.
예찬이 이번 전아체에서 나가는 종목은 이 씨름뿐인데,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못 해 보게 생겼다.
‘결승전에서는 내가 먼저 나간다고 해 봐?’
“휘겸아, 배구 시작한대! 빨리 와!”
어디서 배구 유니폼을 받아 온 선우이경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휘겸아, 바로 시합하러 가는 거야?”
“힘내!”
우휘겸이 고개를 끄덕이곤 선우이경 쪽으로 달려갔다.
‘일단 점심시간에 이야기해 보자.’
지금은 남은 경기 응원이 먼저였다.
* * *
“이야, 아까웠다. 그렇지, 휘겸아?”
“네…….”
한 세트 차이로 배구 첫 경기에서 떨어진 선우이경은 말과 달리 상쾌한 얼굴이었으나 우휘겸은 진심으로 아쉬워 보였다.
뭐든 열심히 하는 놈답게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규칙을 외웠으니 그럴 만했다.
‘다른 놈들은 규칙이고 뭐고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그나마 전에 참여해 본 적 있는 아이돌들은 배구 비슷한 시늉이라도 했으나, 이번에 처음 참여한 아이돌들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깜짝 카메라가 아닌지 절로 의심하게 되는 장면들이 속출했다고 해야 하나…….’
조금 다른 의미로 눈을 뗄 수 없는 경기였다.
우휘겸과 달리 가성비를 따지는 선우이경이 시원해할 만했다.
‘배구는 방송에 최소한으로 나올 것 같으니 빨리 떨어져도 미련이 없겠지. 레굴루스 이름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휘겸이 서브 잘 넣더라.”
“실수도 많이 했는데…….”
“에이, 영상은 많이 봤어도 실제로 서브 넣어 본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요! 엄청 잘한 거죠!”
‘음, 잘하고 있군.’
살짝 풀이 죽은 우휘겸을 위로해 줘야 할지 고민했는데, 멤버들이 알아서 칭찬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
그대로 팬석으로 다가가자 이번엔 팬들이 칭찬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경아, 휘겸아, 잘했어!”
“완전 멋있었어!”
“우휘겸 서브 천재!”
“배구 요정 선우이경!”
능글능글 미소만 짓고 있던 선우이경이 요정 발언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요정은 좀 아니지 않아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이 여느 때와 달리 민망한 기색을 비치는 것을 놓칠 이클립틱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완전 요정 그 자체구만!”
“이경아! 네가 내 팅커벨이다!”
“오빠! 등 뒤에 날개 있어요!”
선우이경이 그만하라며 손을 열심히 내저어도 팬들의 외침은 끝나지 않았다.
[곧이어 남자 50m 달리기 예선을 진행하겠습니다. 선수들은 선수석에서 대기해 주세요.]“오, 드디어 육상이네.”
“잘하고 올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체육관 내에 방송이 울리고, 멤버 전원이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이경아! 우리 다 아니까 걷지 않아도 돼!”
“네?”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선우이경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소리를 질렀던 팬이 입 옆에 손을 대고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날개로 날아가도 된다고!!”
“아 진짜!”
선우이경을 기어코 바닥에 무릎 꿇린 팬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었다.
꺽꺽거리며 웃느라 일어서지 못하는 선우이경의 팔을 어깨에 걸친 범세혁이 말했다.
“팅커벨은 제가 받아 갑니다.”
이번엔 팬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와, 진짜 배 찢어질 것 같아.”
육상 트랙 옆의 응원석에서도 한참이나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선우이경이 배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군요, 팅커벨. 축하해요.”
“예찬이 너, 진짜 그러지 마라. 나 더 웃으면 정말로 쓰러질지도 몰라.”
“쓰러진 팅커벨이라니 꼭 보고 싶네요.”
“……이 장난꾸러기가.”
눈을 가늘게 뜬 선우이경을 향해 예찬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사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범세혁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 새벽이다!”
고개를 돌리자 4번 레인에서 배새벽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새삼스럽지만 예쁘장하네. 머리도 정말 작고.’
예찬은 배새벽의 전신을 짧게 스캔했다.
머리는 작고 목은 길고, 상체는 짧고, 다리는 길고.
멤버들끼리 있을 땐 다들 고만고만해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이렇게 떨어져서 보면 참 사기적인 비율이었다.
‘옆에 서 있는 것도 다들 아이돌인데.’
배우 활동 당시, 여배우들이 같은 프레임에 나오기 싫어하는 남배우 1위로 뽑힌 것엔 역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50m 예선 시작했습니다!] [4번 레인, 4번 레인 빨라요!] [배새벽 선수입니다! 배새벽 선수, 그대로 1위로 골인!] [이거 엄청난 기록이 나올 것 같은데요? 아, 역대 최단 기록이 나왔습니다! 배새벽 선수, 게다가 표정을 보면 아직 여유가 넘쳐요!] [레굴루스가 신인의 패기를 제대로 보여 주려는 것 같습니다!]흥분한 해설진들의 목소리와 팬들의 함성 소리가 뒤섞였다.
어쨌거나 배새벽은 산뜻한 얼굴로 전아체 50m 기록을 갈아 치우며 1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진짜 나만 빼고 다 MVP 되는 거 아니야?’
불안해지려는 예찬을 안심시킨 것은 다음 순서인 50m 예선에 나온 정의탁이었다.
[이번 예선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3번 레인의 정의탁 선수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레굴루스가 정말 잘해 주고 있거든요.] [네, 말씀하신 순간 50m 예선 2차전이 시작되었는데요! 3번 레인의 정의탁 선수 스타트 좋습니다! 이대로 쭉 좋은 컨디션으로 달리…… 면…… 음, 네. 정의탁 선수 4등으로 들어오네요.] [흠흠…….] [1등은 트럼프의 조커 선수, 2등은 블랑딕스의 BB 선수입니다.] [두 선수, 예선 통과 축하합니다.]정의탁은 최선을 다해 달렸고, 예선에서 떨어졌다.
“의탁아, 잘했어!”
“형은 최선을 다한 의탁이가 자랑스럽다!”
“승패보다 더 값진 최선!”
“아, 하지 말아요!”
예찬은 멤버들의 위로 아닌 위로에 질색팔색하며 돌아오는 정의탁을 따뜻한 눈으로 맞이했다.
그런 예찬과 눈을 마주친 정의탁이 소리를 질렀다.
“예찬이 형이 제일 미워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