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47)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47화
“뭐, 사람 사는 데 이런저런 일도 있는 거지! 서로 돕기도 하고! 하하하!”
은인의 은밀한 비밀을 지켜 주기 위해 박마루는 대충 사정을 얼버무리고 호쾌하게 웃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박마루가 지금처럼 목젖이 다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같이 웃고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정찬양은 대부분의 사람에 속하지 않았다.
“하하…… 하…….”
정찬양이 떫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흘겨보자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 음…… 미안. 예찬 씨의 프라이버시랑 관계가 있어서.”
명백히 선을 긋는 발언에 정찬양은 코웃음을 쳤다.
“예찬 씨라고 부르는 주제에 무슨…….”
“뭐?”
“괜히 착각하지 마. 넌 하예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팬들 사이에서 선량하기 그지없다고 칭송받는 정찬양의 눈매가 전에 없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말도 안 되는 유대감 같은 거 갖지 말라고.”
제 할 말만 멋대로 쏟아 낸 정찬양은 그대로 거실을 벗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정찬양의 모습에 숨을 멈춘 박마루는 현관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황당함에 헛숨을 들이켰다.
“방금 뭔데? 설마…… 질투?”
정찬양이 하예찬을?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박마루의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정찬양이 박마루를?
‘내가 하예찬 씨랑 가까워 보여서 찬양이가 질투를 한다? 이것도 말도 안 되는데.’
그렇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어쩐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이상한 하루였다.
* * *
– 넌 정말 오지랖이 넓구나.
정찬양에게 문자가 한 통 날아왔다.
내용을 확인한 예찬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화면을 껐다.
‘시답잖기는.’
아마 박마루 어머니가 건강 검진을 받았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모양이다.
‘아직 연락은 하고 지내는 건가? ……하긴, 딱히 연락을 안 해도 박마루 SNS를 보면 모르기 어려울 정도지.’
그쪽이 비즈니스 식 친분을 유지하든, 아니면 아예 남남으로 지내든 더 이상 예찬과 상관없는 일임에도 역시 신경이 쓰였다.
‘그래, 나 오지랖 넓지. 한 오지랖 해. 아주 오지랖이 태평양 수준이라고.’
쿨하게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박마루의 어머니를 비롯해 여전히 리스피릿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오지랖이 넓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찬양이 독니를 드러내고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 예찬의 것을 그대로 꿀꺽 삼켜서 화가 났던 때와는 또 다르게 신경이 쓰였다.
인류애적인 감정으로 말이다.
‘하예찬, 인간미 있고 좋네.’
공허한 눈을 하고 숙소 거실 소파에 늘어져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예찬의 뺨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수분 보충하고 얼른 자야지.”
내일도 광고 촬영이 있지 않냐며 선우이경이 생글생글 웃었다.
예찬은 대답 대신 받은 물잔을 원샷으로 넘겼다.
“오우, 예찬이 터프한데.”
선우이경의 감탄에 스타가요에서 받아 온 1위 트로피를 뽀득뽀득 닦던 채은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분 좋을 만하죠. 무려 리스피릿의 박마루 선배님이 직접 찾아와서 앨범을 받아 가신 데다가 SNS에 홍보까지 해 주셨으니……!”
채은성의 눈이 어김없이 시기와 질투로 타올랐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예찬은 채은성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투지를 말랑하게 만들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보단 우리 복숭아들을 나흘 연속 만난 게 크지. 복숭아들 덕분에 1위 트로피도 또 받았고.”
“……맞아! 정말 봐도 봐도 짜릿해, 최고야, 사랑스러워!”
순식간에 얼굴색을 바꾼 채은성이 꿈이라도 꾸듯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장식장에 넣으려던 오늘 자 트로피는 품에 꼬옥 끌어안은 채였다.
“피치 이즈 러브…….”
‘쉽구만.’
완전히 복숭아 앓이 모드에 들어간 채은성을 흐뭇하게 바라본 예찬은 다시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다.
* * *
한 주의 시작을 일요일과 월요일 중 어느 쪽으로 보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예찬은 월요일을 한 주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한 주의 시작이자 이번 주 중에 유일하게 음악 방송 촬영이 없는 월요일.
레굴루스 멤버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 ‘현재’의 새로운 모델로서 촬영을 이어 가고 있었다.
‘베스트셀러인 세단류는 아니고 MUV(Multi-Utility Vehicle)모델이지만.’
그래도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그룹이 대한민국 굴지의 자동차 회사 모델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니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실제로 몰아 보니 어떻던가요?”
“어우, 말하면 입만 아프죠.”
“역시 그렇죠? 하하하!”
촬영 중간의 쉬는 시간, 현재의 담당자가 선우이경과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옆에는 이번 광고의 광고 대상인 9인승 MUV 스타레이가 당당히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참고로 레굴루스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뽑힌 이 자동차와 제법 낯이 익었다.
왜냐면 숙소와 연습실을 오고 갈 용도로 선우이경이 뽑아 온 자동차가 바로 이 스타레이였기 때문이었다.
촬영 시작 전, 담당자는 실제로 이 차를 타고 다니는 사진을 보고 윗선에서 레굴루스를 모델로 점찍었다고 말했다.
홈마들이 찍은 사진 속 스타레이와 잘생긴 청년들의 조합이 무척 좋았다나 뭐라나.
이번 인선에 큰 공을 세운 선우이경의 등은 평소보다 묘하게 위풍당당했다.
‘얼마든지 그래도 좋을 만큼 훌륭한 공이긴 하지.’
팀 내 분위기 메이커 중 하나인 선우이경의 컨디션이 하늘을 찌르자, 당연히 멤버들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촬영장의 분위기도 좋았다.
예찬은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웃음꽃이 피어오르는 현장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멤버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웃고 있지만 어쩐지 인상이 흐릿하게 느껴지는 심상록이 있었다.
‘요새 좀 맥을 못 춘단 말이지.’
그렇다고 대놓고 기운이 빠져 있다거나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형편없게 구는 일은 또 없다.
그냥 평소의 심상록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보 물러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야 컨디션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무 말 안 했지만…… 좀 오래가는 거 같지?’
일이 바쁘게 몰아쳤던 지난 추석 연휴 이후로 계속 저 상태였다.
눈치라곤 지구 내핵에 박아 넣은 범세혁을 제외하면 다들 이상함을 눈치채고 예찬을 한 번씩 찔러 봤을 정도였다.
– ……상록이 형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심지어 그 배새벽마저…….’
며칠 전 2층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와 귓속말을 하던 배새벽을 떠올린 예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멤버들은 아직 긴가민가하는 수준이지만 예찬은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긴 해.’
멤버들 못지않게 팬들의 눈 또한 예리한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촬영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예찬은 심상록과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심상록이나 예찬이나 샤워를 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으니까.
“예찬아, 잠깐 시간 괜찮아?”
“어…… 네.”
그런 예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심상록이 먼저 예찬을 불러 세웠다.
촬영장에서와 달리 얼굴에 그늘이 대놓고 져 있는 것이 어디로 보나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예찬에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을 보면 본인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고, 해결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다행이군.’
당사자가 말하기 꺼려 한다면 잊고 지내던 ‘파티원 기억 여행권’이라든지 ‘파티원 마음 읽기권’ 등의 스토커 세트의 힘을 빌려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거 쓰면 솔직히 뒷맛이 안 좋을 것 같단 말이야. 진짜 스토커 같다고.’
예찬은 어두운 얼굴의 심상록을 떠밀어 멤버들의 출입이 드문 보조 주방으로 들어갔다.
“와, 여기 분명 우리 숙소인데 되게 오랜만에 들어온 것 같다. 처음에 신 PD님이랑 인터뷰를 여기서 했던 거 같은데.”
끔찍한 요리 실력 때문에 멤버들에게 주방과 거리 두기를 부탁받은 심상록에겐 그 옆에 딸린 보조 주방은 더더욱 낯선 공간이었다.
예찬은 추억에 젖은 심상록을 아주 잠시만 내버려 두었다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뭐가 문제예요?”
“……예찬이는 변한 게 없구나.”
빠르고 시원시원해서 좋다며 심상록이 기운 없이 웃었다.
심상록의 말에 예찬은 과거 늦은 밤, 무인 카페에서 마주 보고 앉았던 일을 떠올렸다.
초조함에 사로잡혔던 심상록은 막연한 고민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예찬에게 전화를 걸었고, 예찬은 심상록의 동네까지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한 팀으로 묶였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비슷한 듯 달랐다.
머뭇거리던 심상록이 이내 입을 열었다.
“음, 너도 이미 눈치챈 거 같긴 한데…… 내가 요즘 좀 집중을 못 하고 있어.”
‘그땐 전화는 심상록이 먼저 걸었지만 내가 먼저 만나서 얘기하자고 판을 깔았는데, 오늘은 알아서 술술 얘기를 한단 말이지.’
지난 반년 동안 나름대로 예찬에 대한 믿음이 더 견고해진 것 같아 안도하고 있을 때, 심상록이 본론을 꺼냈다.
“사실 이번 추석 때 촬영하느라 다들 본가에 못 갔잖아.”
“네, 그랬죠.”
멤버들이 본가고 뭐고 없는 예찬의 눈치를 쓸데없이 살피느라 숨어서 부모님과 연락하던 걸 몇 번 발견했던 기억이 났다.
심상록 또한 예찬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민망해 보였다.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마음이 좀 안 좋으신 거 같아서.”
‘어머니라면 새어머니?’
숨기고 싶어 하는 눈치기에 깊이 파고들지 않고 넘어갔던 심상록의 가정사가 떠올랐다.
이야기 좀 하자고 선뜻 말을 꺼낸 것치고 굉장히 망설이던 심상록은 입술을 한 번 질끈 깨물더니 드디어 본론을 들이밀었다.
“이번 활동 끝나면…… 잠깐 휴가를 받을 수 있을까?”
뜸을 들인 것치고 생각보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 예찬은 불길함을 느꼈다.
“잠깐이라면 어느 정도요?”
“그…… 두 달, 은 미친 소리겠지?”
“미친 소리죠.”
일 단위가 아니라 달 단위가 튀어나오자 예찬은 진심으로 정색해 버렸다.
‘미친 거 아니야?’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된 아이돌이 달 단위로 장기 휴가를 받는다니.
예찬의 기준으론 앞으로 뜰 마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매년 새로 데뷔하는 아이돌 팀만 수십이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활동 중간중간 한 주 정도 쉬는 것 외에 5년, 6년 차가 될 때까지도 제대로 된 장기 휴가 없이 달리는 아이돌들이 태반이었다.
‘좀 떴다고 군기 빠졌나? 고작 반년 만에?’
자신의 안목을 고민하던 예찬의 눈에 심상록의 환해진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지금 활동 끝나면 11월인데 그때부턴 연말 시상식 준비도 해야 하고, 계속 바쁠 텐데 휴가는 무리지.”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 역시 안 될 말이라며 안도하는 것은 뭐 하는 플레이일까.
– 활동에 문제만 안 생기면 참견할 필요가 없지.
예찬은 잠시 이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멤버의 가정사에 굳이 머리를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건 아무래도 덮어 놓는다고 능사가 아닐 것 같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예찬은 삐딱하게 턱을 당기고 벽에 등을 기댔다.
“상록이 형, 저랑 터놓고 얘기 좀 하시죠.”
“으응?”
아무래도 단호하게 튀어 나간 목소리 못지않게 표정도 살벌했는지 마주 보고 있는 심상록의 얼굴이 조금 파랗게 질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