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20)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20화
양궁 연습용 천막의 안쪽은 제법 복작거렸다.
시합에 나가는 남녀 아이돌 전원이 천막 안에 전부 모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쪽으로 가요.”
지난 시합에도 참여했던 배새벽은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빠르게 가장 줄이 짧은 과녁판을 찾아냈다.
‘평소엔 맹해 보여도 이럴 때 보면 또 야무지단 말이지?’
“여기요.”
예찬과 강해솔을 줄 세워 둔 배새벽이 이번엔 어디선가 보호구와 장비를 챙겨 왔다.
“고맙다.”
장비를 받아 든 예찬은 원래도 반짝반짝한 배새벽의 눈이 평소의 배는 빛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관심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인가?’
“오, 이게 누구야. 배새벽 선수!”
배새벽의 도움을 받아 보호구를 차고 있는 세 사람의 곁으로, 지난 대회 양궁 해설을 맡았던 국가 대표 출신 코치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이번엔 배 선수 빼고 멤버가 바뀌었네요?”
“안녕하세요, 레굴루스 리더 하예찬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레굴루스 강해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차영이에요. 나도 잘 부탁해요. 상록 씨는 참 잘했었는데…… 그래도 선수 바꾼 게 나을 거 같네요.”
추석 전아체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0점 사냥꾼 범세혁이 떠오른 건지 코치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힘내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응원의 말을 남긴 이차영 코치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은 과녁 앞에 설 수 있었다.
“네, 집중해서…… 좋아요.”
“자세 다시 한번 잡아 볼게요.”
국대 출신 코치 외에도 자세나 요령을 봐주는 전문가들이 있었기에 방치되는 아이돌은 없었다.
그중엔 지난 며칠간 레굴루스의 연습을 봐줬던 코치도 있었기에, 예찬과 멤버들은 편하게 시합 전 마지막 연습을 이어 갔다.
“드디어 나왔다!”
“다들 고생했어!”
연습을 마친 세 사람이 천막 밖으로 나오자,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다른 멤버들이 반색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e스포츠는요?”
“예찬아, 쉿. 우리는 오늘 그런 이름의 시합이 있다는 걸 잊기로 했어.”
선우이경이 검지를 들어 올리더니 느끼하게 속삭였다.
“후후…….”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도다…….”
같이 경기에 나간 심상록과 정의탁의 반응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처참하게 깨졌네.’
예찬은 흔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정의탁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당연히 정의탁은 펄쩍 뛰었다.
“이거 무슨 뜻이에요? 왜 하필 저를 토닥이는 건데요?! 아니, 해솔이 형도? ……새벽이 너마저?!”
* * *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응, 형도 조심해서 들어가.”
멀어져 가는 매니저의 차를 잠시 지켜보던 박마루는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홀로 서 있자 여러 가지 잡념이 떠올랐다.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싸늘하기 그지없던 예찬의 목소리였다.
– 그렇게 걱정되면 병원에 데리고 가세요. 여기서 애먼 저한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너무 막무가내였나.’
정찬양이 걱정된다는 핑계로, 아무 관계 없는 타인에게 부담스럽게 군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타인인가…….’
팬덤 사이는 최악이고, 대훈이는 좋아하고, 찬양이는 어쩐지 꺼리는 후배.
예찬과 자신은 딱 그 정도의 사이임에도 무례할 정도로 밀어붙여 버렸다.
‘왜냐면…… 딱 그 정도 사이인데도 나한테 엄마 건강에 대해서 경고해 줬잖아.’
말로는 찜찜해서 얘기하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친절한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주술이니 무당이니 처음 느꼈던 꺼림칙했던 감정이 사라지자 연락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말이나 표정으론 싫은 티를 내도 결국 어느 정도 받아 주시니까, 멋대로 친해졌다고 생각했어…….’
한없이 바닥을 파고 있으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박마루는 무거운 발을 거의 끌 듯이 움직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쩌면 상대방은 이쪽이 선배기 때문에 억지로 받아 줬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게 참다 참다 화가 터져 버린 거지…… 아아…….’
마지막 순간, 냉정하게 벽을 치고 나가던 모습을 떠올리면, 다시는 예찬과 말도 섞지 못할 것 같았다.
답답했다.
‘왜지…… 앞으로 이런 종류의 상담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만 세상은 넓고, 예찬이 아니어도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한때는 그들의 번호가 박마루의 휴대 전화에 잔뜩 저장되어 있기도 했다.
……예찬이 그런 곳에 돈을 쓰지 말라고 해서 지금은 전부 지웠지만.
“어, 마루 왔냐.”
“전아체 또 나갔다며? 지금 들어오는 거 보니 일등 했어?”
“진짜? 마루 형 뭐 나갔는데?”
“…….”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고 숙소 문을 열자 이제는 가족보다 더 익숙해진 멤버들이 박마루를 맞이했다.
수고했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리는 정찬양과 눈이 마주치자, 어째서인지 처음 멤버들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좋았던 순간도 많았지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실수도 있었고, 오해도 있었고, 원망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미우나 고우나 박마루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순간 강한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뭐?”
박마루는 대답 대신 세차게 몸을 돌렸다.
“야, 뭔데!”
박마루의 다리는 좀 전과 달리 망설임 없이 빠르게 땅을 박차고 나아갔다.
닫힌 현관 너머로 들리는 당황한 멤버들의 목소리마저 등을 밀어 주는 것 같았다.
아직 같은 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음속 안개가 걷혔다.
어째서 답답했는지 이제는 알았다.
‘나는 예찬 씨랑 친구가 되고 싶어.’
박마루는 예찬이란 사람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
불편한 사이임에도 박마루의 가족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귀찮아도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예찬이 어느새 마음에 들어왔다.
영적인 상담이 아니라도 그냥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어도 괜찮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멈춰 있는 호수가 아니라 흐르는 강이지 않은가.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가 중요했다.
‘예찬 씨에게 사과하자! 제대로!’
그러려면 저지른 잘못은 매듭지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고양 체육관으로 가 주세요!”
택시에 올라탄 박마루는 전국 아이돌 체육 대회가 열리고 있는 목적지를 힘차게 외쳤다.
* * *
“저거 또 하네.”
찬양의 말에 예찬이 고개를 돌렸다.
TV 화면엔 각양각색의 운동복을 입은 아이돌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거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는 체육관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매년 반복되는 익숙한 장면에 예찬도 아는 체를 했다.
“아, 전아체.”
“나는 잘 모르지만, 이거 되게 문제 많지 않아? 매년 누가 다쳤다는 얘기를 본 거 같은데.”
“뭐, 그렇긴 하지.”
찬양의 물음에 예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찾아보니까 시청률도 영 안 나오는데, 대체 왜 폐지를 안 하는 거지?”
얼마 전 좋아하던 예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찬양이 이해할 수 없다며 툴툴거렸다.
“글쎄…….”
찬양보다는 연예계에 한발 가까이 걸쳤지만, 결국 연습생 나부랭이일 뿐인 예찬도 이유를 모르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른들의 사정이 있겠지. 그래도 저기 간 팬들은 즐거워 보이는데?”
과일을 깎아 온 하경이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예찬과 찬양의 시선이 동시에 TV로 향했다.
마침 열심히 플래카드를 흔드는 팬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뭐, 그렇긴 하네.”
“가까이서 보니까 좋으려나?”
“그리고 원래 스포츠 구경이 재밌긴 하잖아.”
“아, 완전 인정.”
동갑내기 동생 둘이 떠드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하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거 매년 하는 거면 우리도 다음에 한번 가서 볼까?”
“어어?”
TV에 고정되어 있던 두 사람이 하경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스포츠 구경 좋아하잖아.”
“형, 저기 가는 건 다 출연하는 아이돌들 팬이야. 우리 자리가 어디 있어.”
“예찬이 너 좋아하는 아이돌 없어? 누군가를 동경해서 아이돌을 하고 싶었을 거 아니야.”
예찬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셋이 같이 응원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에 예찬이 뺨을 긁적거렸다.
“난 딱히 좋아하는 아이돌은 없는데…….”
“정말? 그러면 왜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건데?”
“음…….”
찬양은 겨울 방학을 맞이하고 일주일 중 6.5일은 연습실 붙박이로 살고 있는 예찬을 알고 있기에 대단한 목표가 있으리라 믿었다.
참고로 오늘은 예찬이 유일하게 쉬는 나머지 0.5일이었다.
“……딱히 아이돌이 내 꿈이야! 하고 연습생이 된 게 아니고, 사장님이 의식주를 해결해 주신대서 덥석 따라간 건데.”
“뭐어?”
“게다가 데뷔하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찬양보다 하경의 얼굴이 거무칙칙하게 물들었다.
찬양뿐만 아니라 하경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경이 입을 열었다.
“예찬아, 형이 많이는 못 벌어도 우리 입에 풀칠할 만큼은 벌어. 만약 하고 싶지 않은데 돈 때문이라면…….”
“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아저씨는! 처음에 그랬다고요, 처음에!”
진지하게 두 손을 붙잡은 하경을 예찬이 질색하며 밀어냈다.
“지금은 완전 진심이거든요?”
특별히 좋아하는 선배는 없어도 업계 선배들을 존경하고 있다고 예찬이 덧붙였다.
“……뭐, 연습생 나부랭이가 선배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좀 우습지만. 그리고 먹고사는 것 때문에 아이돌 하려는 거면 당장 도망쳤지! 알바를 하는 게 더 생산성 있는데!”
“……그런가?”
“그렇고말고!”
큰 소리로 외친 예찬이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지 말라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같이 연습하는 애들이랑도 정들었다고요. 이제 걔네랑 같이 데뷔하는 거 말고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어.”
“…….”
회사 연습생들과 끈끈한 유대를 자랑하는 말에 찬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치한 감정이 심장을 간질였기 때문이었다.
“아, 같은 회사 연습생들? 지금 몇이랬지? 예찬이 너까지 다섯이랬나?”
찬양과 달리 하경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연습생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형이랑 동생 있고, 나랑 같은 날 들어온 동갑내기 한 명이랑, 석 달 뒤에 들어온 애 하나 있어.”
“다들 성격은 어때? 괜찮아?”
“착해.”
“형이 걱정을 덜 수 있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래?”
“어, 나랑 같은 날 들어온 애가 특히 착해.”
“그게 구체적인 거야?”
“이름은 박마루고, 완전 순해. 내 말도 잘 들어.”
“하…… 형이 한번 보고 진짜 괜찮은지 봐야 하는데…….”
“아, 뭔 소리야! 형이 애들을 왜 봐! 주책이야!”
“주책은 무슨! 그러지 말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설계를…….”
“설계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회사 반경 1km 안에 접근하지도 마세요.”
예찬과 하경이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찬양은 여전히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때 찬양의 머릿속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보물처럼 쥐고 있던 걔들.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영 쓰레기야.
뭐, 이젠 너도 알겠지만.
동시에 정찬양은 깨달았다.
나 또 잠들었구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