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02)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02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조용한 홀로그램 창 덕분에 9할 정도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데이터 복구와 관련된 장소인 모양이었다.
본체가 있던 자리가 텅 빈 것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그래도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으니까 설레발치지 말자. ……그나저나 이렇게 문을 열어 놨다는 건 들어와도 된다는 뜻이지?’
조심스레 들고 있던 본체를 내려놓은 예찬은 잠시 고개만 기울여 문 안쪽을 살폈다.
현관을 열면 바로 꺾이는 구조인지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다.
‘일단 피대기를 기다려야겠군.’
안에서 누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인데 홀로 유유자적 들어갈 수는 없었다.
“헉, 헉, 끄, 끝입니까? 여, 여기가 끝 맞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PiPiPi가 계단 난간을 붙잡고 나타났다.
예찬은 흔쾌히 계단으로 다가가 PiPiPi의 팔을 잡아끌었다.
위에서 당기는 힘에 붕 떠오른 PiPiPi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인 남성에게 몇 계단을 날 듯이 뛰어넘는 경험은 극히 드물 테니 놀라울 만했다.
PiPiPi를 계단 꼭대기로 낚아챈 예찬은 이번엔 자연스럽게 그의 등을 밀었다.
만약 지금 함께 있는 상대가 멤버였다면 예찬은 혼자서 먼저 들어갔을 것이었다.
멤버가 아니라 회사 직원 중 하나였다면 함께 들어가되 예찬이 앞장을 섰을 것이고.
그러나 지금 예찬의 옆에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PiPiPi였다.
“다시 올라와 보니 그새 본체를 가지고 들어가셨는지 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같이 들어가 보죠.”
제 할 말을 마친 예찬이 손에 힘을 주자 PiPiPi의 발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502호의 현관 문지방을 넘었다.
“어, 그런데 본체 하나 더…….”
“제가 챙기겠습니다.”
PiPiPi가 복도 바닥에 놓여 있는 본체를 힐끔거리자 예찬이 걱정하지 말라며 재빨리 대답했다.
본체를 다시 들어 올린 예찬은 PiPiPi가 신발을 벗은 걸 확인하고 안쪽을 향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들어갑니다.”
예찬이 있는 뒤쪽을 힐끔댄 PiPiPi도 슬며시 입을 열어 예찬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잠시 들어갑니다.”
개미만 한 목소리를 들은 예찬은, 문득 자신이 지금 사회성 없는 작곡가를 위해 사회성 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좁은 현관을 지나자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공간이 펼쳐졌다.
‘더러워.’
짤막한 감상이 예찬과 PiPiPi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남서빌 502호는 거실 겸 주방에 방 하나가 딸린 투베이 구조였다.
꽤 오래전에 유행한 전설의 체리색 나무 몰딩과, 반질반질 유광으로 빛나는 옥색 주방 카운터가 중심을 잡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는 체리색과 옥색의 환장의 조합보다도, 집 안을 완전히 점령한 쓰레기들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심상록이 봤으면 못해도 가벼운 현기증 정도는 일으켰을 게 분명한 꼬락서니였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종량제 봉투와 재활용 봉투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쓰레기 집……? 거실엔 사람이 안 보이는데, 방에 있는 건가?’
예찬의 목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 사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았다.
“하예찬 씨, 저기 방문이 있습니다.”
예찬보다 한 발짝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PiPiPi가 쓰레기들의 틈을 가리켰다.
PiPiPi의 말대로 체리색 문이 아주 살짝 보였다.
“일단 저기로 가 보죠.”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나다닐 정도의 얇은 길을 찾아낸 예찬과 PiPiPi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섣불리 움직이다가 쓰레기 탑이라도 무너트리면 곤란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의외로 냄새는 나지 않았다는 점 하나였다.
이번에도 앞장서서 걷던 PiPiPi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뭔가 바닥이 찐득하지 않습니까?”
“조용히 말하세요.”
이미 이 집을 나가자마자 양말을 버리기로 결심한 예찬이었으나, 집주인에게 그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진 않았다.
예찬의 지적에 살짝 시무룩해진 PiPiPi는 발뒤꿈치를 슬며시 들어 까치발을 했다.
조금이라도 불결한 공간과 직접 닿는 면적을 줄여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함정처럼 펼쳐진 쓰레기들을 무사히 지나 문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방문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똑똑똑,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냥 열고 들어가죠.”
“네? 그렇지만…….”
“괜찮아요.”
집에도 멋대로 들어오고 거실도 멋대로 횡단했는데 방문 하나쯤 더 연다고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찬의 말에도 PiPiPi는 망설이는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예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하세요?”
“그…….”
괜히 한번 주변을 살핀 PiPiPi가 이번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손잡이도 찐득거릴 것 같단 말입니다.”
‘이 자식이…….’
여기까지 와서 잘도 태평하게 떠들어 대는군.
피대기와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아진 예찬은 그저 멸시 어린 눈길을 보내고 한 손으로 본체를 고쳐 들었다.
“그, 그 눈빛 뭔가요! 열면 될 거 아닙니까, 열면!”
그대로 뒷북을 치는 피대기 대신 문을 열자, 그래도 거실보다는 한결 깔끔한 방 안이 보였다.
‘여기도 뭔가 쌓여 있는 건 매한가지인데, 그래도 쓰레기가 아니라 전자 제품들이네.’
작은 방이었기에, 한쪽 모서리에 놓인 책상 앞에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는 남자를 찾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가 방 안에 리듬감 있게 울려 퍼졌다.
“하예찬 씨, 나도 손잡이 잡았…… 읍?!”
눈치 없이 떠드는 피대기의 입을 막아 버린 예찬은 한 번 더 멸시 어린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효과가 있었는지 손을 떼도 방정맞은 입이 꾹 다물린 상태를 유지했다.
예찬은 조용해진 피대기를 뒤로하고 책상 앞에 앉아 등을 보이는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음에도 남자는 예찬이 옆에 설 때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북슬북슬한 곱슬머리에 두꺼운 뿔테 안경이라…… 딱 츄마프 초기 배새벽 패션이잖아?’
초면인 남자에게서 멤버와의 공통점을 찾은 예찬이 허리를 숙여 높이를 맞추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예찬이라고 합니다. 복도에 둔 본체가 사라졌길래 멋대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아는 체하지 않았을 뿐, 예찬과 피대기의 존재는 눈치채고 있었는지 남자가 놀라는 기색 없이 태연히 대꾸했다.
“괜찮아. 딱 봐도 들어오라고 열어 둔 거잖아.”
‘……다짜고짜 반말?’
상대의 예의 없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예찬은 자신보다 못해도 열 살은 더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 외모를 보고 진정했다.
‘열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을 더 먹었어도 초면에 반말은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남자가 보고 있는 화면이었다.
‘저게 피대기 거였나.’
예찬은 책상 아래에 널브러진 에어 캡과 옆면이 뜯긴 낯선 본체를 힐끗 확인했다.
안에 들어 있던 하드 디스크를 남자의 장비에 연결한 것 같았다.
예찬은 피대기의 본체 옆에 계속 들고 있던 본체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사이 피대기도 살그머니 예찬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남자가 물었다.
“오늘 올 사람 있다고 연락받은 게 없는데. 누구 소개야?”
“그런데 왜 반말…….”
예찬은 손을 들어 피대기의 입을 한 번 더 막았다.
“……소개말이죠.”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인맥으로 일을 받는 모양이었다.
‘곤란한데.’
홀로그램 창이 여기로 가 보라고 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짧은 고민 끝에 예찬이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알음알음 왔습니다.”
두루뭉술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예찬과 피대기가 방문을 열었을 때부터 한순간도 멈추지 않던 키보드 소리가 뚝 끊겼다.
“알음알음?”
남자가 처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안경 너머, 갈색 눈동자에 경계심이 서렸다.
“나는 보증인 없이 일을 절대 안 받는데. 너희 뭐 하는 놈들이야?”
‘……진짜 곤란한데. 야, 빨리 뭐라고 말 좀 해 봐.’
예찬이 홀로그램 창을 다그쳤지만,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없었다.
“설마 짭새냐?”
대답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과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명백히 의심하는 태도에 예찬이 뭐라도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그러는 댁은 뉘신데 아까부터 반말입니까? 같은 사회인으로서 기본 예의는 좀 차려 주시죠?”
욱 치민 감정을 참지 못한 피대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피대기가 예의를 운운하다니…….’
또라이가 상식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처럼 기괴한 광경이었다.
“예의?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주제에 예의?”
그 사이 꼬리 만 개처럼 벽장 뒤로 후다닥 숨은 남자가 얼굴만 빼꼼 내밀고 피대기의 꼬투리를 잡았다.
몸과 말이 참 따로 노는 모습이었다.
‘패기가 있든지 없든지 하나만 해 줬으면 하는데.’
그래야 거기에 장단을 맞출 것이 아닌가.
“무단 침입은 무슨! 애초에 그쪽이 남의 본체를 멋대로 들고 가서 들어온 거 아닙니까? 우리가 들어온 건 정당방위! 그쪽은 본체 절도범! 참고로 그 본체 천만 원 정도 하는 거니까 절도 금액도 꽤 큽니다.”
“저, 절도범? 나, 난 누가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해서 치운 것뿐인데?”
‘어. 겁먹었다.’
알기 쉽게 남자의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피대기도 이를 느꼈는지 여느 때보다 더 당당하게 목에 핏대를 세웠다.
“무단 투기는 또 무슨 억지입니까? 집 앞에 있다고 다 그쪽 맘대로 처리해도 되는 줄 알아요? 자기 집으로 잘못 배달 온 택배도 함부로 뜯으면 안 되는 세상인데, 남의 물건을 멋대로 들고 들어와서 멋대로 뜯어서 멋대로 자기 거에 연결까지 했네요! 아주 죄질이 악랄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피대기가 예찬에게 동의를 구했다.
“예, 뭐…….”
일단은 같은 팀이기에 예찬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피대기…… 생각보다 상식이 있잖아?’
“아, 아니, 나는 정말로 고쳐 주려고 했을 뿐인데…….”
완전히 기가 죽은 남자는 아예 머리까지 벽장 뒤로 숨어 버렸다.
“뿐인데? 데에에?”
“뿐인데요…….”
피대기가 남자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마침내 남자의 입에서 기운이 쪽 빠진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피대기의 완벽한 승리였다.
두 사람의 치열한 공방이 살짝 소강상태가 된 것을 확인한 예찬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크흠, 저 일단 다시 나와 보시겠어요? 서로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나와서 대화로 푸실까요?”
의도치 않았으나 PiPiPi와 예찬의 합작,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북풍이 아닌 태양이었다 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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