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16)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16화
범세혁이 자신의 유니폼을 찢어발긴 그룹 람의 김제우에게 손을 내민 순간, 현장에 있던 이클립틱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찢었다!’
저 매너 없는 선배 아이돌의 욕을 쓰고 싶어서 근질거리던 손가락이, 이제는 범세혁의 미친 활약상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마구 움찔거렸다.
‘이게 바로 마스터 피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나무 숲이 필요해…….’
‘스포 금지만 아니었으면, 아오!’
범세혁이 김제우를 넝마로 만드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직관한 것만으로 오늘 여기 온 보람이 차고도 넘쳤다.
범세혁은 김제우의 유니폼까지 야무지게 털어 주고 나서야 멤버들과 팬들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예찬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기립 박수를 보내지 않고서야 이 벅참을 감당할 수 없었다.
* * *
A팀의 예선에서 승리한 뒤, 축구 C팀과 D팀의 경기가 이어졌다.
치열한 접전 끝에 본선에서 A팀과 우승을 겨룰 상대는 C팀으로 결정되었다.
다시 실내 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바로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맛있게 먹어요.”
“아, 넵!”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기태랑 닮은 꼴 복숭아에게 도시락 봉투를 건넨 예찬은 한 번 더 웃어 보인 뒤, 다음 팬을 향해 다가갔다.
“와, 이거 봐.”
“완전 귀여워!”
“포카 봐봐요. 진짜 이번에 장난 아닌데요?”
“와, 두께 미쳤다…….”
먼저 봉투를 받은 팬들이 내는 즐거운 비명이 예찬의 귀를 간질였다.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네.’
점심 도시락은 지난 전아체 때와 마찬가지로 유명 프랜차이즈 도시락과 음료 세트였는데, 여기에 기본과 투명, 홀로그램까지 멤버당 3종류씩, 총 27장의 포토 카드가 함께 들어 있었다.
같이 나눠 준 간식 봉투에는 유명 떡집의 찹쌀떡과 멤버가 쓴 편지 한 장, 왕관을 쓴 복숭아 키링이 들어 있었고.
데뷔하고 반년도 되지 않아 ‘역조공 맛집’이란 별명이 붙은 레굴루스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도 팀장과 팀원들이 신경을 쓴 티가 팍팍 났다.
‘우리보다 더 역조공 잘했다는 팀이 나오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는 느낌이랄까.’
도시락을 다 나눠 주고 돌아오자 어쩐지 의기양양한 선우이경이 팬들 쪽을 향해 대놓고 목을 쭉 빼고 구경하고 있었다.
“뭐 해요?”
“잠깐 있어 봐.”
‘뭐지?’
때마침 선우이경이 기다리던 반응이 복숭아들 사이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어?”
“어, 이거…….”
이상한 탄성을 내지른 팬들이 이내 들고 있던 편지와 정면에서 싱글거리는 선우이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흠흠. 어때요, 복숭아? 제 편지 오늘은 알아보기 쉽죠?”
선우이경은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으응.”
팬들에게서 머뭇머뭇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이경이 편지라고?”
“어떤데? 진짜 알아볼 수 있어?”
“저도 좀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다른 멤버의 편지를 받은 팬들은 근처에 선우이경이 쓴 편지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아 헤맸다.
예찬 또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팬들 가까이 다가갔다.
“저 한 번만 봐도 돼요?”
“헉, 예찬이……! 네, 넵. 여기 보세요!”
가장 앞줄에서 앉아 있던 팬이 화들짝 자리에서 뛰어오르더니 들고 있던 편지를 예찬을 향해 내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예찬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조심스레 편지를 건네받았다.
“나도, 나도!”
“저도 보여 주세요!”
“…….”
호기심에 이끌린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예찬의 옆으로 다닥다닥 붙었다.
“아이 참, 쑥스럽게.”
전혀 쑥스럽지 않은 얼굴을 한 선우이경만이 조금 거리를 둔 채 자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게 뭐야?’
선우이경이 쓴 편지는 놀라우리만치 잘 읽혔다.
다만, 어색할 정도로 네모반듯한 글씨들의 향연이었다.
“이거 어떻게 한 거예요?”
“에헴. 특별한 비법이 있지. 우리 복숭아들이 내 글씨 해독하느라 힘들지 않도록…….”
거기까지 말한 선우이경이 체육복 품 안을 뒤져서 A4 용지 크기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짜잔! 요걸 대고 글씨를 썼어요!”
예찬은 물건의 정체보다 다른 게 더 궁금했다.
‘저걸 언제부터 넣고 있었던 거지?’
그러나 상냥한 복숭아들은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친절하게 선우이경에게 맞춰 주었다.
“어, 요술 책받침이다!”
“딩동댕! 정답입니다!”
누군가 물건을 보고 외치자 선우이경이 힘차게 윙크를 날렸다.
정답을 맞힌 복숭아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요술 책받침이 뭔데요?”
“아, 나 알아.”
“와, 진짜 오랜만이다!”
편지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멤버들이 이번엔 자연스레 선우이경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예찬 또한 편지에 미소를 얹어서 정중하게 돌려주고 책받침 구경에 나섰다.
“어, 뒷면이 까슬까슬해요.”
“그러게. 오돌토돌한데.”
요술 책받침을 처음 보는 멤버들이 신기하다는 듯 책받침의 뒷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이걸 대고 글씨를 쓰면 반듯하게 써지거든. 글자 교정용 책받침이랄까?”
이것만 있으면 자신도 얼마든지 또박또박 편지를 쓸 수 있다며 선우이경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선우이경은 그대로 기세를 몰아 팬들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잘 읽히죠?”
“으응…….”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이번에도 어쩐지 시원치 않았다.
선우이경도 팬들의 떨떠름함을 느꼈는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턱을 내리고 눈을 깜박거렸다.
“어…… 혹시 뭐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아니야.”
“이경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잘 읽혀!”
선우이경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팬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선우이경을 위로하는 말들엔 진심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우리 사이잖아요!”
선우이경도 그것을 느꼈는지, 결연한 얼굴로 팬들을 향해 호소했다.
잠시간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이클립틱들이 조심스레 한 사람씩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진짜 미안한데, 이경 체가 더 좋은 거 같아.”
“개성이 느껴진달까…….”
“오늘 것도 나쁘지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개성이 쪼오끔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 책받침을 쓰면 다들 비슷한 글씨가 돼 버려서.”
“이경이가 썼다는 느낌이 덜 들어서 아쉽다, 뭐 그런?”
“원래 이경 체에서 아주 살짝, 진짜 살짝만 더 해석하기 쉬우면 될 거 같은데…….”
팬들이 미안하다는 듯 계속 한마디씩 덧붙였다.
“크윽!”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우이경이 일부러 더 과장되게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자세를 취했다.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선우이경과 조금 거리를 벌렸다.
“복숭아들의 마음도 모르고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아니야, 이경아!”
“이것도 진짜 나쁘지 않아! 진짜로!”
“아니에요! 그렇게 상냥하게 말하지 말아요!”
고개를 세차게 내저은 선우이경이 이번엔 한쪽 무릎을 세우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저, 레굴루스의 귀염둥이 선우이경! 도구에 의지해서 쉽게 가려던 자신을 반성하겠습니다!”
“네? 레굴루스의 뭐라고요?”
차마 딴죽을 걸지 않을 수 없는 단어의 등장에 강해솔이 되물었으나, 선우이경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의 귀여움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앞으로는 편법에 의지하지 않고, 조금 더 해석하기 쉬운 이경 체를 만들겠노라고!”
연극 조로 선언한 선우이경이 양팔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와아아.”
“선우이경! 선우이경!”
“이경 체! 이경 체! 이경 체!”
친절한 복숭아들은 요상한 맹세를 한 선우이경을 향해 따뜻한 함성과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 주었다.
찰칵 찰칵.
그새 카메라를 들어 올린 팬들의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선우이경은 팬들이 찍기 편하도록 조금씩 각도를 돌려주기도 했다.
“어때요? 잘 나와요?”
“완전!”
“이경아, 조금만 오른쪽으로 틀어 주라.”
“네, 맡겨 주시죠!”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전개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예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클립틱이 행복하면 됐지.’
선우이경 덕분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씨 고운 이클립틱 덕분에 멤버들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남은 점심시간을 확인한 예찬은 잠시 대기실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자리를 비웠다.
예찬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야 끝에서 걸리적거리던 인영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예찬은 굳이 상대를 기다려 주지 않고 안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예찬 씨!”
팬들이나 외부 스태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예찬을 불러 세웠다.
“걸음이 되게 빠르시네요!”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호칭을 다시 ‘예찬 씨’로 돌린 박마루가 활짝 웃었다.
“일단 대기실로 갈까요? 저희 대기실에는 스태프들이 좀 계실 거 같은데…….”
“아, 저희 쪽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제 시합이 다 끝나서 다들 이미 퇴근했고, 제가 잠깐 볼일이 있다고 해서 매니저 형만 차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박마루는 오전에 있던 볼링 경기에서 나름대로 접전 끝에 패배했다.
경기 딸랑 하나 나가는 놈이 첫 경기에서 떨어져 버린 탓에 응원 온 리바디들은 어쩌나 싶었는데, 그 후 박마루가 내내 리바디 팬석에 붙어 있어서 걱정을 덜었다.
‘애가 멍청해서 그렇지, 나름대로 팬들을 좋아하긴 했지…….’
“그럼 선배님 대기실로…….”
이번엔 반대로 살짝 누그러진 예찬이 박마루의 뒤를 따랐다.
혼자 쓰기에 광활한 대기실 안은 박마루의 말대로 텅 비어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먼저 대기실로 들어간 박마루가 의자를 빼 주며 자리를 권했다.
예찬이 자리에 앉자 그 앞에 앉은 박마루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선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찬 님.”
“예찬 씨요.”
“네, 예찬 씨.”
“…….”
급하면 다시 님이라고 부를 거면서 대답은 참 잘했다.
“제가 드린다는 부탁은 아까도 짧게 말씀드렸지만, 저희 멤버인 찬양이에 대한 건데요. 저, 부탁드리는 처지에 이런 말씀드려서 정말 죄송한데, 제 얘기가 아니다 보니 꼭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긴장한 얼굴로 정찬양의 이름을 꺼낸 박마루가 송구하다는 듯 눈을 피했다.
잠시 비밀 유지는 약속할 수 없으니 여기서 끝내자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꾹 참았다.
“네, 그럴게요.”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
예찬의 말에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진 박마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찬양이가 요즘 많이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는 말로 어디 표현이 다 되겠어? 아주 180도 달라졌을 텐데.’
이어질 말이야 뻔했다.
지금까지 리스피릿에 더없이 헌신적이던 정찬양이 갑자기 돌변해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멤버들을 헌신짝만도 못 하게 취급한다, 뭐 이런 소리를 늘어놓지 않겠는가.
‘귀찮네. 귀신 같은 거에 씐 게 아니라 그냥 원래 그런 놈이니까 포기하고 너도 네 살길 찾으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앞으로 귀찮게 굴지 않으려나.’
“아무래도 찬양이가…… 뭐에 홀린 거 같거든요.”
‘역시.’
예찬이 더 해 보라는 듯 바라보자 하자 박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예찬의 예상과 영 달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