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298)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298화
의외로 사인 티셔츠가 마음에 들었는지 예찬과 황시우는 사이좋게 엘리베이터 거울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인증샷을 찍었다.
“임스타 올린다.”
“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황시우가 고개를 기울이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얼굴 확인 안 해도 돼?”
“알아서 잘 골라 주시던데요.”
“훗, 이게 바로 신뢰인가…….”
황시우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기 무섭게 예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당장 사진 고르게 폰을 내놓으시죠.”
“이게 후배야, 깡패야?”
예찬이 당당히 손을 내밀자 황시우는 빠른 동작으로 스마트폰을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잠시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마지막에 스마트폰을 사수한 것은 황시우였다.
‘……선배여서 봐줬다.’
두 사람이 조금 가빠진 숨을 내쉬며 주차장에 도착했을 무렵엔, 돌고 돌던 주제가 다시 연습 이야기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도 난 세상엔 우리 같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걸 아는데, 이가원 걔는 말로는 안다면서 막상 닥치면 까먹는 거 같더라.”
누구나 다 자기처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서 완벽한 무대를 만드는 데 희열을 느끼는 줄 안다며 황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츄마프에서 연습생들 지켜보면서 세상 물정 좀 배워 왔을 줄 알았는데, 아직 완벽한 무대에 서 보지 못해서 그 즐거움을 모르는 거니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 오히려 병세가 악화했어, 아주.”
“병세라니…….”
예찬의 머릿속에 츄마프 시절 가혹하게 몰아치던 이가원의 심사평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런 의도로 연습생들을 잡으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요.”
“내 말이.”
다시금 고개를 내저은 황시우가 덧붙였다.
“만약 정말로 모든 사람이 거기서 진정한 기쁨을 찾는다 해도, 왜 이가원이 그런 사명감을 가져야 하지? 대충 사는 놈들은 대충 그렇게 살다 죽으라지.”
“신랄하시네요. ……제 생각엔 선배님도 함께 서는 무대니 완벽하길 바라시는 것 같았지만요.”
“그것도 있긴 하겠다. 아무튼 연차 쌓이고 이런 합동 연습은 진짜 오래간만에 한 건데, 그때마다 느껴. 우리 팀은 비슷한 성향의 넷이 모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한 명이라도 지향하는 바가 달랐어 봐. 지옥이 뭐 별거 있겠냐? 그게 지옥이지.”
거기까지 말한 황시우가 예찬을 향해 물었다.
“너도 그렇지?”
예찬의 머리보다 입이 먼저 반응했다.
“당연하죠.”
대답한 본인도 흠칫 놀랄 정도의 반응 속도였다.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잘하고 있는 애들을 굳이 얼마 못 갈 거라고 흰 눈 뜨고 볼 수도 없고…….’
예찬은 이 이상 멤버들에 대하여 비즈니스 관계라는 핑계를 대는 것은 다소 구차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 쉬운 놈이었다니…….’
겨우 1년 정도를 어울린 인간들을 이렇게 홀랑 믿어 버려도 괜찮은지 자괴감에 빠진 예찬의 귀로 황시우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너희 서로 알게 된 지 이제 1년 돼 가는 거지? 생각보다 더 확신이 흘러넘치는데?”
“인연의 깊이가 햇수로 정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번에도 입이 먼저 반응했다.
“…….”
예찬의 미묘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황시우는 무척 즐겁다는 듯 예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뭐야, 명언 제조기냐고. 너희 꼭 오래오래 지금 마음으로 가면 좋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좋은 선후배로 이 업계에서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며 황시우가 드물게 산뜻한 어조로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황시우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탄 예찬은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인연의 깊이는 햇수와 상관없다, 인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햇수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LEE 엔터 빌딩을 바라보며 예찬은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 * *
‘물론 그런 생각도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지.’
사색이란 사치다.
이 업계에 있다 보면 절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보컬 청팀 준비해 주세요!”
“네!”
올림포스 사옥에서 연습을 마친 다음 날, CBC 연말 가요제가 열렸다.
12월 31일에 열린 시상식답게 MC들의 멘트에서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본 방송이 시작되기 전 생중계 된 레드 카펫에서도 연말의 기분이나 연초의 목표 등에 관한 이야기가 단골 소재로 등장했었다.
“다들 준비됐죠?”
스태프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무대 의상을 갖춰 입은 이가원이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재빨리 자신의 상태를 점검한 아이돌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요?”
부드럽게 웃은 이가원이 앞장을 서 걸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백스테이지를 잠시 훑어본 예찬 또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푸른색 무대 의상을 차려입은 청팀 옆으로 막 무대를 마친 홍팀의 보컬팀이 지나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 홍팀도 의상 멋지다.”
“선배님, 무대 잘 봤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서로 친분이 있는 아이돌들이 스쳐 가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예찬 또한 다른 가요제에서 같이 콜라보 무대에 섰던 선배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사이 홍팀 보컬 대표를 맡은 정찬양과 예찬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
정찬양은 별다른 행동 없이 조용히 눈길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갔다.
‘저 자식은 왜 볼수록 인상이 흉흉해지는데?’
무대 위에서는 멀쩡히 날아다니더니만, 직접 마주친 얼굴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이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리스피릿 같은 짐덩이는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인생 제2막을 열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굴더니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짧게 한숨을 쉰 예찬은 지금부터 설 무대에 정신을 집중했다.
* * *
좌석에 앉아 무대를 감상하던 정모 씨는 짧게 감탄했다.
‘역시 국내에서 하는 시상식이 최고야.’
무대 스케일은 해외보다 떨어지지만 오고 가기가 훨씬 편하지 않은가.
‘그리고…….’
정모 씨의 시선이 잠깐 옆을 향했다.
“누나, 다음 무대에 예찬 님이 나오는 거지?”
눈이 마주친 동생 정다운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정모 씨의 최애가 예찬임을 알게 된 후부터 어째서인지 예찬의 호칭은 ‘예찬 님’이 되었다.
정모 씨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국내에서 하니까 이렇게 동생을 달고 올 수도 있고.’
연석으로 CBC 연말 가요제 티켓을 구했다는 말을 전했더니 어찌나 기뻐하던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한다고 난리도 치고.’
덕분에 부모님께도 제법 맏이로서 면을 세웠다.
동생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레굴루스 팬임을 알게 된 후, 정모 씨는 은근히 동생의 덕질을 돕고 있었다.
동생이 배새벽과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듣고, 전국 아이돌 체육 대회 때 받은 배새벽의 폴라로이드를 챙겨 주었더니 너무 기뻐하는 것이 아니던가.
– 와, 폴라로이드라니, 신기하다! 이거 그럼 세상에 한 장밖에 없는 거야? 되게 귀한 거네. 누나, 고마워.
– …….
정확히 말하자면 뉴비 특유의 생생한 반응이 좀 재미있었달까.
‘뭐, 얜 나처럼 머리 풀고 달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런 주제에 얘는 달랑 한 장 산 앨범이 사인회에 덜컥 당첨되어 다녀오기도 했었다.
‘초심자의 행운이냐고.’
“……누나,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봐?”
정모 씨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정다운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으응. 앗, 무대 시작한다!”
정모 씨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노래는 올림포스 기획사 출신 아이돌 미네르바의 히트곡인 ‘Happy New Year, Ma luv’.
‘게다가 이번 콜라보는 무려 혼성 무대……! 커플 안무 있으면 죽인다! 안무가를!’
비뚤어진 감정으로 흉흉하던 정모 씨의 눈빛은 스크린에 가득 찬 예찬의 성스러운 얼굴과 마주하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조명이 켜진 무대 위에서 예찬이 힘차게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정모 씨도 예찬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길 바라며 응원봉을 힘차게 흔들었다.
* * *
이가원에게 달달 볶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콜라보 무대치고 놀라울 정도로 팀원들의 호흡이 잘 맞았다.
준비한 무대가 끝나기 무섭게 공연장이 들썩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보컬 곡인데 안무가 너무 하드한 거 아니야?’
연습 때는 그다지 체감하지 못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 한계 이상으로 몸을 움직였더니 숨이 가빠졌다.
‘역시 최고의 아드레날린은 팬들의 함성…….’
예찬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차게 응원봉을 흔드는 팬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K-pop 팬들은 방금 끝이 난 홍팀과 청팀의 메인 보컬 콜라보 무대를 CBC 청홍 가요대제전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점치고 있었다.
각 팀의 수장이 1군 탑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인 리스피릿과 유피테르가 맡은 걸로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 양쪽 다 투표수가 엄청나게 늘었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예찬은 모니터용 화면 상단에 나오는 숫자들을 확인하고 조금 감탄했다.
청홍 가요대제전은 출연 가수들을 청팀과 홍팀으로 나누고 응원하는 팀에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팬들은 보통 콜라보 무대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이 본무대를 서는 동안 투표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때때로 지금처럼 예외가 발생했다.
‘팬덤끼리 자존심 대결이 돼 버리면 어쩔 수 없지.’
후배에게 질 수 없다는 일념의 유피테르 팬들과, 다른 멤버는 몰라도 정찬양만큼은 이 아이돌 판에서 진짜 중의 진짜라고 믿는 리스피릿 팬들의 격렬한 다툼이 숫자로 환산되어 움직였다.
무대가 이미 끝났음에도 숫자가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 복숭아들도 좀 보탰으려나?’
레굴루스 또한 리스피릿과 알게 모르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였으나, 아무래도 리더를 맡은 두 그룹처럼 대놓고 전쟁에 끼어들진 않았다.
[네, 청팀과 홍팀. 두 팀 다 CBC 청홍 가요대제전 역사상 1부 최대 투표수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과연 마지막에 웃을 것은 홍팀일지, 아니면 청팀일지.] [여러분도 마지막까지 지켜봐 주세요. 그러면 2부에서 뵙겠습니다.]곧 1부가 끝날 시간이라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예찬! 아주 완벽했어.”
“어제도 늦게 들어오더니, 진짜 연습 열심히 한 거 티 나더라. 고생 많았어.”
“나도 빨리 무대에 서고 싶다!”
대기실 문을 열고 예찬의 얼굴을 확인한 멤버들이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것처럼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호들갑스럽긴.’
“칭찬 그만하고 얼른 준비나 하죠. 우리가 2부 오프닝이잖아요.”
“네, 선생님~!”
예찬은 자신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지 못하고 멤버들을 재촉했다.
물론 매일같이 붙어 있는 멤버들에겐 그 변화가 너무도 잘 보였다.
멤버들이 귀엽다는 듯 시선을 교환했으나, 예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기분 좋게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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