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03)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03화
“……하드 디스크, 돌려드릴 테니 나가 주시죠. 본체 채로 현관 앞에 가져다 놓을게요.”
남자는 존댓말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서 완고함이 느껴졌다.
정신없는 틈을 타 중개인을 슬쩍 얼버무리고 수리를 맡기려 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예찬은 일단 남자의 꽁꽁 얼어붙은 경계를 조금 녹이는 것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프로그래머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제가 성함을 몰라서요.”
“마음대로 부르세요. 그리고 나가 주세요. 나가 계시면 3분 안에 다시 조립해서 돌려드릴 테니까요.”
“태도가 대체……!”
“작곡가님. 잠시만.”
‘타이밍 좋았다, 피대기.’
PiPiPi가 까칠하게 굴수록 해님 담당인 예찬의 온기가 더 따뜻하게 느껴질 터.
예찬은 흥분한 PiPiPi를 말린 다음,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조립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좀 전까지 계속 화면을 보고 계셨잖아요? 혹시 하드 디스크가 어떤 상태인지는 파악하셨을까요?”
“……아니요.”
‘거짓말 더럽게 못 하네.’
미묘한 침묵과 흔들리는 목소리라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진작 문제점을 알아보고 수리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던데요.”
“문외한이 보기엔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벽장 뒤에서 남자의 코웃음이 들렸다.
‘……자꾸 긁네?’
잠시 북풍을 출동시키고 싶은 충동이 예찬을 흔들었다.
북풍, PiPiPi의 마음도 비슷했는지 고개를 젓더니 입을 열었다.
“하예찬 씨. 그냥 경찰에 신고합시다. 그다음 합의 조건으로 수리를…….”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작전을 짜는 거냐고 예찬이 핀잔을 주기도 전에 벽장 뒤에서 남자가 튀어나왔다.
“경찰은 안 돼! 경찰을 부를 거면 차라리 죽여! 날 죽이라고!”
흥분한 남자의 말투는 다시 반말로 돌아가 있었다.
“하예찬 씨!”
PiPiPi가 예찬의 이름을 크게 부르더니 후다닥 예찬의 등 뒤로 숨었다.
‘피대기 너는 진짜…….’
예찬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를 경계하며 등에 단 짐짝을 향해 이를 갈았다.
예찬과 피대기를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오던 남자가 돌연 방향을 바꿔 두 사람 주변을 빙빙 돌며 날뛰었다.
“경찰 부르지 마! 부르지 말라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상태였다.
예찬이 조심스럽게 상대를 진정시키려 시도했다.
“……안 불렀습니다.”
“사람을 협박하다니! 악마들! 사탄! 마귀!”
‘안 듣고 있네.’
북풍과 태양 작전은 다 틀린 것 같았다.
한편 눈을 뒤집고 달려든 남자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피대기는 남자가 주변만 빙빙 돌고 있자 슬슬 주둥이가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죽어 버릴 거야! 유서에 너희 이름을 쓰고 죽어 버릴 거라고!”
“당신, 내 이름을 알기나 합니까?”
되지도 않는 남자의 협박에 피대기가 어이가 없다는 듯 깐족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빽 소리를 지르던 남자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남자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이름이 뭐요?”
“지금 이 상황에 그걸 말해 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피대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남자를 비웃었으나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데 말하고 다니지 않을 테니 좀 말해 주쇼. 딱 유언장에만 쓸게.”
“그걸 지금 설득이라고 하신 겁니까?”
두 사람의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지켜보는 예찬은 기가 쭉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또라이들끼리 또라이력을 겨루는 건가.’
예찬의 인내심이 한계점을 막 넘으려던 순간이었다.
[하하경의 소개>의외의 이름을 띄운 홀로그램 창이 예찬의 눈앞에 떠올랐다.
“…….”
하하경.
모르는 이름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겠지.’
“어어? 어디서 밝히기 부끄러운 이름인가 본데?”
“뭐라는 겁니까, 당신?”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지!”
“하하경 씨 소개로 왔습니다.”
예찬은 잠시 호적상 형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다 아직도 피대기와 입씨름하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직접 ‘형’의 이름을 입에 담자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당신 부모님이면…… 누구?”
피대기를 향해 일장연설을 펼치려던 남자가 예찬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불편이고 자시고, 한 번 했는데 두 번이 어려울 건 없었다.
“하하경 씨요.”
반응을 보아하니, 이 남자는 예찬의 형인 하하경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가 알기 쉽게 변했다.
흥미와 경계가 반반쯤 섞인 목소리로, 남자가 한 번 더 예찬에게 물었다.
“하경이가 소개했다고? 너 누군데?”
아, 이건 진짜 불편한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울해 보이던 강해솔의 얼굴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하하경 씨 동생이요.”
어색한 사이지만 일단 이름 좀 팔겠습니다, 호적상 형님.
“하경이 동생? 너 이름이 뭐랬지?”
그때 큰소리를 내면서도 여전히 예찬의 뒤에 조개껍데기처럼 붙어있던 피대기가 속살거렸다.
“예찬 씨, 알려 주면 유서에 쓸지도 모릅니다.”
예찬은 피대기를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날렸다.
이 집에 들어오고 난 뒤 벌써 세 번째였다.
피대기가 조용해졌다.
예찬이 다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예찬입니다. 하예찬.”
“하예찬, 하예찬, 예찬, 예…… 아, 그러고 보니! 하경이한테 그런 이름의 동생이 있었지! 이야, 반갑다!”
남자의 목소리와 태도가 완전히 변했다.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남자는 무척이나 호의적인 얼굴로 아는 체를 해 왔다.
“맞네! 옛날 얼굴이 있네! 아, 우리 한 십 년쯤 전에 얼굴도 한 번 봤었는데. 기억 안 나? 나 하경이랑 대학 동기였던 안승복이야.”
하하경의 이름 석 자로 경계하던 태도가 완전히 누그러진 남자는 흔쾌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까지 했다.
한편 예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면이 있었나.’
형이 생긴 현재의 예찬과 전에 만난 적 있던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파고들면 귀찮은데. 뭐, 십 년 전에 만난 적 있는 정도면 괜찮으려나?’
하하경과 제법 가까운 사이였던 건지 안승복은 연신 반갑다는 말을 반복하며 예찬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예찬도 안승복을 새삼스레 관찰했다.
‘하하경이 나보다 열두 살 많으니까, 올해 서른셋인 거지? 흠…….’
생김새는 그럭저럭 나이에 걸맞은 거 같은데 좀 전까지 펄펄 날뛰던 모습은 영 삼십 대로 봐 주기 어려웠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인 예찬과 달리 안승복은 점점 더 즐거워 보였다.
“와, 반갑다 정말. 그런데 예찬이 너 진짜 잘생겼다. 진짜 신기하네. 이런 얼굴을 어떻게 잊고 살았지?”
“……죄송해요. 저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럴 수 있지. 너 그때 진짜 쪼끄맸거든. 그런 아기가 어떻게 이렇게 컸지? 어이쿠, 이럴 때가 아니지!”
자신보다 10cm는 족히 커 보이는 예찬의 키를 재어 보는 시늉을 한 안승복은 쌓여 있는 짐들 사이에서 요령 좋게 의자 두 개를 꺼내 왔다.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뒀네. 앉아서 얘기하자.”
“음, 네.”
‘……일단은 좀 이야기를 들어 볼까.’
의심을 살 일이 없이 기억에 없는 과거 이야기를 들을 기회였다.
‘하하경에 대한 것도 좀 묻고 싶고.’
예찬이 먼저 자리에 앉자 그 뒤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오도카니 서 있던 피대기도 남은 자리를 향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때 안승복의 손이 피대기의 앞을 막았다.
“……뭡니까?”
“그쪽, 예찬이랑 무슨 사이입니까?”
안승복이 취조라도 하는 것처럼 따지듯 묻자 피대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안승복을 쳐다보았다.
“예찬이요? 아니, 그쪽이야말로 아까부터 듣자 하니 언제 봤다고 하예찬 씨한테 그렇게 친한 척입니까?”
안승복은 그 질문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대답했다.
“십 년 전에 봤는데요.”
피대기도 물러서지 않았다.
“십 년이나 안 봤다는 뜻이네요.”
또다시 시작된 둘의 말다툼에 예찬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쓸데없는 기 싸움을 더 들어 줄 생각이 없던 예찬은 피대기와의 관계를 일축했다.
“같이 일하는 분이세요. 협력 업체 직원분이라고 해야 하나?”
예찬의 말에 안승복의 얼굴에 조소가 배어 나왔다.
“아아…… 협력 업체.”
“뭡니까, 그 표정!”
알 만하다는 듯 안승복이 피대기를 위아래로 훑자, 피대기가 발끈했다.
참으로 도발하기 쉬운 남자였다.
“예찬이 협력 업체분? 나이는 몇이나 되십니까?”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거만한 태도로 안승복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나이 공격에 피대기가 예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억울한 표정 뭔데.’
“……예찬 씨, 형님분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안승복에게 직접 묻기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얼굴을 한 피대기가 그와 동기라는 예찬의 형을 물고 늘어졌다.
‘그건 또 무슨 자존심인데.’
예찬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올해로 서른셋 됐어요.”
“…….”
아직 이십 대인 피대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표정으로 피대기의 나이를 어림짐작한 안승복이 큰 소리로 혀를 찼다.
“거참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그렇게 표독스럽게 굴다니……!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도 다 옛말이라니까!!”
혼잣말치곤 굉장히 똑 부러진 발음으로 중얼거린 안승복은 피대기가 앉으려던 의자를 쑥 당겨 자기가 앉았다.
“지금 무슨…….”
“나중에 들고 온 컴퓨터도 똑같은 증세인가?”
안승복이 피대기의 말을 무시하기 위해 주제를 돌렸다.
‘너무 인위적이잖아. 서른이 넘었으면 그 정돈 좀 자연스럽게 하라고.’
예찬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싹싹하게 말을 받았다.
주제가 데이터 복구 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더 바랄 나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아마 그럴 거예요. 한쪽에 들어 있는 데이터를 복사한 USB로 전파된 것 같거든요.”
“음음, 그렇단 말이지.”
완전히 자신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대화에 얼이 빠져 있던 피대기가 정신을 차렸다.
“그쪽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손님을 세워 두고……!”
“그래도 잘 찾아왔네. 내가 고칠 수 있거든.”
그러나 피대기의 짧은 반항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흥분한 예찬이 눈을 빛냈고.
피대기의 얼굴도 기대감으로 상기되었다.
“정말인가요?”
“정말이지. 그런데 소리를 질렀더니 당이 떨어진 것 같아서 말이야.”
안승복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대기를 턱으로 가리켰다.
“거기 존댓말 좋아하는 분께서 요 근처 카페에 가서 음료 좀 사다 주시죠. 카페 이름은 ‘온 더 크림 브륄레’고 거기 시그니처 음료인 ‘크림 브륄레 팝핑 라떼’ 엑스트라 라지 사이즈를 먹어야만 머리가 좀 돌아갈 것 같네요.”
안승복의 당당한 태도에 피대기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왜 그래야…… 알겠습니다.”
그러나 피대기는 예찬의 싸늘한 눈길을 보곤 이성이 돌아왔는지 어깨를 늘어트렸다.
피대기가 기운 없이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고소하다는 듯 낄낄대던 안승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슬슬 고치면서 이야기해 볼까?”
“‘크림 브륄레 팝핑 라떼’가 없는데요?”
예찬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책상 앞에 앉은 안승복이 또다시 킬킬 웃었다.
“이까짓 거 고치는 건 식은 죽 먹기인데 뭘. 아까 있던 놈이 얄미워서 시킨 거지.”
‘성격 하고는. 그래도 자업자득이니 견뎌라, 피대기!’
아주 조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 또한 PiPiPi의 자업자득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