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66)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66화
“으헉…… 자, 잠깐만 쉬었다가 가요…….”
“의탁이 나이스 타이밍. 와, 진짜 한 걸음만 더 뗐다가는 토할 뻔…….”
정의탁의 간절한 애원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고 있던 멤버들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두 곡을 연달아 미친 듯이 불태웠더니 대기실까지 걸어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휴, 얘들아 고생 많았어.”
“형들이 좀 업어 줄까?”
매니저들은 그런 멤버들을 기특하다는 듯 다독였다.
예찬은 리더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벽에 기댄 채 복도에 널브러진 멤버들을 훑어보았다.
‘새삼스럽지만 아드레날린이란 무섭네.’
극도의 흥분으로 한계점을 넘은 채 무대를 이어 간 것이다.
‘덕분에 무대는 잘 나왔지.’
“와, 진짜 너희 너무한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춤을 춰?”
한참이나 숨을 고른 끝에 선우이경이 황당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심상록이 드물게 눈을 흘겼다.
“사돈 남 말한다는 말을 알고 있니, 이경아?”
“……말할 기운이 생겼으면 일단 대기실로 가죠.”
벽을 짚고 서 있던 예찬이 허리를 펴자, 멤버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기실로 돌아온 멤버들을 반긴 것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스타일리스트들이었다.
“예찬이랑 의탁이는 땀 별로 안 났지?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
“휘겸이는 이쪽!”
“해솔아, 새벽아! 이리 와 봐!”
무대 의상을 입고 시상대에 오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레드 카펫에서 입었던 정장도 있고, 수상까지 시간도 있으니 갈아입기로 정해 둔 상태였다.
대기실에 설치된 모니터를 확인하자 벌써 첫 번째 상은 시상이 끝났는지 MC들이 축하 멘트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올해 뛰어난 활동을 보여 준 ‘투데이 아티스트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시상에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는 배우 최호현 씨와, 런웨이를 주름잡는 슈퍼 모델 배도영 씨가 수고해 주시겠습니다.]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 이번 시상식에 참여하는 가수의 반 이상에게 주는 ‘뿌리는 상’이다.
시상식 중간중간 서너 번에 걸쳐서 나눠 주는 상이니, 방금 무대를 마친 레굴루스는 다음이나 그다음 차례에 받게 될 것이었다.
[투데이 아티스트상, 그 네 번째 수상자는…… 제가 이분들께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네요. 리스피릿, 축하드립니다!]흰 정장을 맞춰 입은 리스피릿 멤버들이 손을 흔들며 시상대에 나타났다.
‘얼씨구. 졸았냐?’
카메라 화면에 크게 잡힌 정찬양의 얼굴엔 미처 숨기지 못한 피로가 묻어났다.
아주 일순간이었으나 예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저 미친놈, 진짜로 솔로 앨범 준비하고 있나 보지?’
그러나 예찬이 속으로 뭐라고 씹어 대는지 알 리 없는 정찬양은 준비해 온 소감을 읊을 뿐이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렇게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무척 기쁘네요. 변함없이 저희를 응원해 주신 리바디께 무엇보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정찬양의 소감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상을 한두 개 받아본 놈이 아니니 그럴 만했다.
그러나 예찬만큼은 그리 길지 않은 소감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변했군.’
이미 과거에 없던 앨범을 내고, 과거에 하지 않았던 활동을 한 시점에 무슨 뒷북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정찬양은 예찬이 과거 더리얼 뮤직 어워즈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소감은 평범하고 무난했지만 정찬양 자신이 생각해 낸 소감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과거 예찬이 읊었던 말을 그대로 옮긴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정찬양이 예찬이 참여했던 활동에서 예찬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 몇 마디 다르게 한다고 그게 제 인생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의 정찬양을 이루는 토대는 모두 예찬의 것이었다.
그 위에 무슨 짓을 해 봤자 모래사장 위에 탑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도 정찬양의 것이 될 수 없었다.
‘흥, 복도에서 마주치지나 않으면 좋겠군.’
코웃음을 친 예찬은 가방에 대충 던져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리스피릿의 수상을 마지막으로 가수들의 공연이 시작됐다.
예찬의 손가락이 터치 패드 위를 움직이며 빠르게 글자를 만들어 냈다.
수신인은 박마루.
내용은 단 한 문장이었다.
– 안주머니에 넣어 둔 부적 버리세요.
메시지를 전송한 예찬은 3초를 세고 두 글자를 더 보냈다.
– 당장.
박마루가 부적을 더 썼다든지, 옷자락 사이로 노란 종이가 보였다든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예찬이 알고 있는 박마루라면 딱 지금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가 되었으니 대충 찍어 본 것이었다.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찔린 모양이었다.
‘가끔 이렇게 잡아 줘야 한다니까.’
예찬은 가뿐한 마음으로 다시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었다.
비교적 이름값이 높지 않은 세 팀이 연달아 무대를 선보이는 사이, 멤버들은 번듯하게 단장을 마쳤다.
[이번엔 바로 차세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스타에게 드리는 상입니다.] [와, 정말 이 상을 받으면 보람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일의 스타에게 드리는 ‘투모로우 리더상’의 시상은, 뮤지컬 무대뿐만이 아니라 각종 예능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봉인태 씨와 ‘빅브라더스’의 보컬에서 이제는 뮤지컬 배우로 거듭난 송철 씨가 맡아 주시겠습니다.]투머로우 리더상.
간단히 말하자면 신인상이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예찬과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받으러 가 볼까?’
* * *
[내일의 스타에게 주는 투모로우 리더상, 수상자는…… 레굴루스, 축하합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데뷔한 레굴루스는 신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그룹으로, 아홉 멤버 모두 각각의 매력…….]모니터에서 환한 얼굴로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시상대로 나아가는 레굴루스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원래도 잘생긴 얼굴들인 건 알았지만 시상식이라고 더 힘을 줬는지 후광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오, 역시 쟤들이 받네.”
리스피릿의 서브래퍼, 최선의 말에 턱을 괴고 반쯤 소파에 기대 있던 막내 김대훈이 입을 열었다.
“선이 형, 저기 삼분의 일은 형보다 나이 많은데 쟤들은 좀…….”
“아, 그랬나?”
최선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굴루스.
워낙 핫한 라이징 스타에다가 알게 모르게 숙소에서 화두에 오르는 그룹이었다.
‘괜히 중간에 1위 한 번 뺏긴 걸로 싸웠던 것도 있고…… 뭐, 그게 저쪽 잘못은 아니지만.’
김대훈과 박마루가 SNS에 헛소리를 지껄인 것도 안 좋은 의미로 꽤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레굴루스란 이름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멤버 개개인에 대해선 그다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리더인 하예찬이랑, 찬양이 닮았다는 범세혁 정도? 아, 배알콩도 안다.’
최선은 화면 속에서 마침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빨리 데뷔하긴 했구나. 나만 해도 4년 차인데 스무 살이고, 너는 열아홉, 희샘이 형은 스물둘이잖아?”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건드리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인지 아침부터 신경질적이었던 이희샘이 날카롭게 내뱉었다.
“근데 마루 얘는 어디 가서 이렇게 안 와?”
최선은 가볍게 무시했다.
‘멀쩡할 땐 참 멀쩡한 형인데…….’
패악질을 부릴 땐 먹이를 주지 않는 게 최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때마침 잠시 대기실을 벗어났던 박마루가 돌아왔다.
김대훈이 가장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마루 형, 어디 갔다 왔어요? 어? 형, 얼굴이 왜 그렇게 파래요?”
“어어…… 별거 아니야. 잠깐 화장실에 좀…….”
누가 봐도 별거 있는 얼굴이었다.
“배탈 났어?”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슬쩍 거리를 벌리며 이희샘이 물었다.
충분히 울컥할 법한 상황이었으나 박마루는 비실비실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박마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거 아니고 쓰레기통에 볼일이 있었어…….”
‘쓰레기통은 대기실에도 있는데?’
최선은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삼켰다.
굳이 모든 것을 캐묻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둘, 셋.] [빛나는 당신의 별! 안녕하세요, 레굴루스입니다!]레굴루스의 활기찬 인사가 대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신인이네, 신인이야.’
[더리얼 뮤직 어워즈에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이렇게 좋은 상까지 받게 되어 무척 기쁘네요. 멤버 모두 이 상에 부끄럽지 않은 좋은 음악과 퍼포먼스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하는 이클립틱!]“꺄아아아악!”
“레굴루스으으―!!”
리더 예찬이 소감을 발표하던 중간에 객석의 팬들을 부르자, 팬들이 화답하는 소리가 대기실까지 들려왔다.
사나운 얼굴과 달리 웃는 얼굴은 소년 같았다.
이번에도 거센 함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예찬의 뒤를 이어 막내 배새벽이 마이크 앞에 섰다.
[이클립틱, 오늘도 와 줘서 고마워요. 전부 이클립틱 덕분이에요. 앞으로도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세요. 사랑합니다.]열일곱 살답지 않게 달관한 표정으로 소감을 말하던 배새벽이 씩 웃었다.
당연히 장내를 뒤흔들 정도의 비명이 쏟아졌다.
‘좋을 때다.’
최선은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퇴장하는 레굴루스를 바라보다 썰렁한 대기실을 슬쩍 곁눈질했다.
뾰족하게 날이 선 이희샘과 파리한 낯짝의 박마루.
레굴루스의 순서가 끝나자마자 하품만 찍찍해 대는 김대훈과, 새벽부터 지금까지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정찬양까지.
‘그리고 나도 썩 훌륭한 아이돌의 소양을 갖추진 않았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콩가루였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렇지만 그 잘못을 돌이키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최선은 새삼스레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침몰하고 있는 배에 탄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 * *
레굴루스는 신인상에 이어 투데이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
미리 정해 둔 대로 수상 소감은 번갈아 발표했다.
예찬은 흐뭇한 얼굴로 맏형 심상록과 데뷔 타이틀곡의 작곡가인 강해솔이 소감을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습실에서 보고 있던 시상식에 이렇게 참여하게 되어서 정말 꿈만 같습니다. 여러분께도 멋진 꿈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가수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희의 음악을 사랑해 주신 여러분 덕에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저희를 응원해 주신 이클립틱에게 특히 감사하고, 앞으로도 저희에게 보내 주신 그 마음에 보답하는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와아아아!”
이번 시상식에서 레굴루스가 가장 먼저 2관왕을 차지한 덕에 객석의 팬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멤버들 또한 환한 미소로 팬들의 함성에 답했다.
물론 지금부터는 1군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리스피릿과 유피테르가 경쟁하듯 상을 쓸어 가겠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
대기실로 이어지는 복도로 들어가기 전, 잠시 객석을 향해 뒤를 돌아본 예찬은 트로피를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 중 가장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두 팀과 겨루는 것이 오늘로 끝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미래가 기대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