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22)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22화
때로는 악의가 없기에 더 아픈 말도 있는 것임을 새삼스레 배운 예찬은 양궁 8강전에서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세 발의 화살이 맞힌 과녁은 순서대로 8점, 8점, 9점.
8강전에 나온 선수들의 개인 기록 중 안정적으로 상위권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점수였다.
[배새벽 선수, 어김없이 10점! 지난 대회에서는 아쉽게 한 발의 화살이 9점에 맞았는데요, 과연 이번 대회에서 그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팀 대결도 팀 대결이지만 배새벽 선수는 혼자만의 도전을 하나 더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죠?]문제가 있다면 같은 팀 멤버들에겐 미치지 못한다는 것 정도일까.
배새벽은 전부 10점에 화살을 명중시켰고, 강해솔은 9점, 10점, 9점을 기록했다.
‘아니, 문제까진 아니지만…… 그래, 뭐 팀원들이 잘하면 좋은 거지…….’
“얘들아, 고생했어! 준결승도 힘내!”
“배새벽 멋있다!”
“해솔아, 최고였어!”
“예찬이도 잘했어!”
“하하.”
분명 절대 평가 기준으로 줄을 세우면 우등생임에도 팀 내에서 상대적 최약체 포지션을 맡은 예찬에게 쏟아지는 응원은 결이 조금 달랐다.
그래도 8강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온 멤버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팬들을 보니, 예찬도 그냥 기분이 좋았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또 어떤가.
어쨌든 팬들이 보내 주는 응원인데.
예찬은 힘차게 양팔을 흔들었다.
‘4강도 있고, 결승도 있으니까. 내 실력은 그때 증명해서 보이면 되지.’
물론 기분이 좋은 것과 ‘하찮은 예찮이’ 타이틀을 떼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 * *
– 너 진짜 전아체 녹화 갔어??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한 기해랑의 미간이 구겨졌다.
양궁 시합을 끝내고 가까이 다가온 멤버들을 구경하느라 바쁜데 눈치 없는 엄마 아들한테 답장해 줄 여유도 의리도 없었다.
“네, 그럼 다음 타자는…… 우리 레굴루스의 귀염둥이! 정! 의! 탁!”
“아, 진짜!”
선우이경의 부름에 머뭇머뭇 앞으로 걸어 나온 정의탁이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의탁! 정의탁! 정의탁!”
“의탁아아아아!”
멤버들과 팬들이 정의탁의 이름을 연호할수록 정의탁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졌지만, 그래도 춤을 멈추진 않았다.
잠시 다른 세트를 설치하는 사이, 팬들의 지루함을 덜어 주겠다며 레굴루스가 시작한 작은 장기 자랑에 점점 불이 붙고 있었다.
근처에 앉은 다른 팬들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짧게라도 틈이 날 때마다 이클립틱 앞으로 부리나케 달려와 재롱 잔치를 여는 모습이 부러운 것 같았다.
기해랑의 어깨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기해랑이 생각하기에도 레굴루스 멤버들은 이 체육관 안에서 제일 팬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속을 어찌 알겠냐마는, 그래도 마음 가는 데 몸도 가는 것 아닐까?
한창 장기 자랑에 불이 붙어 갈 무렵, 씨름 세트장이 완성되었다.
레굴루스 팬석과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을 보니 다시금 탄식이 터져 나왔다.
‘멀다, 멀어.’
앞선 시합 때도 그랬지만 맨눈으로 보기엔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합 때나 얼굴 보기 힘들지, 다른 땐 지금처럼 꼭 요 앞에 붙어 있는데 뭐.’
축구처럼 따라가서 보는 경기나 체육관 전체를 도는 계주가 아니면 스크린으로 멤버들 얼굴을 구경해야 함에도, 기해랑은 그저 즐거웠다.
녹화 시간이 평소보다 길어질 것 같다고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좋았다.
결승을 치르러 떠나기 전, 레굴루스는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당부를 남겼다.
“혹시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면…….”
“바로 말하기! 약속합니다!”
이클립틱에게 뒷말을 가로채인 예찬이 눈을 깜빡거리다 피식 웃었다.
셔터 소리가 빠르게 터졌다.
“약속했어요.”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가볍게 흔들어 보인 예찬이 멤버들과 씨름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얘들아, 뛰지 마!”
“다치면 안 돼!”
팬들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이내 멤버들의 걸음이 경보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팬석은 또다시 웃음으로 뒤덮였다.
기해랑 또한 함박웃음을 짓고 멤버들을 배웅했다.
그때 또다시 스마트폰이 주머니 속에서 요란하게 진동했다.
– 그거 되게 늦게 끝나지 않아? 오빠가 데리러 갈까?
이번에도 기태랑이었다.
‘면허도 없으면서 데리러 와서 뭘 어쩌겠단 거지?’
무시하려던 기해랑이 문득 생각을 바꾸고 화면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 개재밌다
딱 네 글자를 써서 보낸 기해랑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문자를 하나 더 추가했다.
– 진심
그리고 스마트폰 설정을 무음으로 바꿨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테러 수준으로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진동이었으면 전화 오는 줄 알았겠네.’
뭐가 어떻게 재밌는 거냐부터 시작해서 왜 자기는 안 데리고 갔냐는 헛소리까지 쏟아지고 있는 문자를 대충 확인하고 있자, 옆자리 팬이 말을 걸어왔다.
“태권Z 님, 저 예비로 하나 더 가지고 와서요. 필요하시면 쓰실래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쌍안경을 본 기해랑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언니!”
“어휴, 뭘 이런 거로.”
쌍안경을 꼬옥 쥔 기해랑은 혈육의 문자 메시지 같은 사소한 일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치워 버렸다.
* * *
“자, 그러면 결승을 앞두고 우리 리더가 한 말씀 해 주시죠.”
“제가요?”
예찬이 자신을 가리키자 말을 꺼낸 선우이경을 포함한 멤버들이 좋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들이 좀 전엔 내가 씨름 선수인 것도 잊고 있었으면서…….’
그러나 멍석을 깔아 주면 절대 빼는 법이 없는 예찬은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자.”
레굴루스를 씨름 결승전까지 올린 주역인 채은성과 우휘겸이 진지한 얼굴로 예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다치지 않는 게 최우선이고. 알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부 씨름 결승 첫 번째 시합이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지난 대회 우승자인 레굴루스 대 이번 대회 첫 참가인 안다미로의 대결이 이제 곧 화면 속 씨름판 위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지난 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까지 전패를 기록하고 있는 레굴루스가 우세할 것 같죠?] [그건 또 알 수가 없습니다. 레굴루스도 지난 대회에 처음 참여했는데 우승까지 간 거니까요. 안다미로도 지금까지 전적이 전부 2대 0이거든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팀입니다.]안다미로.
지난 12월에 데뷔한 7인조 신인 그룹으로, 예찬의 기억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 팀이다.
데뷔한 지 반년이 되지 않아 멤버 중 반수 이상이 탈퇴하고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는 아주 강렬한 행보를 보였으니 쉽게 잊긴 어려웠다.
‘탈퇴 사유도 하나같이 화려했지…….’
학교 폭력, 혼인 빙자 사기, 불륜에 혼외자 인지청구 소송까지.
전부 가장 먼저 터진 멤버한테 엮인 사건들이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폭죽처럼 연달아 터지는 사태를 구경한 예찬은 리스피릿 멤버들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애들은 멍청해서 그렇지 사람은 착하다고.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
이제는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팀에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선배님, 저는 전아체 씨름은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놈이었다.
씨름판 위로 올라온 첫 번째 선수를 바라보며 안다미로의 멤버, 한유건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예찬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한유건은 안경을 치켜올리고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씨름은 샅바 하나를 달랑 걸치고 남자 대 남자가 모래판 위에서 오로지 맨몸으로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 아닙니까? 저렇게 위아래 옷을 다 걸치고 하는데 대체 씨름 정신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음.’
예찬은 굳이 하의도 안 입고 샅바만 걸치면 큰일 난다는 말과 여자 씨름도 있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어차피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놈이라.’
한유건은 안다미로의 데뷔 당시엔 팀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멤버였다.
생긴 건 좀 깔끔하고 키도 훤칠한데,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멤버.
근데 무대에선 구석에 수납해 놔서 눈에 안 띄는 그런 멤버.
그러나 안다미로 멤버들의 사건 사고가 도미노처럼 주르르 터지며 팀이 해체 위기에 처하자, 한유건은 소년 가장으로 다시 태어나 팀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노력했다.
리스피릿 시절엔 다른 그룹 멤버들과 기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던 예찬이었으나, 한유건에 대해선 좀 안됐다는 마음이 들어서 종종 참견하곤 했었다.
‘저 이상한 성격만 아니었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챙겼을지도.’
예찬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한유건은 당장이라도 상의와 하의를 벗어 던질 기세로 눈을 빛냈다.
“만약 저와 선배님이 결승 마지막 시합을 치르게 된다면, 우리가 진정한 씨름이 뭔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죠!”
“전 빼 주세요.”
벗고 싶으면 혼자 벗으세요.
얘네가 왜 전승으로 올라왔는지 알 거 같다.
‘이 자식이 자기 차례가 오면 벗고 시합에 나갈 거라고 예고라도 했나 보군.’
한유건을 벗기지 않으려는 멤버들의 눈물겨운 싸움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레굴루스의 우휘겸 선수! 먼저 1승을 따냅니다! 안다미로는 첫 패배네요!] [네, 마음을 잘 추슬러야 할 텐데요.] [레굴루스가 먼저 우승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그때 타이밍 좋게 첫 번째 시합이 끝이 났다.
상대 선수를 일으켜 준 우휘겸이 모래판 아래로 내려오고, 채은성이 배턴을 터치하듯 움직였다.
“임재우 파이팅!”
한유건은 두 번째 순서로 모래판 위로 올라가는 자기 팀 멤버를 응원했다.
응원을 받은 상대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갓 데뷔한 신인이니 조금이라도 카메라에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그렇다고 이기면 한유건이 벗고 나갈 거라며 나댈 것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
[채은성 선수! 밭다리 걸기! 들어갔어요!] [지난 추석의 설움을 결승전 모래판 위에 깔끔하게 털어 버리는 채은성 선수!] [남자부 씨름은 우승 레굴루스, 준우승 안다미로입니다!] [레굴루스, 지난 대회에 이어 2연패입니다!]채은성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깔끔하고 완벽한 기술로 승리를 따냈다.
“흠…….”
그새 벗어 두었던 트레이닝복 상의를 집어 들며 한유건이 아쉽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찬은 오늘 두 번째로 모래판을 밟았다.
“채은성!”
당연히 승리의 주역인 채은성을 칭찬하기 위해서였다.
“헹가래 치자, 헹가래!”
“들어 올려 버려!”
“채은성! 채은성!”
“잠깐만요!”
187cm의 성인 남성이 쑤욱 위로 올라갔다.
처음엔 당황하던 채은성이었으나, 몇 번 위로 붕붕 던져지자 좋다고 꺄륵거렸다.
“채은성! 채은성!”
“이히히힛!”
정말로 한 시합도 나가지 않고 우승해 버린 예찬은 시합에서 쓸 일 없던 힘을 헹가래에 쏟아부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