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84)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84화
‘……지금 안 받으면 일부러 안 받은 거 티 나겠지?’
한숨을 폭 내쉰 예찬은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네, 하예찬입니…….”
– 나는 오늘도 괜찮습니다.
다짜고짜 상대가 예찬의 말허리를 끊었다.
‘나는 안 괜찮거든.’
다시금 차오른 한숨을 삼킨 예찬은 거실에 걸려 있는 시계를 힐끗 확인하고 말했다.
오후 10시 24분.
당장 만날 약속을 잡기엔 상식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시간이다.
“작곡가님, 지금 시간이 10가 넘…….”
– 지금 안 자잖아요?
깨어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뻔뻔한 대답에 예찬은 역시 이놈과는 일을 못 해 먹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는 놈한테 무슨 상식을 기대하겠어.’
몰상식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몰상식뿐.
“이제 잘 건데요.”
예찬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피대기도 만만치 않았다.
– 자지 말아요. 나랑 만나요.
“잘 건데요. 이미 이불 속인데요. 앞으로 10초 후면 잠들 예정인데요. 10, 9, 8…….”
– 그렇게 초를 빨리 세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7, 6, 5, 4.”
– 크윽! 데모 파일을 보낼 테니 들어 봐요! 그 후에 이야기합시다!
“3, 2.”
– 꼭 들어 봐야 합니다! 꼭!
“1. 안녕히 주무세요, 작곡가님.”
뚝심 있게 끝까지 숫자를 헤아린 예찬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후!’
당황한 피대기의 목소리를 들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무척이나 후련했다.
“……뭐 하냐?”
“……글쎄다.”
비록 방으로 들어가려던 채은성의 찜찜한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 * *
전화를 끊자마자 데모 파일을 보낼 기세였던 PiPiPi는 의외로 다음 날 알메겐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잠잠했다.
‘막상 보내려니 이건 아니다 싶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 레굴루스의 바짓단을 잡고 매달리는데 허무함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다들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PiPiPi에 대해 떠올리면서도 예찬은 멤버들을 이끌고 싹싹하게 촬영장 안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마쳤다.
“시상식도 시상식이지만, 이렇게 인사를 하니까 연말 느낌이 확 든다.”
매니저의 감탄에 함께 있던 멤버들이 동조했다.
“그러게요. 이제 시상식도 삼사의 연말 가요제만 남았네요.”
“형은 1일에 휴가받으면 어디 갈지 정하셨어요?”
우휘겸과 배새벽도 연말이라는 분위기에 취했는지 굉장히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12월 31일에 CBC에서 열리는 연말 가요제를 끝으로, 레굴루스의 데뷔 첫해 스케줄은 전부 끝이 날 예정이었다.
그 기념이라 하기엔 뭐 하지만, 다음 날인 새해 첫날부터 매니저들은 나흘씩 나눠서 휴가를 갈 예정이었다.
‘원래 일주일간 멤버들도 전부 휴가를 가려고 했는데 다들 뒤에 나흘만 쉬겠다고 했지.’
과연 일 중독자들다운 태도였다.
그래도 1월 1일에 업로드할 새해 영상은 이미 찍어 두었기에 공식적인 촬영은 따로 없을 예정이었다.
‘새해 인사 영상은 중요하니까 미리미리 공들여서 찍어 둬야지.’
신정, 구정, 추석 등 큰 행사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아이돌의 미덕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오랜만에 본가 내려가 보려고.”
“형 본가가 어디였죠?”
“부산 아니셨나?”
“부산 옆에 있는 창원이라고 하셨지.”
생각을 갈무리한 예찬도 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매니저 김건호가 룸미러를 통해 예찬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예찬이는 진짜 기억력이 좋구나.”
“관심 있는 데는 좀 그런 편이죠.”
“예찬아, 형한테 그런 멘트 치지 마라. 설렌다.”
“하하하!”
능청스럽기 그지없는 매니저의 대답에 예찬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도지윤 팀장이 끌고 왔을 때 쭈뼛거리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란 참 신기했다.
‘……나도 연말이라고 좀 감상적이 되었군.’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창밖을 바라보던 예찬의 표정이 굳은 것은 회사 로비에서 예정에 없던 인물을 발견한 뒤였다.
“어, 저거 PiPiPi 작곡가님 아닌가?”
“누구요?”
“저기.”
매니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과연 그곳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방을 꼭 끌어안은 피대기가 꾸벅꾸벅 잠에 취해 있었다.
‘저 양반이.’
로비 직원들도 다 퇴근한 이 시간까지 뭘 하는 건지.
자연스럽게 매니저와 우휘겸, 배새벽이 예찬을 바라보았다.
“혹시 작곡가님이랑 약속이 있…… 진 않았구나.”
예찬의 표정으로 답이 되었는지 우휘겸이 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얘기해 볼게요. 어제 전화가 오긴 했거든요.”
세 사람을 먼저 엘리베이터로 보낸 예찬은 다소 크게 발소리를 내며 피대기에게 다가갔다.
피대기는 남의 회사 로비에서 어찌나 곤히 잠들었는지 예찬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질 때까지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곡가님.”
발로 툭툭 건드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예찬이 PiPiPi의 어깨를 흔들자 PiPiPi가 경박스럽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헉, 여긴 누구? 나는 어디?”
“여긴 NJ 로비고요, 작곡가님은 PiPiPi예요. 참고로 전 하예찬이고요.”
“아, 하예찬 씨!”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예찬을 바라본 PiPiPi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야가 비슷해지자 입가에 흐른 침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
예찬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손수건 대신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서 건넸다.
티슈와 예찬을 번갈아 바라보던 PiPiPi가 물었다.
“뭐죠? 사인해 드려요?”
피대기는 허공에 사인하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순간 욱 치민 화를 참아 낸 예찬이 서늘하게 대답했다.
“……침 흘리셨어요. 거기 말고 오른쪽.”
멋쩍은 얼굴로 지저분한 얼굴을 정리한 피대기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됐나요?”
“네. 여긴 언제 오신 거예요?”
“아침 아홉 시쯤? 아, 로비에는 오후 일곱 시 정도부터 들어와 있었습니다.”
예찬은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9시 42분.
대충 열세 시간 정도 회사 근처에서 죽치고 있었단 뜻이었다.
예찬은 간만에 제대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제가 오늘 늦게까지 촬영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기다렸잖습니까.”
“제가 회사에 안 오면 어쩌려고 하셨는데요.”
“오전에 다른 멤버들이 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면 하예찬 씨도 이리로 올 거라 생각했죠.”
‘스토커냐.’
예찬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PiPiPi는 자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듯 가슴을 쭉 폈다.
“예상대로 이렇게 오지 않았습니까?”
역시 정상인은 진짜 또라이를 이길 수 없는 것일까.
긴 촬영에도 쌩쌩했던 예찬은 급격히 밀려드는 피로감에 눈앞의 또라이를 빨리 해치우기로 했다.
“……곡은 파일로 보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려고 했는데, 역시 직접 들려 드리고 싶어서요.”
곡 이야기가 나오자 PiPiPi의 눈빛이 변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진중한 눈빛에 예찬도 귀찮아 죽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작업실로 가시죠.”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도착하고, 예찬이 작업실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예찬의 옆에 앉은 PiPiPi가 지금까지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가방 안에서 USB를 하나 꺼내 들었다.
예찬은 조용히 그 USB를 데스크탑에 연결했다.
그리고 잠시 뒤, 값비싼 스피커를 타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링, 띠링, 띠링.
“…….”
커다란 모니터에 쉴 새 없이 경고창들이 떠올랐다.
예찬의 까만 눈동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창을 떠올리는 모니터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그 옆에 앉아 있는 피대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도무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니, 상황을 파악하고 싶지 않아 그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불길한 경고음은 여전히 작업실을 울리고, 화면엔 새로운 경고창이 빼곡히 쌓여 갔다.
데스크탑을 점령한 것은 PiPiPi가 가져온 게 맞지만 작곡한 곡은 아니었다.
컴퓨터 바이러스였다.
파랗게 변한 화면을 망연히 바라보던 예찬은 피대기를 향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게, 대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제대로 문장으로 나오지 않았다.
떨리는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피대기가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냘픈 목소리였다.
“……살려 주세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예찬이 자리를 박차고, 피대기가 작업실 문을 열고,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던 멤버들이 고함과 비명이 뒤섞인 복도로 달려온 것은 그로부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 * *
“네, 네. 아, 그래요? 그, 비용은 좀 더 드릴 수 있는데 그래도 어려울까요? 아, 네에.”
“…….”
“그럼 최대한 빨리 부탁드릴게요. 네, 네.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네, 들어가세요.”
“……뭐래?”
“된대요?”
숨죽이고 선우이경이 다섯 번째 컴퓨터 수리 업체와 통화하는 것을 듣고 있던 멤버들이 후다닥 달려들었다.
오직 예찬만이 깍지 낀 두 손에 이마를 얹은 채 고개를 숙이고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예찬을 힐끗 바라본 선우이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어떤 상태인지 말씀드렸는데 여기도 어렵다네. 그래도 일단 내일 오전에 와 보신대.”
“으아, 진짜 지독한 바이러스인가 보네요. 다들 안 된다는 걸 보니.”
먼저 연락했던 업체들의 말에 따르면 작업실 컴퓨터에 퍼진 것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바이러스라고 한다.
딱히 돈을 노린 해커가 아니라 단순 쾌락범이 퍼트린 거라 치료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지금 시간이 늦어서 전화를 안 받는 곳들도 많으니 내일 더 연락 돌려 봐야지. 어쨌거나 사람이 만든 건데 사람이 고칠 수 있지 않겠어?”
선우이경은 힘을 내라는 듯 예찬의 어깨를 주물렀다.
물론 예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구석에 박혀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피대기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남극의 빙하처럼 냉기를 풀풀 뿌리며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강해솔이 그런 피대기를 내려다보았다.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
“스톱! 해솔이 거기까지! 그 이상은 아이돌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야!”
선우이경과 심상록이 빠르게 강해솔의 입을 틀어막았다.
강해솔은 두 사람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대신 눈으로 피대기를 향해 욕을 했다.
“후…….”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예찬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부주의했어요. 미안합니다.”
저 얼간이 작곡가의 뭘 믿고 USB를 소중한 데스크탑에 연결했을까.
예찬은 피대기보다도 자신의 어리석음에 치가 떨렸다.
예찬의 사과에 멤버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야, 예찬아! 네가 뭘 잘못했어!”
“바이러스를 가져온 사람이 나쁘죠!”
“그럼 그럼!”
예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하다못해 저기 굴러다니는 고물 노트북에라도 먼저 연결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예찬아, 너는 피해자야!”
“그래그래!”
“우리 찬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자연스레 가해자 피대기의 어깨가 더 쪼그라들었지만 작업실에 있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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