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93)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93화
황시우를 해치운 뒤 가뿐한 마음으로 눈을 붙인 멤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열리는 DBS 연말 가요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신인상은…… 레굴루스, 축하합니다!]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단상 위로 올라간 멤버들은 기쁜 얼굴로 수상 소감을 전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개편을 이어 온 DBS 연말 가요제는 몇 년 전부터는 딱 세 개 부문의 상만 시상하고 있었다.
올해의 가수상과 신인상, 대상이 바로 그 셋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받으니 오늘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무대는 하나도 안 해서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지만.’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그룹을 향해 손뼉을 치고 있는 예찬에게 선우이경이 속삭였다.
“난 이제 준비하러 가 봐야겠다. 좀 이따가 봐.”
“네, 다녀오세요.”
선우이경을 배웅한 예찬은 마냥 해맑은 얼굴로 다음 무대를 기다리고 있는 채은성을 불렀다.
“너도 슬슬 준비해야지.”
“응? 헛! 그러고 보니 곧 내 차례잖아! 내 몫까지 응원을 부탁한다!”
화들짝 놀란 채은성도 선우이경의 뒤를 따라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
‘쯧쯧. 넋 놓고 다니긴.’
속으로 혀를 차며 자세를 바로 하던 예찬과 심상록의 눈이 마주쳤다.
“……그 표정은 뭐죠?”
“응? 뭐가?”
심상록은 뿌듯해 죽겠단 얼굴을 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예찬이 강해솔을 불렀다.
“있잖아, 항상 거울을 들고 다니는 준비된 아이돌 해솔이 형. 잠깐 거울 좀 빌려주지 않을래?”
“……네가 자꾸 놀리니까 놓고 다니고 싶어지거든?”
입으로는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강해솔은 순순히 재킷 안쪽에서 거울을 꺼내 넘겨주었다.
예찬은 건네받은 거울을 그대로 심상록에게 넘겨주었다.
“봐요, 지금 그 수상쩍기 그지없는 얼굴을.”
심상록은 거울을 받는 걸 사양하곤 참기 힘들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예찬이 네가 너무 살뜰하게 애들을 챙기니까 기특해서 그랬지.”
“‘살뜰’이요?”
뭘 했다고 그런 거창한 단어가 나오는 거지.
예찬이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자 심상록은 헛기침으로 그때까지 이어지던 웃음을 멈췄다.
“우리들 무대 순서까지 전부 외우고 있는 거잖아. 역시 우리가 리더 하나는 잘 뽑았다 싶어서.”
“……뭐 별거라고.”
학교 선생님이라도 됐으면 칭찬 스티커를 하루에 열 개씩 퍼 줬을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 예찬이 쑥스러워한다.”
“아닌데요.”
“에이, 다 티 나는데?”
“아닌데요. 그러면 저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아직 좀 이르긴 하다만 미리 가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절대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라 그저 조금 부지런을 떨 뿐인 예찬의 뒤로 심상록이 짓궂게 외쳤다.
“예찬이 도망친다!”
“아닌데요!”
* * *
‘너무 일찍 왔나.’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 들어선 예찬은 잠시 어깨를 주무르고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태프가 먼저 갈아입고 있으라며 의상을 전해 주고 바쁘게 떠났다.
‘뭐, 여유로우면 좋지.’
느긋하게 옷을 갈아입고 다시 소파에 앉자, 달칵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 뭐냐.”
당연히 같이 무대에 서는 다른 그룹 아이돌들이나 스태프일 것이라 생각한 예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네다 말고 멈칫했다.
예찬의 대놓고 아니꼽다는 반응에도 상대는 여유롭게 문을 닫을 뿐이었다.
“왜 들어와.”
“선배님한테 말버릇이 너무 고약하지 않아?”
‘선배님은 무슨.’
예찬이 코웃음에도 상대, 정찬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날 따라온 거 맞지?’
예찬은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는 듯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대를 앞두고 정찬양 따위와 실랑이하는데 쓸 기운은 1mg도 없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선배님.”
‘빨리하고 꺼져라. 좀.’
만에 하나 녹음하고 있을 것을 의식해 예찬의 말투는 제법 공손했으나 행동과 눈빛은 그저 방만했다.
그러나 ‘진짜’ 선배도 아닌 정찬양은 감히 이를 지적하진 않았다.
“……뭔가 오랜만이네.”
“어제도 봤는데요?”
“……그냥, 이렇게 얘기한 게 오랜만이라고.”
‘저게 뭐라는 거냐?’
이해할 수 없는 정찬양의 대답에 예찬은 티 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보다 존댓말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던 정찬양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 녹음 같은 거 안 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냐.’
예찬의 불퉁한 표정에서 답을 읽은 정찬양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 주머니를 뒤집어 까 보였다.
‘……저거 눈빛이 좀 맛이 갔는데?’
가까이서 보니 화장으로도 눈 밑이 시커먼 것이 가려지지 않았다.
‘얼굴은 또 왜 저래? 잠을 안 잤나?’
정찬양이 재킷 안주머니까지 전부 탈탈 털어 보이고 나서야 예찬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제정신 아니지? 아니, 제정신 아닌 건 알았는데 좀 일관성이란 걸 챙겨 보지 않을래?”
친한 척 집어치우라는 예찬의 날 선 목소리에 정찬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연말이라 좀 생각이 많아졌거든.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한 해가 흘러갔잖아.”
“…….”
마지막 리셋으로 돌아온 것이 올해 1월 7일이었으니, 정찬양의 말대로 두 사람 모두 놀라운 열두 달을 보낸 것은 사실이었다.
예찬은 생각지도 못했던 츄마프에 나갔고, 예찬의 인생을 훔쳐 살고 있던 정찬양의 앞엔 그 예찬이 나타났다.
물론 그렇다고 예찬과 정찬양이 올 한해 고생했다며 사이좋게 담소를 나눌 사이가 되진 않았다.
“이거.”
그때 정찬양이 뜬금없이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예찬에게 내밀었다.
“뭐야?”
“이 타이밍에 주는 건 보통 크리스마스 선물이지 않을까?”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크리스마스 선물인 건 예찬도 알고 있었다.
좀 전에 녹음기가 없다는 걸 증명하겠답시고 봉투 안에 든 상자를 꺼내서 보여 주었으니까.
‘잠깐, 저 상자 안에 녹음기가 들어 있을 수도 있나? …… 음, 그렇지만 저놈이 하는 말들을 들어 보면 녹음을 해서 교묘하게 함정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진 않는단 말이지.’
정찬양은 그에 그치지 않고 종이 가방의 프린팅만 봐도 크리스마스 선물 같지 않냐며 한 번 더 묻기까지 했다.
잠시 녹음기로 생각이 기울었던 예찬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소름이 돋았다.
저랑 내 사이에 크리스마스 선물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예찬은 손등으로 선물을 내민 정찬양의 손을 밀어냈다.
마음 같아선 바닥에 내팽개치고 자근자근 밟아도 성에 차지 않았으나, 사람, 아니, 이놈한테 죄가 있지 물건에는 죄가 없지 않은가.
선물을 거절당한 정찬양이 미간을 좁혔다.
“안 받아 주려고?”
“그럼 받겠냐? 이 또라이야.”
“또라이라고 하면 받아 줄 거야?”
제발 받으라는 듯 간절한 눈빛이다.
‘이거 받으면 뭐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딱딱하게 굳은 예찬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터졌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게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한숨에 예찬의 마음이 약해졌다고 해석한 건지 정찬양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나도 너한테 이걸 줄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꿈…… 하, 아무튼 이걸 너한테 줘야 끝이 나거든.”
횡설수설하는 정찬양은 지독히 불안정해 보였다.
당연히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았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말했지. 인생의 쓴맛을 보여 준다고. 야, 나 아직도 너 엿 먹이고 싶어서 환장했어. 꼭 인생 시궁창에 처박아 줄 테니까 이렇게 긁지 말고 그때까지 좀 진득하니 기다리고 있을래?”
“……그건 처음 만났을 때가 아닌데.”
“뭐?”
리셋창 시절부터 치자는 건가.
정찬양은 대답 대신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던 상자를 다시 꺼냈다.
“내용물이라도 보고…….”
“야, 동작 그만. 선물 교환식 그런 건 너희 멤버들이랑이나 실컷 하라고.”
“…….”
그러나 정찬양은 꿋꿋하게 상자의 포장을 뜯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한 디자인의 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한참이나 예찬의 손목에 채워져 있기도 했고.
그 무게와 감촉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예찬은 눈을 깜빡거렸다.
예찬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 정찬양이 눈을 빛냈다.
“이거 갖고 싶어 했잖아.”
확실히 그랬다.
아직 리셋을 시작하기 전, 스무 살 연습생 하예찬은 저 시계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데뷔하면 꼭 사야지. 성공해서 꼭 사야지.
어쩌면 그건 정말로 시계에 대한 물욕이었다기보다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갖기도 했었지.’
리셋을 반복하며 넉넉한 주머니를 갖게 된 예찬은 스무 살 연말엔 습관처럼 저 시계를 자신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이번엔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기억하는 퍼즐을 그대로 맞추며 디테일을 조정하던 이전과 달리 이번 리셋은 정신이 없어서 시계 같은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네가 평소에 사던 곳에서 산 거야.”
“스토커세요?”
지금까지 정찬양이 했던 말 중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기분 나빴다.
예찬이 받을 기미가 보이질 않자, 정찬양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시계를 상자에 넣은 다음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희멀건 얼굴엔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분명 전해 줬어. 갖든지 버리든지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너…….”
“예찬이 벌써 와 있…… 앗, 정찬양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예찬이 입을 열어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들고 가라고 쏘아붙이려던 순간, 같이 콜라보 무대에 서는 아이돌들이 주르르 대기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무대 잘하세요, 파이팅.”
정찬양은 사람 좋은 얼굴로 신인들을 향해 격려의 말을 남기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예찬이 너 정찬양 선배님이랑 친해?”
“오, 역시 노는 물이 다르다 이건가?”
“…….”
은근한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말들에 예찬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크흠, 그 어제 다들 연습은 좀 했어?”
“어휴, 했죠. 우린 왜 라이브야. 다른 팀은 다 립싱크 같던데.”
“그니까. 삑사리 낼까 봐 무섭다, 무서워.”
예찬을 슬쩍 긁어 보려던 시도가 먹히지 않자 신인들은 멋쩍은 듯 주제를 바꿨다.
그사이에도 예찬의 시선 끝에는 정찬양이 두고 간 상자가 흉흉하게 맺혀 있는 상태였다.
‘갖든지 버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속으로 이를 간 예찬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근처를 지나가는 스태프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저기, 이거 정찬양 선배님이 깜빡하고 놓고 간 거 같은데요.”
“아, 그런가요?”
“네, 아무래도 중요한 물건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걱정된다는 듯 눈을 내리깔자 스태프가 흔쾌히 상자를 떠맡았다.
“저희 측에서 전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은근 분실물이 나오더라고요.”
“네, 감사합니다.”
저만 믿으라는 스태프의 든든한 모습에 예찬이 밝게 미소 지었다.
유감이지만 예찬은 단 하나라도 정찬양의 마음대로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