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69)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69화
‘뭐래.’
메시지를 확인한 예찬은 심드렁하게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바꿔 놓았다.
이번 건에 대한 진행 상황은 특별히 실시간으로 공유해 달라고 법무팀에 전달해 놓은 덕에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고소장 받고 나서 하는 사과라니, 진실성 없네.’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그렇게 느껴지겠는가.
예찬은 가뿐한 마음으로 모레 있을 레몬 뮤직 어워드 준비를 다시 시작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0분 지났습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납시…….”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예찬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반대쪽에서 황급히 튀어나온 채은성의 손에 의지해 넘어지는 것을 면한 예찬은 고개를 돌렸다.
“……우휘겸?”
그래, 분명 옆에 앉아 있던 우휘겸에게 손목이 잡히지 않았다면 자리에서 멀쩡히 일어났을 것이다.
“미안, 너무 세게 잡았지?”
예찬을 넘어트릴 생각은 아니었는지 당황한 얼굴로 우휘겸이 사과했다.
물론 우휘겸을 잘 모르는 사람은 참 덤덤한 표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인데?”
자기주장이 너무 없는 게 탈인 우휘겸이 이렇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예찬이 기꺼이 귀를 기울이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우휘겸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들었다.
“저기…… 윤여울 형한테 연락이 왔는데.”
“……!”
“한 번만 만나고 싶다고 해서. 사과하고 싶다는데…….”
‘……하, 차단해 놓을걸.’
예찬은 우휘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익명 게시판 악플러의 정체는 같은 츄즈 마이 프린스 출신이자 지금은 가온다 멤버인 윤여울이었다.
놀랍지는 않았다.
여러 음악 방송의 대기실을 골고루 찍어 올린 것을 본 뒤엔 스태프보다 가수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지상파 3사에 N-net 음방까지 전부 출근하는 스태프라니, 이상하잖아.’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들도 잠시 후보에 올렸었지만,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는 건 역시 가수 쪽이라고 생각했다.
은연중 레굴루스에 대한 원망과 시기가 느껴지는 글과 댓글들도 그 추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윤여울이라고 특정하진 못했지만, 츄마프 때부터 못되게 입 놀리던 꼴을 생각하면 이해된달까.’
“잠깐만. 지금 윤여울이 그 악플러라는 얘기지?”
“와, 그 형 그렇게 안 봤는데 놀랍네요.”
윤여울에게 메시지를 받고도 태연히 무시할 수 있었던 예찬과 달리 다른 멤버들은 악플러의 정체에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실제로 아는 사람 이름을 듣고 나서야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예찬은 주변의 소란에도 여전히 자신만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우휘겸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예찬을 붙잡고 말을 꺼내는 걸 보면 답은 뻔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어.”
역시.
‘별 얘기 없을 텐데.’
예찬의 머릿속에서 즉시 ‘윤여울을 안 보는 게 나은 이유’ 스물두 가지가 순서대로 정리되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고.”
“…….”
예찬은 미련 없이 방금 완성한 스물두 가지 리스트를 폐기했다.
“그래, 어디 한번 만나 보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휘겸에게서 눈을 뗀 예찬이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또 문자 받은 사람 있어요?”
“저요.”
“아하, 새벽이.”
이번 일에 제일 관심이 없어 보였던 배새벽이 손을 들었다.
예찬처럼 메시지를 받고 깔끔하게 무시해 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댓글엔 배새벽 루머를 제일 많이 썼지.’
더 손을 드는 멤버가 없는 걸 보아, 리더인 예찬과 원글의 주체였던 우휘겸, 그리고 댓글에 가장 많이 언급된 배새벽까지.
총 세 사람에게만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법무팀이랑 상의해서 오늘이나 내일 중에 우리 회사에서 보는 걸로 하자. 혹시 우휘겸 말고 같이 가고 싶으신 분…… 어이쿠.”
이번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다들 왜 이렇게 의욕적이야.’
어깨를 으쓱한 예찬은 근래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법무팀에 연락을 취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 * *
윤여울과 가온다의 소속사인 해림 직원의 방문은 같은 날 다소 늦은 저녁으로 잡혔다.
여느 때처럼 연습에 매진하던 멤버들은 단백질 셰이크로 대충 저녁을 때운 뒤, 법무팀에게 각자 스테이플러로 찍은 A4용지 뭉치를 전달받았다.
“문제의 게시물에서 윤여울 씨가 직접 레굴루스를 언급한 텍스트들을 멤버별로 정리한 문서입니다.”
법무팀 직원의 말에 멤버들은 다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어우, 이걸 다…… 정성이다, 정성.”
“가온다는 시상식 준비 안 한대요? 이럴 시간이 어디 있던 거지…….”
척 봐도 한두 장이 아닌 종이를 내려다보며 선우이경과 정의탁이 혀를 찼다.
예찬은 아직 표지를 넘기지 않은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굳이 내용 볼 필요 없어요. 그냥 한 사람이 이 정도로 떠들어 댔다는 걸 알았으면 충분해요. 내용은 전에 대충 말했던 것처럼 되는 대로 헛소리하는 거니까.”
잠시 말을 멈춘 예찬은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특히 강조했다.
“특히 상록이 형이랑 범세혁.”
괜히 인터넷 반응도 안 찾아보는 놈들이 이런 걸 봤다가 컨디션을 망치면 곤란했다.
남이 떠드는 소리에 정말 관심이 없는 범세혁은 예찬의 말을 듣자마자 옳다구나 종이를 앞에 내려 두었고, 괜히 애꿎은 테이블을 두들기던 심상록도 한숨을 푹 내쉬고 문서를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다음으로 예찬은 정의탁과 배새벽을 돌아보았다.
“어린이 친구들도 웬만하면 안 봤으면 하는데.”
“이미 읽었어요.”
남들보다 좀 더 두꺼운 종이 뭉치를 대충 내려놓으며 배새벽이 대답했다.
“음…….”
“너무 궁금해서 나중에 직접 찾아보는 것보단 낫지.”
잠시 뭐라고 해 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선우이경이 끼어들어 배새벽의 편을 들었다.
예찬은 선우이경을 향해 눈을 흘겼다.
“별로 뭐라고 하려던 거 아니거든요? 뭐라고 위로할지 고민하던 거였거든요?”
“아이고, 그러셨구나. 우리 리더의 깊은 뜻을 제가 오해했네요.”
‘진짜 한 대만 때리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데.’
이룰 수 없는 꿈을 접은 예찬은 한숨을 내쉬고 자기 몫의 문서를 펼쳐 들었다.
– 팬들이 하찮아서 귀엽다는 그분…. 사생활은 아주 버라이어티하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사모님 둘이 얼마 전에 백화점 VIP룸에서 서로 머리를 한 바가지씩 뜯은 게 이분 때문이라는….
– 나도 비슷한 얘기 들었는데 ㅎㅎㅎㅎ 그렇게 싸우고도 둘 다 H씨랑 안 헤어진 게 젤 웃김 ㅎㅎㅎㅎ
– 양아치 얼굴에 그렇지 못한 범생이의 영혼 이 지X하는 팬들 보면 내가 보고 들은 거 공유해 주고 싶당ㅎㅎㅎㅎ
– 난 같은 학교는 아니고 옆 학교 다녔는데 솔직히 왜 아직 학폭 안 터지는지 이해 안 감….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손발이 모자란데 왜?? 그 학교 애들은 다 보살인가….
문서에는 예찬이 같은 놈일 거라 예상했던 댓글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참 열심히도 여럿인 척했지만, 영 야무지지 못했다.
‘나름대로 말투를 바꿔 보려고 한 거 같긴 한데, 자꾸 점 네 개씩 찍고 히읗을 네 개씩 붙이는 거 너무 티 나잖아.’
무슨 말이든 이모티콘을 붙이는 범세혁 정도로 도드라지진 않았지만, 한 번 인식하면 쉽게 눈에 띄는 버릇이었다.
‘어설프다, 어설퍼.’
못된 짓도 똑똑해야 잘하는 거라며 예찬이 혀를 차는 사이,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뒤이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예찬에게 모였다.
예찬은 바깥의 방문객들에게 들어오라고 답하기 전에, 먼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우휘겸에게 말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네가 괜찮다고 해도 나는 무조건 고소할 거야.”
“……? 응.”
뭐지, 예상과 다른 이 반응은.
우휘겸이 너무 흔쾌히 대답하자 설득할 말을 더 준비하고 있던 예찬은 조금 당황했다.
그사이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지윤입니다. 해림 분들이 오셔서 함께 왔습니다.”
윤여울과 일행들을 직접 데리고 왔는지 도지윤 팀장의 목소리가 노크 뒤로 이어졌다.
“……들어오세요.”
예찬의 대답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평소보다 더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정장을 차려입은 도지윤 뒤로, 해림 직원으로 보이는 세 사람과 잔뜩 기가 죽은 윤여울이 보였다.
“…….”
쭈뼛거리며 고개를 든 윤여울과 예찬의 눈이 마주쳤다.
예찬은 윤여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도지윤 팀장 곁으로 다가갔다.
“예찬 씨, 이쪽은 해림 엔터테인먼트의 남종석 본부장님과 박미린 팀장님, 그리고 가온다의 손학중 매니저님입니다.”
해림이 그다지 큰 규모의 기획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부장급이 직접 오다니, 이 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티가 팍팍 났다.
‘아니면 그렇게 보이고 싶든지.’
예찬은 속마음을 깔끔히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굴루스 리더 하예찬입니다.”
“변호사 안우정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법무팀 변호사도 해림 측 직원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우선 서로 돈독한 두 팀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무척이나 유감을 표합니다.”
인사를 마친 해림 본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얼씨구.’
누가 돈독하다는 건지도 어이가 없었지만, 명백히 저쪽 과실이 100퍼센트인 상황에서 말을 참 요상하게 돌려서 했다.
“말씀을 참 이상하게 하시네요. 이번 일은 해림 측 아티스트가 저희 아티스트에 대한 루머를 일방적으로 인터넷에 유포해서 벌어진 일일 텐데요?”
기꺼이 정정해 주려는 예찬보다 한발 앞서, 이쪽 변호사가 매섭게 이를 지적했다.
‘……잘하시는데?’
고작 한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예찬은 NJ 법무팀의 변호사가 LEE 엔터 사장이 데려왔던 나사 풀린 변호사들과 전적으로 다른 인종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름이…… 안우정 변호사.’
불쾌한 듯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던 해림의 본부장은 팀장이 옆구리를 찌르자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 레굴루스 친구들과 우리 가온다 친구들은 그래도 뿌리가 같지 않습니까. 몇 달간 같이 합숙도 했고…… 어떻게 보면 형제 그룹이라고 봐도 좋은데, 한 사람의 실수로 사이가 틀어지는 게 안타까워서 한 말입니다.”
예찬은 이번엔 본부장의 개소리에 대답할 생각을 하는 대신 안우정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안우정 변호사는 예찬의 기대에 기꺼이 부응했다.
“남종석 본부장님. 본부장님은 형제분께 이렇게 악의에 찬 말씀을 하시나 봅니다? 아니면 형제분이 본부장님께?”
“아니, 무슨……!”
“그리고 이건 실수라기에 양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변호사가 윤여울의 족적이 남긴 종이를 흔들자 본부장은 시뻘게진 얼굴로 헛기침만 계속했다.
“크흠!”
“전 진짜 형제라도 이런 말을 하면 용서할 수 없을 거 같은데요.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앉아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본부장과 그 뒤의 윤여울을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본 변호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그때 선우이경이 예찬의 등을 밀었다.
“우리도 앉자.”
“아, 네.”
“그리고 예찬아.”
“네?”
예찬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한 선우이경이 작게 속삭였다.
“너 지금 눈이 너무 빛난다.”
“아.”
오랜만에 좋은 인재를 봤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