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73)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73화
‘당싶말’ 전주에 맞춰 무대 중앙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뉴욕 어느 뒷골목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것 같았던 멤버들은, 겉옷과 튀는 액세서리를 벗었을 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청순한 인상으로 변했다.
상체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실크 재질의 셔츠가 반짝이라도 발라 놓았는지 조명을 받아 엷게 빛이 났다.
‘와, 성스럽다…… 그나저나 당싶말 무대는 콘서트 때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좋은 걸 다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감동에 최모 양의 가슴이 괜스레 뿌듯해졌다.
그 사이 1절이 끝나고 바닥에 자욱한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원을 그리며 서자 기다렸다는 듯 바닥이 회전하며 떠올랐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오늘도 별무리에 실었죠.] [밤하늘에 수놓아진 저 별들엔
당신의 이야기도 빛나고 있을까요.]
동시에 하이라이트 파트가 시작되었다.
최모 양을 비롯한 수많은 이클립틱이 노래를 따라부르며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을 때였다.
“……?”
[……들판을 가르는 바람에]노래를 부르는 멤버를 쫓아 느리게 움직이던 카메라가 당황한 듯 작게 흔들렸다.
최모 양의 눈동자가 그보다 좀 더 흔들렸다.
‘이경이 어디 있어?’
회전하는 무대 위에 선우이경이 없었다.
선우이경이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잠시 멈춰 있던 화면은 번지 점프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아래를 향해 움직였다.
[푸르게 물든 목소리가 들리나요.]카메라와 최모 양이 찾아 헤맨 선우이경은 그곳에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상승하는 회전판을 따라 둥글게 둥글게 걸으며 말이다.
‘……설마 회전판에 못 탔나?’
당황한 최모 양과 달리 카메라를 바라보는 선우이경의 표정은 한없이 평화로웠지만, 안타깝게도 몸은 그렇지 못했다.
선우이경의 몸통은 드라이아이스가 만든 인공적인 연기로 턱 바로 아래까지가 전부 가려져 버렸다.
마치 안개 위에 머리만 떠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최모 양은 카메라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공중에 동동 떠 있던 머리를 잊지 못했다.
“……큽!”
윙크를 날리는 얼굴과 희뿌연 연기에 가려진 몸에서 오는 괴리감이 뒤늦게 그녀를 부들부들 떨게 했다.
’무슨 귀신도 아니고…… 크으읍.’
아무래도 오늘의 이슈 메이커 자리는 선우이경의 차지가 될 것 같았다.
* * *
멤버 하나가 낙오되는 작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엔 큰 사고 없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끝났다.
천천히 회전 무대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고, 선우이경과 합류한 레굴루스는 마지막으로 ‘Only my you’를 불렀다.
인트로 무대까지 합치면 무려 네 곡.
신인에게 주기엔 다소 파격적인 분량이었다.
팬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백스테이지로 빠져나온 멤버들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와, 진짜 온마유는 내가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물론 그중 제일은 선우이경이었다.
얼굴이 어찌나 불타고 있는지 그 옆에서 우휘겸과 정의탁이 양손을 다 써 가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어우, 얘들아. 나 너무 송구한데? 그만해도 돼.”
선우이경이 손사래를 쳐도 두 사람은 꿋꿋하게 부채질을 이어 갔다.
“으허, 이제야 좀 살 거 같다! 근데 이경이 형! 어쩌다가 무대에 못 탄 거예요?”
생수 한 병을 거의 한 번에 들이켠 채은성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미세하게나마 가라앉았던 열이 다시 올랐는지, 선우이경은 벌건 얼굴을 한 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예찬은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선우이경의 어깨를 짚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형. 직캠이 친절하게 알려 줄 거예요.”
“……그거참, 알려 줘서 고맙네.”
당연하지만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이었다.
물론 예찬도 굴하지 않았다.
“뭘요, 우리 사이에.”
드물게 부루퉁한 표정의 선우이경과 함께 가수석으로 돌아온 레귤루스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올해의 신인상은…… 레굴루스, 축하드립니다!]신인상 수상자로 호명되었기 때문이었다.
[둘, 셋.] [빛나는 당신의 별! 안녕하세요, 레굴루스입니다!]밝은 얼굴로 다시 시상대에 오른 멤버들을 향해 이클립틱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이로써 레굴루스는 세 번째로 참여한 시상식을 강해솔이 받은 베스트 송 라이터까지 4관왕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 * *
숙소로 돌아와 깨끗하게 씻고 나오자 밤을 넘어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나온 예찬은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강해솔과 배턴을 터치했다.
수건을 머리에 쓴 채 소파에 앉은 예찬은 씻는 사이 도착한 메시지들을 먼저 확인했다.
‘대부분 축하한다는 문자들이군.’
츄마프 트레이너들과 앨범을 준비하며 신세를 진 사진작가, 뮤비 감독 등이 보낸 의례적인 축하에 예찬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답변을 보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새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는 단체 메시지 방이 하나 있었다.
바로 레굴루스와 유피테르의 단체 방이었다.
‘새 메시지가 711개? 대체 뭘 하는 거야, 이 양반들이.’
미리 보기로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확인해 볼까 했지만, 새 메시지가 계속 도착하는 탓에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었다.
지금 저 방에 들어갔다간 잠들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으리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모니터링 끝나고 확인하자.’
단체방 확인을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미룬 예찬은 먼저 대형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신인 아이돌의 놀라운 대처 능력] [오늘 자 레뮤 웃음벨] [아이돌들이 낯짝 두꺼워야 하는 이유 (ㅂㅎ 아님)] [신인 아이돌의 놀라운 대처 능력] [대충 살자. 회전판에 못 타도 웃는 선우이경처럼.]인기 게시물을 한번 훑었을 뿐임에도 누굴 말하는 건지 쉽게 추측이 되는 제목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예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적어도 내년 레몬 어워드까지는 놀림감이지.’
온몸으로 드라이아이스를 맞으며 태연한 척하던 선우이경을 떠올리면 적어도 1년은 가뿐하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SNS와 아이튜브 또한 예찬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레몬 뮤직 어워드 본 방송엔 무대에 못 탄 주제에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선우이경만 찍혔지만, 관객들이 찍은 직캠들엔 선우이경의 당황한 얼굴이 각도별로 담겨 있었다.
회전판이 한창 올라가고 있을 당시, 선우이경은 객석을 바라보며 양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마 후 선우이경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무대는 한참이나 올라가 버린 뒤였고.
망충하게 입을 벌린 선우이경의 표정을 보니 손이 자연스럽게 캡처 버튼으로 향했다.
‘복숭아 말고 다른 팬덤들도 꽤 올려 줬네. 이거 다 모으면 360도 전부 나오는 거 아니야?’
예찬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선우이경의 바보 같은 얼굴을 보이는 족족 저장했다.
만족할 만큼 사진을 모은 예찬은 그제야 단체 메신저 방을 확인했다.
먼저 메시지를 날리기 시작한 것은 유피테르였다.
– 유피테르 주태현 선배님 : [여러분 알고 계신가요? 레몬 뮤직 어워드에서 회전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아이돌은 5년 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링크)]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선우이경 어떻게 책임질 거야
– 유피테르 강연록 선배님 : 와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나만 이때 떠올린 거 아니었구나 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이가원 선배님 : ㅋㅋ
‘뭐지?’
위에 쌓인 대화는 대충 넘기려 했는데 시작부터 굉장히 궁금증을 유발했다.
주태현이 남긴 링크를 누르자 곧바로 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누구? 황시우? ……아!’
조금 코믹한 노래에 맞춰 이미 자기 키의 반을 넘게 올라가 버린 회전 무대에 달라붙어 안간힘을 다 쓰는 황시우의 모습이 각도별로 재생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도 있었지.’
예찬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사이 화면 속 황시우는 점프를 몇 번 시도해 보다가 한쪽 다리를 먼저 높게 들어 무대에 걸쳤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대가 빠르게 위로 움직이는 바람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엉덩방아만 찧었다.
그런 황시우의 추태에 주태현은 백기를 들었다.
웃음이 터져서 무대에 무릎을 꿇었다는 뜻이었다.
황시우를 도우려고 무대 아래로 손을 뻗은 이가원의 광대도 씰룩거렸다.
노래를 부르던 강연록은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 더없이 진지한 것은 황시우뿐이었고, 그래서 더 웃겼다.
– 레굴루스 심상록 형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유피테르 강연록 선배님 : 아 이거 원곡으로 봐야 더 웃긴데ㅋㅋㅋ 되게 서정적인 노래였어 얘들아ㅋㅋㅋㅋ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선우이경 너 때문에 나까지 소환됐잖아 당장 튀어 나와라ㅡㅡ
– 유피테르 주태현 선배님 : 찾아옴 [Jupiter 9th LMA – the Milky Way (링크)]
– 유피테르 강연록 선배님 : 찾아왔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아 주태현 방문 잠갔어ㅡㅡ
–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선우이경 너 지금 웃음이 나와?
–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 선배님 방금 채팅은 강아지가 쳤습니다.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너희 숙소에 멍멍이 없는 거 알거든?
– 유피테르 이가원 선배님 : 이경 씨 편하게 해요
–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 네 선배님!
–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형 지금 내비에 너희 숙소 찍었다ㅡㅡ
– 레굴루스 채은성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이가원 선배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강연록 선배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주태현 선배님 : [유피테르 황시우와 레굴루스 선우이경 전격 비교 feat. 나라 잃은 황시우 (링크)]
– 유피테르 주태현 선배님 : 시우 갈 땐 가더라도 이건 보고 가
– 유피테르 황시우 선배님 : 지금 니 방문 따러 간다 새끼야
–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 오늘 정말 창피했는데 큰 위안 받고 갑니다ㅋㅋㅋㅋㅋㅋ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그 뒤로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단체방 안에 있는 멤버들의 굴욕 영상 링크들이 오고 갔다.
그사이 중간중간 대화에 참여하는 멤버들이 바뀌며 지나간 영상들을 곱씹기도 했다.
– 유피테르 주태현 선배님 : [당당하자 이마가 벌게져도 웃는 선우이경처럼 (링크)]
– 유피테르 강연록 선배님 : 이건 또 뭐야?
– 레굴루스 채은성 : 앗 저도 이거 방금 봤는데ㅋㅋㅋㅋㅋㅋㅋ
– 유피테르 강연록 선배님 : 은성아 형아 스포 좀 해 줘
– 유피테르 주태현 선배님 : ㄴㄴ 직접 봐야 됨 빨리 ㄱㄱ
– 유피테르 이가원 선배님 : 보고 왔다ㅋㅋㅋ 이경 씨 언제 오나요? 아직도 씻는 중??ㅋㅋㅋㅋㅋ
– 레굴루스 정의탁 : 어? 숫자 하나 줄었다! 누구예요? 예찬이 형? 아님 휘겸이 형?
– 나 : 나야.
– 나 : 저도 링크 좀 보고 오겠습니다.
이번엔 조금 전 신인상을 받기 위해 시상대에 오른 선우이경의 직캠이 담긴 게시물이었다.
선우이경은 무대에서 있었던 해프닝은 다 잊은 것처럼 멤버들이 소감을 말하는 동안 객석을 향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영상 아래엔 글쓴이의 친절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당당하자 이마가 벌게져도 웃는 선우이경처럼]이경이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혹시 퍼포먼스였나? 뭐 그런 미친 생각까지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봄ㅋㅋㅋㅋㅋㅋㅋ
무대 조명에서는 티가 안 났는데 이마까지 빨개짐ㅋㅋㅋ큐ㅠㅠㅠㅠ 하 내일모레면 스물넷인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겁니까?
‘아하.’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에선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얌전한 시상대 조명 아래 서니 이마까지 달아오른 것이 선명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 와, 진짜 사람 씻는 사이에 이렇게 또 링크를 쌓아 두시고…… 저 지금부터 복수하러 떠납니다. 다들 각오하시죠!
예찬이 링크를 확인하는 사이 씻고 나온 선우이경이 다시 단체방 전쟁에 합류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남은 승자 없는 전쟁은 깊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