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58)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58화
‘Thanks to’란 앨범을 만들며 고마웠던 이들에게 인사하거나 작업 후기를 짧게 남기는 것으로, 앨범 안에 들어가 있는 포토북에 함께 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찬은 언제나 ‘thanks to’ 분량의 9할 이상을 팬들을 향해 쓰곤 했다.
지금까지 나온 두 앨범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이번엔 팬들에게 할애하고 남은 1할에 ‘thanks to’를 빌려 가정사를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쓰면 되겠지.’
호적으로 묶였지만 여전히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길 없는 형은 아예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건 내 원래 부모님을 생각하고 쓰면 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선 진짜 아는 것도 없고 할 말도 없다…….’
‘Thanks to’에서 가족을 언급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으나, 가정사가 평범하지 않다 보니 앨범이 발매되면 이슈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기에 멤버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싶었다.
예찬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강해솔이었다.
“뭐라고 쓸지도 정한 거야?”
“응, 너무 무겁지 않게 스치듯이 쓰려고. 마침 연말이기도 하니까 가족 얘기를 해도 뜬금없게 느껴지진 않을 거 같아.”
“하긴.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정석이니까.”
기념일에 절대 집에 붙어 있을 것 같지 않은 선우이경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면 우리도 가족 이야기를 써 볼까?”
가만히 듣고 있던 심상록도 입을 열었다.
“다들 자기 ‘thanks to’에 한 줄씩 가족 이야기를 하면 더 위화감이 없을 거 같은데. 어때?”
“좋아요!”
다른 멤버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여기까진 예상하지 못했는데.’
상상보다 더 협조적인 태도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 * *
10월 중순이 넘어가자 본격적인 연말 시상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신인의 경우 아예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올해 데뷔한 신인 중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둔 레굴루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11월 중순부터 내년 2월까지 시상식이 계속 이어지기에 준비해야 할 무대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럼 레슨을 한동안 쉴까?”
“…….”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멤버들을 안쓰럽게 여긴 매니저의 제안에 누구 하나 그러겠다고 입을 열지 않았다.
“……너희들, 안 쉬어도 진짜 괜찮겠어?”
“네.”
전부 터무니없는 욕심쟁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불이 붙기 시작한 것 같은데 쉬고 싶지 않은 거지.’
“……휴, 너희 고집을 어떻게 꺾겠어. 그래도 너무 힘들면 바로 그만두는 거다?”
“네!”
주는 대로 먹다 보니 살이 너무 붙었다고 투덜거리던 정의탁의 불평도 해쓱해진 볼살과 함께 쏙 들어갔다.
멤버 전원이 파리한 안색에 형형한 눈빛을 달고 매일 회사에 오고 가던 중, 예찬은 간만에 촬영을 위해 방송국 스튜디오로 출근을 했다.
“예찬이는 ‘알메겐’ 촬영 정말 오랜만이지?”
“네.”
여전히 차에 타자마자 잠에 빠지는 배새벽을 신기한 듯 쿡쿡 찌르고 있던 예찬을 향해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가 말을 걸었다.
한때 대한민국을 열광케 했던 육아 예능 알콩 메이커의 오디오 코멘터리 ‘알콩 메이커, once again’은 지난여름부터 변함없이 순항 중이었다.
처음엔 이서후와 배새벽도 고정 패널로 참여했지만 이후 두 사람 모두 스케줄이 바쁠 땐 들쑥날쑥하게 출석하고 있었다.
예찬을 비롯한 레굴루스 멤버들도 돌아가면서 두어 번씩 녹화에 참여했었다.
참고로 오늘 녹화에 참여하는 멤버는 예찬과 배새벽, 그리고 채은성이었다.
“은성아, 너무 떠는 거 아니니?”
“아, 괘, 괜찮습니닷!”
“…….”
채은성은 PD에게 연락까지 해 가며 원래 오늘 촬영에 참여할 멤버였던 범세혁과 순서를 바꾼 이후 계속 저 상태였다.
긴장한 건지 흥분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물들었다가, 파랗게 변하기까지 하는 둥 바빠 보였다.
‘이유가 뻔히 보여서 짜증 나네.’
촬영장에 도착해 먼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돌리고, 고정 패널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을 찾았다.
“둘, 셋.”
“빛나는 당신의 별! 안녕하세요, 레굴루스입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어, 예찬이 오랜만이네.”
“은성이는 지난주에도 나오지 않았어?”
패널들의 아는 척에 채은성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는 무슨.’
패널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잠시 멀쩡해졌던 채은성은 저 멀리서 오늘의 게스트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고장이 났다.
“헉! 어, 어떡하지? 나 혹시 떨고 있어?”
“어.”
“네.”
예찬과 배새벽의 성의 없는 대답이 겹쳤다.
그사이 복도 끝에 서 있던 선배들이 표정까지 선명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예찬은 두 선배에게 인사하기 위해 이번에도 먼저 구호를 외쳤다.
“둘, 셋.”
“빛나는 당신의 별! 안녕하세요, 레굴루스입니다!”
“……삧, 나는 당신의 별!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
“헙! 아니, 레굴루스입니다!”
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채은성이 급하게 자기 입을 틀어막고 뒷말을 정정했다.
그러나 예찬의 썩어 버린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내숭 떨 필요가 없는 놈들만 모여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진짜 이 자식을 어떡하지.’
역시 범세혁을 데리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예찬이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좀 더 앞쪽에 서 있던 선배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럼 팬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 아, 아니요! 팬도 맞는데! 저 진짜 팬이거든요?”
“알아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기, 기억해 주신 건가요!”
“그럼요.”
선배 정찬양이 웃으며 채은성을 향해 악수를 청하듯 손을 뻗었다.
“오랜만이에요, 은성 씨.”
“여, 영광입니다!”
채은성은 믿기 어려울 속도로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더니 정찬양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예찬은 더더욱 썩은 표정으로 채은성이 꼭 붙잡고 있는 손을 흘겨보았다.
‘뭐 하자는 거지?’
조금 전까진 정찬양과 같이 예능에 나오는 건 처음이라며 덜덜 떠는 채은성이 짜증 났는데, 지금은 그 짜증들이 완전히 정찬양을 향했다.
‘왜 남의 집 애한테 찝쩍거려.’
이전에 마주쳤을 때는 보이지 않던 행동이라 더 거슬렸다.
“크흠.”
그때 옆에서 나머지 선배 쪽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일단은 선배인 박마루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오랜만입니다, 예찬 씨.”
눈이 마주치자 묘하게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눈을 찡긋거리는 것이 나름대로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웃긴데.’
예찬은 이 자리에 카메라가 없는 것이 살짝 아쉬웠다.
* * *
“배알콩이 이거 좀 먹어 봐라.”
“새벽이 너, 그새 키가 컸니? 뭔가 더 커진 거 같은데.”
“말라서 그래, 말라서. 떼잉. 애 밥도 제대로 안 먹이고 뭐 하는 거요, 매니저 양반.”
“아하하하…….”
촬영 중간의 쉬는 시간.
고정 패널들의 귀염둥이가 된 지 오래인 배새벽과 매니저는 완전히 저쪽에 잡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쪽은…….’
“그 앨범을 처음 듣고 정말 트랙 리스트까지 이렇게 짜다니, 이 앨범을 만든 사람은 천재구나, 그렇게 감탄했거든요…….”
“응, 그랬군요. 그래서요?”
“그래서 다른 앨범도 전부 사서…….”
잔뜩 흥분한 얼굴로 동경의 대상에게 자신의 덕질 기록을 들려주고 있는 채은성과, 그걸 흐뭇하단 얼굴로 오냐오냐 들어 주고 있는 정찬양이라는 환장의 커플이 탄생해 있었다.
‘집에 가고 싶네.’
보는 눈이 많은 스튜디오 안이다 보니 마음껏 인상을 찌푸릴 수도 없어서 곤욕이었다.
“큼, 큼.”
그 와중에 오늘 몇 번째 들었는지 모를 헛기침 소리까지 가세했다.
이야기에 푹 빠진 채은성은 들리지 않을 게 뻔했고 정찬양은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았다.
“…….”
“크, 흠……?”
“…….”
“크흐흠! 커흠! 커어어어어흐음!”
‘어쩌라고.’
꿋꿋이 모른 척을 하던 예찬이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박마루가 양쪽 눈을 바보같이 찡긋거렸다.
제 딴에는 윙크로 신호를 보내려는 것 같은데 결과물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윙크도 못 하는 게.’
예찬의 떨떠름한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박마루는 문 쪽을 향해 한 번 더 찡긋거리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은 절대 알아듣지 못할 기괴한 눈짓이었으나, 미우나 고우나 얽힌 세월이 긴 예찬에겐 따라오라는 뜻이 명백히 전해졌다.
한숨을 내쉰 예찬은 채은성의 어깨를 짚었다.
“선배님, 그 곡이…… 어, 찬. 왜?”
“나 잠깐 화장실.”
“늦지 말고 오너라.”
건방지게 대답하는 채은성의 어깨를 살짝 힘주어 쥔 예찬은 박마루가 빠져나간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 자식은 또 어디 갔어?’
막상 복도로 나오자 개미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그때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작은 소리가 귓가에 거슬리게 웅웅댔다.
“예찬 씨―.”
‘모기 소리?’
“예찬 씨이이―.”
‘아니, 내 이름인데?’
“예찬 씨, 여깁니다, 여기―!”
소리가 난 방향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소품실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그 커다란 덩치로 웅크리고 있던 박마루가 잽싸게 다시 문을 닫았다.
예찬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우리의 만남은 비밀이니까요.”
박마루는 이번에도 윙크 대신 양쪽 눈을 깜빡거리며 검지로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인지.’
원래 나사 빠진 놈인 건 알았지만 상태가 심각했다.
* * *
박마루와 예찬이 스튜디오를 빠져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정찬양의 태도가 묘하게 바뀌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채은성은 겉으론 리스피릿의 덕질을 했던 이야기를 여전히 최선을 다해 늘어놓으며 속으로는 고민에 빠졌다.
“아아, 그랬구나.”
생긋생긋 웃으며 이야기를 받아 주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영혼 없이 대충 추임새를 넣는 게 느껴졌다.
‘너무 내 얘기만 했나?’
자기 얘기에 취하면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는 지적은 예전부터 많이 받았다.
고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제 나름대로 노력한 결과, 츄즈 마이 프린스 촬영 때는 나름대로 과묵한 캐릭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24시간 붙어 있는 레굴루스 멤버들이 워낙 이야기를잘 들어 주는 덕에 다시 버릇이 되돌아온 상태였다.
‘선배님이 좋아하실 만한 주제가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한 채은성이 입을 열었다.
“음, 찬양 선배님은 요새 자주 듣는 음악이 있으신가요?”
만회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정찬양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채은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예찬 씨를 ‘찬’이라고 부르던 것 같은데, 맞나요?”
“아, 네.”
주제와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채은성은 개의치 않았다.
정찬양의 눈에 흥미로움이 진하게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친한 것 같아서 부럽네요.”
“어, 네, 그렇죠…….”
채은성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아마 같은 말을 레굴루스 멤버들이 했거나, 옆에 예찬이 있었다면 무슨 소리냐고 길길 날뛰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예찬과 자신이 남들이 보기에 친해 보인다니…….
사실 기분이 꽤 좋았다.
정찬양은 조용히 눈을 내리깐 채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는 채은성을 더없이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표정을 바꾸고 친밀하게 말을 걸었다.
“별명이라니, 정말 돈독한 사이 같아서 부럽네요. 아, 그렇지. 은성 씨, 제 이름에도 ‘찬’ 자가 들어가는데 저도 그렇게 불러 줄래요?”
채은성이 그러하겠다고 답하면 정찬양과 돈독한 사이가 될 거라는 의미가 은근히 묻어났다.
부탁하는 모양새를 빌렸으나 당연히 승낙할 거라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찬양의 말을 듣고 정확히 눈을 세 번 깜빡거린 채은성이 대답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