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31)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31화
박마루가 포켓볼 경기에만 참여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포켓볼만 결승전이 끝나고 곧바로 MVP 선발과 시상식을 진행했다.
시상대 위에서 손을 흔드는 박마루를 지그시 바라보며 예찬은 생각에 빠졌다.
‘박마루에 대해선 알 만큼 알지만, 이번 회차에선 직접 대화해 본 건 딱 두 번밖에 없어. 아직 전화번호 교환도 안 했고, 말 그대로 안면만 튼 사이란 말이지.’
물론 데뷔를 해서 박마루와 마찬가지로 아이돌 신분인 지금, 번호 정도야 얼마든지 요령 좋게 알아낼 수 있다.
‘여차하면 김대훈도 있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아낸 번호로 연락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을까?
‘흠, 깔끔하게 차단당하겠군.’
그렇다면 박마루가 퇴근하기 전에 번호를 얻어 낸 후, 천천히 거리를 좁힌 다음에 말을 꺼내는 건 어떨까?
‘너무 오래 걸려. 아무리 병세가 금방 악화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어머님 쪽도 어머님 쪽이지만, 나도 분명 신경 쓰느라 지친다. 그리고…… 박마루와 친해지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였다.
* * *
“꿈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꼭 선배님께 말씀드려야 될 거 같아서요. 세상엔 예지몽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박마루가 반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예찬이 멀어진 거리 이상으로 간격을 좁혔기에 무의미해졌다.
박마루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꿈이요? 꿈 좋죠. 저도 꿈 좋아합니다, 하하. 그런데 제가 지금 아주 쪼끔 바빠가지고요. 다음에 얘기해도 될까요?”
누가 봐도 다음은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예찬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상당히 음험한 눈웃음이 완성되었다.
“5분 내로 빠르게 요약해서 말씀드릴게요.”
“아하하…… 아까 화장실에선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이렇게 갑자기 제 꿈을 꾸셨다고 하니까, 솔직히 조금 당혹스럽네요.”
대충 둘러대고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박마루가 정직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예찬은 멈칫하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그 후에 꿨거든요.”
“그 후예요? 어, 그러니까 제가 그쪽 멤버랑 결승전을 하는 사이에?”
“네.”
박마루의 얼굴에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고 쓰여 있었으나 예찬은 가볍게 턱을 치켜들었다.
원래 이런 건 당당한 놈이 이기는 거다.
“저기 하예찬 씨, 진짜로 이런 거 불편하거든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박마루가 말 그대로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호소해 왔다.
호칭에는 성까지 붙었다.
‘과하게 순조롭군.’
시작하자마자 도망칠까 봐 훈훈하게 접근했음에도 예상 이상으로 질색하는 박마루의 모습에 예찬은 빠르게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예찬의 조언으로 어머니의 병을 발견하게 되어도 감사는 할지언정, 사람 대 사람으로 엮이고 싶지는 않으리라.
‘원래는 좀 더 묘하게 쎄한 인상을 주려고 했는데.’
더 나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예찬이 입을 열었다.
“박마루 선배님.”
“네?”
단호한 어투로 주의를 끈 예찬은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생각해 둔 문장을 주르륵 읊었다.
“제 꿈에 선배님 어머님이 나오셔서 건강 검진을 받으셨는데 유감스럽게도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해서 무척 상심하셨습니다. 분명 동네 병원에서 격년으로 건강 검진을 받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동네 병원이 심각한 돌팔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지금 시점에선 완치 가능해서 치료를 받으시고 부군과 해외여행을 가시는 모습까지 보고 꿈에서 깼는데요, 꿈인데도 너무 현실감이 넘쳐서 이걸 선배님께 전하지 않으면 찜찜함에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
예찬의 눈이 계산적으로 만들어 낸 광기로 번들거렸다.
갓 데뷔한 후배에게 완전히 압도된 박마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배님은 어떠세요? 제 꿈 이야기, ‘개꿈이구나’하고 그냥 넘기실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의미심장하게 말을 끝마친 예찬은 예리하게 박마루를 살폈다.
박마루는 주먹을 꾹 쥔 채 입술을 질겅거리고 있었다.
‘고민하는군.’
그냥 개소리라고 치부하기엔 부모님이 동네 병원에서 격년으로 건강 검진을 받는 걸 알고 있으니 찝찝할 터였다.
‘더 찜찜해해라. 그리고 건강 검진을 잡아.’
사실 박마루의 부모님 성함을 포함해 더 세세한 부분까지 말하면 좀 더 신빙성을 더할 수 있었겠지만, 예찬은 굳이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지금도 살짝 아슬아슬한데 이보다 더하면 괜히 스토커로 오해하거나 신내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이 정도 했으면 박마루 성격에 7할, 아니, 8할 이상은 건강 검진을 잡는다.’
물론 딱 이틀간 기다려 보고 그때까지도 건강 검진을 안 받은 것 같으면, 이다음엔 스토커도 감히 알기 어려울 만큼 더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얘기 들었으니까 이제 가도 되죠?”
“네, 선배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찬은 다시금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선량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어째서인지 박마루는 더 질색한 얼굴로 황급히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 * *
“예찬이 너!”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온 예찬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이경이었다.
“저 뭐요?”
“아까 상 받을 때 나 안 봤지.”
“아.”
‘예리하긴.’
그럴 줄 알았다며 툴툴거린 선우이경은 지금이라도 제대로 봐 두라며 금메달과 MVP 트로피를 흔들어 보였다.
“자, 어서 칭찬해.”
“와아, 멋있다.”
영혼 없는 칭찬에도 선우이경은 으쓱했다.
메달을 목에 건 선우이경이 외쳤다.
“더!”
시상식은 물론 결승전에도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게 살짝 미안했기에, 예찬은 저 이상한 억지에 조금 맞춰 주기로 결심했다.
‘남은 하루는 제대로 집중해야지. 박마루는, 잊자……!’
이내 영혼 없는 목소리에 박수가 더해졌다.
“이경이 형 최고다.”
“더!”
“전아체의 MVP, 전아체의 팅커벨, 전아체의…….”
“얘들아, 육상 개인 준결승 시작한대. 얼른 가자.”
기가 찬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구경하던 심상록이 단호하게 등을 떠밀었다.
육상 트랙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무렵, 예찬은 선우이경을 향해 말했다.
“이경이 형은 이제 더 참여할 게 없는 거네요.”
“응, 그래서 지금부턴 응원 요정 하기로 했어.”
“자기 입으로 요정이라니…….”
예찬이 하고 싶었던 말을 정의탁이 대신해 주었다.
“뭐라고? 의탁이가 응원 요정에게 허그를 받으면 1위도 거뜬하다고 했다고?”
“뭔 소리예요! 그리고 저는 예선 탈락해서 어차피 1위 못 하거든요?”
“뭐라고? 의탁이가 예선 탈락의 슬픔을 응원 요정의 뜨거운 뽀뽀로 잊고 싶다고 했다고?”
“악! 왜 진화했어요! 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고요! 예찬이 형, 살려 주세요!”
입술을 쭉 내밀고 달려드는 185cm의 청년을 피해 정의탁이 엉덩이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서 달아났다.
자세는 좀 우스웠지만 속력은 제법 굉장했다.
“저렇게 뛰었으면 예선 통과했을 텐데.”
예찬은 옆에서 심상록이 정말로 안타깝단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한 척했다.
‘이 팀엔 정상이 없어, 정상이. 역시 내가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수밖에…….’
멤버들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칠 생각이었으나 예찬은 진지했다.
* * *
준결승은 예선과 달리 각 조의 3등까지가 결승에 진출했다.
[배새벽 선수, 이번에도 빠릅니다!] [선수들, 순식간에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1위는 레굴루스의 배새벽 선수! 2위는 마찬가지로 레굴루스의 강해솔 선수! 1위인 배새벽 선수와 정말 미세한 차이였네요! 마지막으로 3위는 건곤감리의 감 선수입니다!] [세 선수 다 엄청나게 빨랐죠. 그야말로 결승전을 방불케 하는 경기였습니다!] [말씀하신 순간, 기록이 공개됩니다! 아, 배새벽 선수! 오늘 예선에서 이미 갱신한 전아체 최고 기록을 여기서 또다시 갱신합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강해솔 선수의 기록도 배새벽 선수가 아니면 전아체 최고 기록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죠!] [레굴루스, 정말 이번 대회의 다크호스입니다!]첫 번째 경기에서 배새벽과 강해솔이 각각 1등과 2등으로 결승 진출을 확정 지었다.
“와, 미쳤다! 진짜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
“발이 안 보였어요!”
“새벽이 다리에 무슨 모터 달렸어?”
오랜 시간 계속된 촬영에 지칠 만도 한데 시합에 나간 멤버도, 응원석에 있는 멤버도 누구 하나 힘이 빠진 사람이 없었다.
대기석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을 향해 환호하는 멤버들 틈에서 예찬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전에 우리 팀만 셋 있겠는데?”
예찬과 다른 멤버들도 동의했다.
예선에서 채은성이 워낙 잘 뛰었기에 선우이경이 이렇게 설레발을 칠 만했다.
‘셋이 금은동 나란히 받으면 볼 만하겠는데.’
예찬도 자연스럽게 시상대에 올라간 세 사람을 떠올렸다.
“앗, 시작하려나 봐요!”
정의탁의 목소리에 상상만으로 뿌듯한 시상대를 머릿속에서 지운 예찬이 고개를 들었다.
[준결승 두 번째 조 시작했습니다! 선수들 스타트 좋은데요!] [네, 선두는 레굴루스의 채은성 선수!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어?!]중계진의 소리와 함께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겹쳤다.
“채은성!”
“은성아!”
“은성이 형!”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레굴루스 멤버들이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은성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심각한 얼굴로 자기 발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트럼프의 조커 선수가 1위로 들어왔습니다.] [레굴루스의 채은성 선수와 블랑딕스의 강우 선수는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요. 심각한 부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아, 강우 선수가 미끄러지면서 채은성 선수도 같이 넘어져 버렸죠.]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요. 이런 사고가 매년 일어나는데도 왜 개선이 안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요. 어차피 이런 얘긴 방송에 안 내보내겠죠.] [시, 시우 씨……?]황시우의 성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체육관에 퍼졌다.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예찬은 조심스럽게 채은성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일어날 수 있겠어?”
“……일어나기 무서워.”
혹시 일어나려고 했는데, 일어날 수 없을까 봐.
채은성이 생략한 뒷말이 어째서인지 선명하게 들렸다.
채은성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당장 나흘 뒤가 컴백인데…….’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채은성뿐만 아니라 예찬을 포함한 멤버들도 다들 무서운 것이다.
예찬은 괜히 다친 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일단 체중을 우리한테 기대서 일어나 보자. 의무실까지 갈 수 있는 상태인지 한번 보게. 범세혁, 같이하자.”
“어어, 알겠어! 은성아, 내 어깨에 팔 걸쳐 봐!”
초조하게 눈만 깜빡거리던 범세혁이 예찬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다가왔다.
“으응…….”
채은성이 한쪽 팔을 범세혁에게 걸친 것을 확인한 예찬이 나머지 팔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선우이경이 끼어들었다.
“나랑 세혁이가 키가 비슷하니까 내가 할게.”
예찬은 별다른 말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두 사람에게 체중을 지탱한 채은성은 가볍게 바닥에 발을 대 본 뒤, 다소 안도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의무실로 가자.”
“저기…… 팬석에 들렀다가 가면 안 돼?”
의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던 예찬이 고개를 돌렸다.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채은성이 웅얼거렸다.
“팬들이 걱정하고 있을 거 같아서…… 괜찮다고 말해 준 다음에 가고 싶은데…….”
차마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눈앞의 이 멀대같이 커다란 놈이 기특하고 안쓰러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