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23)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23화
헹가래 세리머니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갈 무렵, 한유건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예찬의 뒤로 쓱 다가왔다.
“진짜 씨름이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없었던 게 아쉽군요. 선배님도 같은 마음이신 것 같네요.”
“제가요?”
예찬이 정색하고 되물었으나, 한유건은 입꼬리 한쪽을 올려 씨익 웃더니 떠나갔다.
‘미친놈.’
한유건은 정말로 벗을 놈이었다.
채은성이 이겨서 다행이었다.
‘쟤네 팀에게도, 전아체에게도 말이지.’
그래도 팀이 터지기 전이라 눈에 총기는 없어도 생기는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심란했다.
예찬은 오래간만에 리셋을 하면서 여러 번 생각했던 것을 되새겼다.
‘내가 모든 사람을 다 도울 순 없어.’
미래를 알고 있다고 모든 걸 다 바꿀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미 한유건이 다른 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도록 몇 번 도왔다가 더 크게 피를 봤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그냥 앞으로 살면서 도울 일이 있으면 돕자. 그게 최선이야.’
답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씨름 결승이 끝난 뒤에 이어진 것은 축구 결승이었다.
“다녀올게.”
스태프들의 재촉에 팬석에 들를 새도 없이 밖으로 나온 멤버들은 예선 승리의 주역인 범세혁과 우휘겸, 그리고 심상록을 배웅했다.
그렇지 않아도 낮았던 기온은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내려갔다.
“이 날씨에 축구가 가능한가요?”
패딩 안쪽으로 코끝까지 얼굴을 숨긴 정의탁이 질색했다.
“우리 아버지 조기 축구 눈 와도 나가시던데.”
“와.”
“아버님 존경합니다.”
강해솔의 말에 멤버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좋아서 하는 거지만…….”
축구장 안에서 몸을 풀고 있는 아이돌들을 흘낏 바라본 강해솔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예찬 또한 지극히 동감하는 바였다.
‘인간 학대다, 인간 학대.’
시합에 나가는 아이돌들은 물론이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고생이었다.
아무 방향으로나 고개를 돌려도 추위로 벌벌 떠는 아이돌들과 팬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전국 아이돌 체육 대회 축구 경기 남자 결승전이 이제 시작될 예정입니다.] [치열한 시합 끝에 결승전에 진출한 것은 A팀과 C팀입니다.] [A팀은 WW, 기어, 블랑딕스, 레굴루스, 펠리치타 총 다섯 팀의 연합이고, C팀은 솔로 가수 연합과 OPE…….]곧 시합이 시작되려는지 해설들이 각 팀 소개와 예선전에서 활약한 선수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온 것은 예선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여 돋보였던 범세혁이었다.
“오, 세혁이 제일 처음으로 언급됐다. 진짜 MVP 탈 수도 있겠는데?”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선우이경이 씩 웃었다.
오전 경기 전엔 범세혁과 우휘겸, 심상록 셋이 다칠 일 없게 벤치에 쪼르륵 앉아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었다.
예찬의 마음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셋 다 승리욕도 장난 아니고 실력도 쟁쟁하니 예비 선수로 빠질 일은 없겠지…….’
감독이 빠지라고 하면 다시 생각해 보시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놈들이었다.
오전 경기에선 다행히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나 날도 더 추워지고, 시합에 나가는 아이돌들의 체력과 집중력도 떨어진 상태라 걱정이 되었다.
‘뭐, 애들도 아니고 조심하겠지.’
[어, 조명이 켜졌네요. 시합 중간에 켜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미리 켜고 시작하려나 봅니다.] [겨울이라 해가 너무 빨리 떨어졌어요. 그래도 경기에는 큰 지장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조명이 환하게 비치는 운동장 안으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아이돌들이 입장했다.
다행히 예비 유니폼이 있었는지 오전 시합에서 유니폼이 낡은 걸레처럼 찢어졌던 범세혁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범세혁 멋있다!”
“우휘겸 최고다!”
“심상록 파이팅!”
좀 전까지 추위가 어쩌고저쩌고 구시렁대던 멤버들이 표정을 싹 바꾸고 세 사람을 응원했다.
[대망의 축구 결승, 주심의 호루라기와 함께 심상록 선수의 킥오프로 시작합니다.] [범세혁 선수에게 패스. 바로 C팀 진영을 파고듭니다!] [두 선수가 같은 그룹이라 그런지 호흡이 척척 맞네요.] [어쩌면 평소에 멤버들끼리 모여서 축구를 해 왔을 수도 있겠는데요?] [연습하다가 쉬는 시간에 다 같이 공 차러 가고, 쉬는 날에도 축구하고! 재미있겠네요!]‘아닌데요.’
해설진의 터무니없는 상상에 어이가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채은성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숨 쉬는 것 말고 다른 운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남아 있으면 이경이 형이 쉬는 시간을 안 주는데.”
귀가 밝은 선우이경은 당연히 채은성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선우이경의 팔이 채은성의 목에 감겼다.
“우리 은성이, 혹시 그래서 불만이었어?”
“아니요, 좋아서 그러죠, 좋아서. 하예찬, 웃지 마라.”
채은성이 무슨 말을 하냐며 정색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표정이 너무 웃겨서 조금 웃음이 새어 나왔더니 매서운 눈길이 날아왔다.
[범세혁 선수, 제쳤습니다!]그때 해설이 흥분한 목소리로 범세혁의 이름을 불렀다.
“……!”
멤버들의 집 나갔던 집중력이 단번에 돌아왔다.
미어캣처럼 패딩 안에서 고개를 쭈욱 뺀 멤버들은 눈으로 범세혁을 쫓았다.
수비수 하나를 가볍게 제친 범세혁이 그대로 공을 드리블해 상대 팀 진영 중앙까지 파고들었다.
이번엔 수비수 둘이 동시에 범세혁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범세혁은 MVP 굳히기에 들어갔다.
“……!”
[와, 방금 보셨나요!]절묘하게 두 선수의 사이로 공을 찬 범세혁은 폭발적으로 가속도를 높이며 수비수들 사이로 달려 나가 다시 공을 잡았다.
흥분을 참지 못한 멤버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예찬은 손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드는 통증에 잠시 주춤했다.
“와, 범세혁, 와, 진짜, 와…….”
채은성은 집중력이 집을 찾아 돌아온 대신 어휘력이 집을 나갔는지 감탄사만 반복해서 내뱉고 있었는데, 한 손으로는 수건을 꽉 쥐고 나머지 손으로는 예찬의 손을 수건 대신 쥐고 있었다.
‘이 자식이 남의 손을 아주 쥐어짜네?’
내 손이 빨래야, 뭐야?
그러나 놓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경기장 상황이 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치고 달리기였죠!] [범세혁 선수가 벌써 수비수 셋을 제쳤어요! 어어, 말씀드리는 순간, 이번엔 페이크로 정지석 선수를 제치네요!] [범세혁 선수, 그대로 슈웃!]“……!”
범세혁의 왼발이 강하게 공을 때렸다.
빠르게 날아간 공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린 골키퍼를 지나쳐 골대 그물을 흔들었다.
[골! 골입니다! 전반 21분, A팀 범세혁 선수의 선제골!]“우와아아아아!”
“범세혁, 사랑해!”
“의탁아, 형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범세혁의 멋들어진 골에 멤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여러분, 쟤가 제 친구…… 아, 깜짝이야!”
양팔을 하늘을 향해 쭉 뻗으려던 채은성이 같이 딸려 오는 예찬의 손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뿌리치듯 예찬의 손을 내던진 채은성은 그에 그치지 않고 예찬을 흘겨보기까지 했다.
예찬은 그제야 지금 느낀 것이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랑 되게 비슷한 장면이 지난 전아체 때도 있지 않았나?’
“아, 하예찬 뭔데!”
“…….”
정말 이번에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 * *
전반전 33분.
따끈따끈한 신인 가수 펠리치타의 제리가 A팀의 두 번째 골을 터트렸고, 우승기가 한층 이쪽으로 기울었다.
후반전을 앞둔 쉬는 시간, A팀 감독은 지난 예선과 달리 싱글벙글 웃느라 바빠 보였다.
[후반전, 피스 선수의 킥오프로 시작합니다.]후반전이 재개된 이후에도 A팀 선수들은 한 번 넘어온 분위기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C팀도 어지간한 축구 청년들을 모아 두었는지 오히려 전보다 더 의욕이 충만해 보였다.
A팀 선수들에게도 그 의지가 영향을 끼쳤는지, 모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넘치는 의욕은 사고를 불렀다.
삐이이익―!
심판의 호루라기가 찢어질 듯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개인기로 공을 운반하던 범세혁이 어색하게 자리에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막 범세혁이 제친 수비수가 자기 발목을 붙잡고 잔디에 누운 채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이고…….”
선우이경이 침음을 흘렸다.
범세혁의 잘못은 아니었다.
또다시 공을 가지고 질주하는 범세혁을 막고 싶었던 C팀 수비수가 태클을 걸려다가, 같은 팀 수비수의 발목을 세게 걷어차서 벌어진 사태였으니까.
“어떡해!”
“영수야!!”
근처의 팬석에서 넘어진 가수의 본명을 부르며 걱정하는 소리가 중구난방으로 쏟아졌다.
예찬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범세혁 발목이 나갈 뻔했잖아…….’
잽싸게 피하지 않았으면 지금 잔디밭에 누워 있는 것은 C팀 수비수가 아니라 범세혁일 뻔했다.
예찬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이 한겨울에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흥분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벤치로 못 빼나?”
“가서 애 놀랐을 테니까 빼 달라고 해 볼까요?”
선우이경이 살짝 질린 것 같은 기색으로 중얼거리자 채은성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예찬은 일어서려는 채은성을 붙잡았다.
“좋은 소리 못 들을걸. 신인이 건방지다는 소리나 듣지.”
“그래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좀 조심하겠지.”
우리 팀도, 저쪽 팀도.
예찬의 말에 채은성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는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C팀의 피스 선수 대신 백선빈 선수가 들어오네요.] [피스 선수,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태클을 당한 선수가 교체된 후, 다시 후반전이 재개되었다.
결론 먼저 말하자면, 예찬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태클 전과 달리 몸을 사리는 아이돌들이 많이 늘긴 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몇몇 아이돌들의 행동은 그야말로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C팀의 프리킥 찬스에서 헤딩을 하려는 선수와 그걸 저지하려는 선수가 거하게 부딪혀 한쪽이 제대로 코피가 터졌다.
벤치로 빠진 선수의 코피가 채 멎기도 전에, 이번엔 마음만 앞서서 패스를 저지하려던 C팀의 수비수가 공과 안면 박치기를 해서 또 코피를 봤다.
이쪽은 무려 쌍코피였다.
피를 보고 흥분한 건지 C팀 공격수의 팔꿈치가 A팀 수비수의 눈썹뼈를 제대로 긁기도 하고, A팀 공격수의 발이 C팀 공격수의 정강이를 강타하기도 했다.
정말 축구장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사건과 사고를 보여 주겠다는 듯, 모든 일은 연달아 터졌다.
그 야단법석을 지켜보며, 팬석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해졌다.
[선수들 침착해야 합니다. 다들 지금 시야가 너무 좁아졌어요.] [예, 맞습니다. ……후반 29분, 범세혁 선수의 스로인으로 시합이 재개됩니다.]이 난장판을 계속 설명하고 있는 해설진들 또한 굉장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
예찬은 생각했다.
오늘 끝까지 시합을 진행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후론 전아체에서 축구 종목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