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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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2화
“……티 나요?”
“어.”
예찬의 대답에 정의탁이 긴 한숨을 뱉었다.
“하아, 맞아요. 세혁이 형이랑 데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뭐 하나라도 그 형보다 나아야 할 거 같은데 답이 안 보이네요.”
정의탁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츄마프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런 상태가 지속된 모양이었다.
자신감이 땅에 떨어지다 못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잘하는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그 형이 뭘 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보다 나는 어떡하지 싶은 거예요. 연습할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닌데 평가받는다고 생각하면 바로 세혁이 형 얼굴이 떠올라요.”
예찬이 가만히 정의탁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이해한다곤 말할 수 없을지라도 어떤 느낌일지는 알 것 같았다.
아이돌 중에서도 못하는 그룹과 잘하는 그룹이 있었고, 그 그룹 안에서도 못하는 멤버와 잘하는 멤버로 나뉘었다.
그렇게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연예계 자체가 결국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에 가깝다 보니, 본인이 전보다 성장해도 옆 사람의 실력이나 성취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고.’
자조적으로 미소 지은 정의탁이 눈을 내리깔았다.
“한심하죠? 누가 같이 데뷔시켜 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김칫국을 들이켜느라 팀에 폐나 끼치고. 센터 자리도…… 팀을 위한다면 포기하는 게 옳았을지 몰라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이는 정의탁을 빤히 바라보던 예찬이 선택지를 내밀었다.
“냉정하게 말해 줄까, 따뜻하게 말해 줄까.”
“예?”
“지금 이렇게 털어놓는다는 건 나한테 뭔가 대답을 듣고 싶은 거 아니야?”
“그…… 런가? 어, 그런 것도 같네요.”
예찬의 지적에 그제야 자신이 지금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주절주절 사연을 늘어놓았다는 것을 자각한 정의탁이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예찬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들을 거 다 들었으니까 빼지 말고 골라 봐.”
“…….”
“‘냉정하게’야 ‘따뜻하게’야?”
“……형의 ‘냉정하게’는 솔직히 좀 무서운데요.”
“그럼 따뜻하게 해 줘?”
“아니요, 냉정하게요.”
정의탁의 대답에 예찬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정의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럴 줄 알았다.”
정의탁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이어질 예찬의 말에 집중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범세혁은 진짜 잘해. 이 합숙소에 노래든 춤이든 걔보다 잘하는 사람도 한 손에 꼽을 거고, 둘 다 걔보다 잘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누가 봐도 특출났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걔랑 진심으로 경쟁할 생각은 안 하지.”
예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흔들리는 정의탁의 눈을 보다 그의 어깨에 올려 둔 자기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태창.’
아이돌 연습생 ― 정의탁
비주얼 : A+
노래 : A+
춤 : A
랩 : C+
언변 : B-
반짝임 : B
상태 : 의기소침한 상태라 본 실력을 낼 수 없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균형이 좋은 상태창이 튀어나왔다.
‘역시 전체적으로 박나길보다 더 낫군…… 근데 이 정도면 연습 때보다도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정의탁은 저 ‘의기소침’ 때문에 평소에도 본인의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예찬이 정의탁을 바라보았다.
넘기 어려워 보이는 벽에 가로막혀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벽을 굳이 넘지 않아도 된다고 해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넌 꼭 넘을 수 있다고 격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합숙소엔 너랑 나 정도려나?”
“……네?”
“진심으로 걔를 이겨 보려는 사람 말이야.”
예찬은 여기 너랑 똑같은 놈이 있다고 말해 주기로 했다.
정의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찬은 정의탁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범세혁만큼 잘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난 몰라. 그렇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한심할 수 있겠어.”
“……뭐예요, 그게.”
예찬의 말은 지금 정의탁이 처한 상황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때때로 큰 안정감을 주었다.
과거 예찬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찬은 뒷말을 쉽사리 잇지 못하는 정의탁을 두고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 슬슬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범세혁을 꺾어 보려는 패기 넘치는 놈이 못할 게 뭐가 있겠냐.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힘내 봐.”
정의탁은 떨떠름한 얼굴로 예찬을 올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현에 딱 맞는 표정이었다.
“이거 지금 냉정하게 맞아요? 완전 따뜻한데? 따뜻하게였으면 대체 뭐라고 할 거였어요?”
예찬은 여전히 앉아 있는 정의탁을 향해 손을 내밀며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까지 부드럽게 꾸며낸 예찬이 자애롭게 말했다.
“의탁아,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 세혁이는 세혁이고 너는 너만의 매력이 있단다. 노래도 나는 네 노래가 더 좋고, 얼굴도…….”
“그만! 그만 해요! 너무 영혼 없잖아요, 형!”
정의탁이 질린 얼굴로 예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덧붙이자면 난 너를 센터로 추천한 거 후회 안 해. 우리 조에서 센터를 소화할 수 있는 건 너 아니면 우휘겸밖에 없는데…….”
예찬은 잠깐 우휘겸이 자고 있을 합숙소 쪽을 돌아보았다가 정의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하는 편이 내가 돋보이거든.”
예찬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본 정의탁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형, 되게 솔직하시네요.”
“네가 부담스럽게 솔직하게 굴길래.”
가슴에 무겁게 쌓아 뒀던 앙금이 좀 풀린 모양인지 떠오르는 해를 뒤로한 정의탁의 얼굴은 후련해 보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나란히 했다.
“제가 중간 점검 때처럼 실패하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도 후회 안 할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도 최선이라고 생각해야지.”
당연한 듯 말을 잇던 예찬의 발이 순간 멈칫했다.
처음엔 분명 정의탁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예찬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앞으로의 자신에게 하는 말같이 느껴졌다.
예찬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예전에는 결과가 잘못되면 리셋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지금 결과가 최선이라 믿고 나아갈 수밖에.’
어쩐지 한 꺼풀 무거운 껍질을 벗어 낸 기분이었다.
예찬의 말이 정의탁에게도 무언가를 생각하게 했는지 둘은 잠시 말없이 걷는 것에 집중했다.
합숙소가 가까워졌을 무렵 정의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동정받는 건 질색인데, 이건 나쁘지 않았어요.”
살짝 내려다보자 정의탁은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를 가볍게 걷어차고 있었다.
예찬은 그의 목소리에 스며 있는 쑥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번 건 동정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내가 보기엔 너, 더 잘할 수 있어. 그러니 나를 위해 더 잘해라.”
“아무도 그걸 동정으로 듣진 않을 거 같아요, 형.”
정의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연습으로 가득했던 이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1차 경연 날이 밝았다.
“다음 정의탁 연습생!”
새벽부터 경연장에 도착해 리허설을 끝낸 연습생들은 순서대로 메이크업에 들어갔다.
예찬은 얌전히 눈을 감고 메이크업을 받는 정의탁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잠깐 무어라 말을 건네려던 예찬은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넘어지느냐, 아니면 이겨 내느냐.’
그것은 오롯이 정의탁의 몫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집사 앤드류입니다. 우선 자리를 빛내 주신 공주님들께 감사드립니다.]옷을 갈아입고 대기실 의자에 앉기 무섭게 정면에 놓인 화면에 메인 MC가 등장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에 대기실 안의 공기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헉, 내 슬로건이다!”
“진짜? 부럽다!”
화면에 잠시 비친 관객들이 들고 있는 슬로건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본 연습생들이 흥분했다.
예찬은 등을 반듯하게 폈다.
[공주님들은 각 조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가장 훌륭했던 후보생의 이름에, 한 그룹이 끝날 때마다 가장 훌륭했던 조에 투표해 주시면 됩니다. 공주님들께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왕자 후보생과 조에는 1차 왕위 계승식에서 베네핏이 주어집니다.]MC 앤드류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차례차례 준비를 마친 연습생들이 대기실의 빈 의자를 채웠다.
정의탁이 시선이 막 대기실에 들어온 범세혁에게 향했다.
예찬은 그 눈빛이 예전처럼 가냘프게 흔들리지 않고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다고 느꼈다.
[그럼 당신의 왕자님의 손을 잡아 주세요!]MC의 말을 끝으로 무대가 어두워졌다.
연습생들이 일제히 곧 시작되려는 첫 무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대기실 문을 연 스태프가 외쳤다.
“‘시인의 숲’ 조 무대 뒤로 이동할게요!”
스태프의 말에 예찬의 옆에 앉아 있던 박나길이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보컬 3조까지 이동했으니 우리도 곧이네.”
“그러게요.”
예찬의 대답에 박나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는 안 떨려?”
“떨려요.”
“거짓말.”
“진짠데.”
예찬은 더없이 진실한 눈으로 박나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가늘게 눈을 뜨더니 숙였던 몸을 제자리로 돌렸다.
예찬은 앞의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꼬박 닷새 동안 연습한 모든 것을 단 4분 안에 전부 보여 주기 위해 연습생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본 프로그램인데, 직접 무대에 서려니 정말 다르네.’
묘한 감상에 젖어서 앞선 조들의 무대를 보고 있자 순식간에 두 조의 무대와 인터뷰가 끝났다.
“지우개 팀 이동할게요!”
스탭의 부름에 언젠가부터 합숙소에서 지우개 팀으로 불리고 있는 보컬 5조가 일어났다.
드디어 경연이었다.
[보컬 5조, 유피테르의 ‘Erased’, 빛나림 박나길 후보생, 김수영 후보생, PZ 기획 김주영 후보생, 우휘겸 후보생, 루벨 엔터 정의탁 후보생, 하예찬 후보생입니다.]“꺄아아아악!”
MC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선 네 조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이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예찬은 무대 뒤에서 보았던 자신의 이름이 적힌 슬로건을 떠올렸다.
박나길은 믿지 않았지만 예찬은 정말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고작 수십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길거리 버스킹을 했을 때도.
수만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콘서트장에서도.
그리고 지금 리모컨을 든 천여 명의 관객들이 기다리는 이 무대 위에서도 예찬의 가슴은 언제나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 기분은 평생 변하지 않겠지.’
간주가 나오기 시작하자 객석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예찬은 마이크를 조금 더 강하게 움켜쥐며 굽혔던 무릎을 세웠다.
[유난히 화창한 날이라 네 생각이 나.]연습 때보다 한층 더 완벽한 기량을 선보이며 박나길이 도입부를 열었다.
‘진짜 실전파라니까.’
이어지는 우휘겸은 한층 더했다.
[지나간 추억을 전부 눈부시다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이 자식도 실전파였냐.’
연습 때도 잘하던 놈이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우휘겸의 슬로건을 든 관객들은 거의 감격에 젖다 못해 쓰러질 기세였다.
이어지는 파트는 예찬의 차례였다.
빙글, 가볍게 한 바퀴 돈 예찬이 손을 뻗었다.
[너와 내가 사랑을 했던 것 그것만 남기고 싶어.]예찬도 어디서 연습보다 무대에서 못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자신의 파트를 마친 예찬이 다시 빙글 돌고 정의탁과 자리를 바꿨다.
[……Erased.]그리고 마침내 정의탁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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