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28)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28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흘려들었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 너 아까 저쪽에서 박마루 봤다고 하지 않았어?
– 어어…… 근데 잘못 봤나 봐. 지금은 안 보이네. 그냥 닮은 사람이었나?
만약 정말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정말 바보 같은 놈일 것이다.
예찬은 다시 스마트폰 수신 내역을 확인했다.
스팸 메시지 함부터 부재중 착신 내역까지 샅샅이 뒤져도 박마루의 이름 석 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박마루가 만약 나한테 볼일이 있었다면 이 추위에 밖에서 바보같이 기다리지 않고 연락했겠지. 아니면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든가.’
아무리 CBC 측에서 입구를 빡빡하게 통제한다고 한들, 박마루 정도면 적어도 방송 관계자들에겐 얼굴이 명함이었다.
‘제일 가능성 있는 건 타 팬들과 기태랑 양쪽 다 박마루랑 닮은 사람을 보고 착각한 거겠고, 만약 진짜로 박마루였다면 그 띨띨한 놈이 대기실에 뭘 두고 오는 바람에 잠깐 찾으러 왔었단 게 그럴듯하지. 응, 그게 그럴듯한데…….’
어째서일까.
그럴듯하지 않은 가설에 근거 없는 확신이 드는 것은.
‘아니, 근거는 있나.’
박마루에 대한 거라면 충분히 예찬의 느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찬만이 기억하는 시간에서 오는 직감이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적중률이 꽤 높은.
예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마루가 얼어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되지도 않는 허세는 부리지 않기로 했다.
“인섭이 형, 아까 복숭아 분 축구장이랑 이어지는 출구 쪽으로 나가셨어요?”
“응? 어어.”
축구 결승 때 보았다니 그쪽이겠지 추측하고 매니저에게 확인하자, 바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진짜 미안한데 저 잠깐만 나갔다가 올게요.”
“예찬이 무슨 일 있어?”
가방을 들어 올리던 선우이경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장서서 정의탁을 놀리고 있었는데, 참 지치지도 않고 여기저기 잘도 참견하는 사람이다.
예찬은 괜히 얼버무리지 않고 솔직하게 지금부터 뭘 하러 갈 것인지 전했다.
“박마루 선배님이 잠깐 보자고 하셔서요. 오래 걸릴 거 같진 않은데 먼저 들어가셔도 돼요.”
박마루가 직접 보자고 한 건 아니지만, 예찬의 안에선 대충 비슷한 의미였다.
“박마루 선배님이? ……예찬이 너는 선배들한테 정말 인기가 많구나. 오래 안 걸릴 거 같다니까 우린 차에 가 있을게.”
선우이경이 가엾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해 봤지만 역시 먼저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짐은 두고 가. 내가 차에 가져다 둘게.”
“네. 고마워요, 형.”
피곤한 멤버들을 괜히 더 오래 붙잡아 두게 되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예찬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축구장 방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없으면 좋겠다.’
그냥 정말로 사람들이 잘못 본 거든, 아니면 박마루가 맞긴 하지만 벌써 돌아갔든, 어느 쪽이든 좋으니 헛걸음을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 예찬 씨. 안녕.”
‘근데 이럴 것 같더라.’
잠시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을 몰아쉬던 예찬을 발견한 박마루가 구김살 없이 웃었다.
하얗게 번지는 입김 사이로 보이는 박마루의 코끝이 빨갰다.
* * *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열일곱 살, 2월 16일.
며칠 전 중학교 졸업식을 마친 예찬은 떨리는 마음으로 LEE 엔터 앞에 도착했다.
사장이 사람을 보내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홀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 도착한 회사 입구에서, 예찬은 박마루를 처음 보았다.
커다란 배낭을 바리바리 메고 온 예찬과 달리 편의점 비닐 봉투 하나를 손목에 달랑 건 소년은 얼마나 거기에 서 있던 건지 뺨도 코도 빨갛게 꽁꽁 얼어 있었다.
‘연습생인가?’
이 시간에 기획사 앞에서 얼쩡거리는 학생이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습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앞으로 동고동락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절로 상대방을 살피게 되었다.
빼어나게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큰 키와 짧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짙은 눈썹과 도드라진 눈썹 뼈가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지퍼를 잠그지 않은 패딩 아래로 니트로 된 교복 조끼가 얼핏 보였다.
예찬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일까?
입술만 우물거리며 회사 건물을 쳐다보던 소년이 예찬을 바라보았다.
“…….”
눈이 마주치자 민망해진 예찬이 막 시선을 돌리려던 차였다.
“앗, 안녕.”
처음 본 상대를 향해 참 구김살 없이 웃는 놈이구나, 생각했다.
“…….”
사람도 상황도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박마루도, 리스피릿의 다른 멤버들도 가끔 저렇게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얼굴을 하곤 했다.
“……예찬 씨, 지금 바빠요?”
연습생 박마루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아이돌 중 하나인 스물한 살 박마루가 조심스레 물었다.
– 예찬아, 지금 바빠?
“……아니요, 괜찮습니다.”
함께한 시간이 많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냥 평범한 말이나 몸짓 하나에도 추억이라 부를 만한 일들이 지겹게 따라붙어 버리니까.
* * *
그 후에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것은 박마루 또한 예찬과 마찬가지로 그날이 첫 출근이었단 것이다.
“사실 도착은 한참 전에 했는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까 좀 떨리는 거야. 너 오는 거 보고 되게 반갑더라.”
생긴 것과 다르게 소심한 구석이 있는지 막 통성명을 마친 박마루가 헤헤거리며 웃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예찬은 LEE 엔터가 있는 층의 버튼을 누르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피릿이 성공한 뒤엔 빌딩 전체를 LEE 엔터가 인수해 사용했지만, 예찬과 박마루가 입사하던 당시엔 한 층을 고작 빌리는 정도로 형편이 빠듯했다.
“근데 너 볼수록 진짜 잘생겼다. 너랑 같이 데뷔하면 막 난리 나는 거 아니야? 엄청난 신인이 등장했다고 아홉 시 뉴스에도 나오고! 해외에서 인터뷰도 하러 오고!”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지금과 별반 다름없는 박마루와 다르게, 당시의 예찬은 굉장히 날이 서 있는 반면 의욕은 바닥이었다.
아이돌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는데 하물며 본인이 아이돌을 한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먹고 잘 곳을 마련해 준다길래 그냥 온 것뿐이지.’
등에 진 짐이 그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만큼 네가 잘 생겼다는 뜻이지.”
예찬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박마루는 풀 죽지 않고 씩 웃었다.
‘소심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범한 면도…… 아니, 눈치가 없는 건가?’
박마루는 예찬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것을 알자 무척이나 기뻐했다.
“와, 너도 이번에 졸업했구나!”
자신도 며칠 전에 졸업식을 했다며 박마루가 반가워했다.
공통점 찾기가 굉장히 재미있는 눈치였다.
예찬은 패딩 사이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교복 조끼를 가리켰다.
“……근데 너 왜 교복이야?”
이미 졸업도 한 데다가 오늘은 학교를 가지 않는 토요일인데 왜 교복을 주워 입고 온 건지 궁금했다.
“부모님이 교복이 제일 단정하다고 하셔서.”
“아.”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고.
부모님의 이야기에 그렇지 않아도 칙칙했던 예찬의 분위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 뭔가 말실수했어?”
“아니, 딱히.”
“으음…….”
어차피 같이 연습생으로 지낸다면 곧 알게 되겠지만, 만난 지 10분도 되지 않은 녀석에게 구구절절 가정사를 설명하긴 좀 그랬다.
“아, 도착했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침묵이 어지간히 불편했는지, 박마루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튀어 나갔다.
“……?”
“얼른 들어가자!”
이럴 거면 먼저 나간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박마루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예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란히 도착한 연습실에서 예찬과 박마루는 앞으로 오랜 시간 질긴 인연을 이어 갈 사람 둘을 더 만났다.
“오, 신입?”
“와, 반가워요! 두 분 다 저보다 형 같은데 맞죠?”
건들건들하지만 이 허름한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반짝반짝한 외모의 이희샘과, 지금보다 두 뼘은 작은데 가로로는 한 뼘 반쯤 오동통하던 김대훈이 다가왔다.
그렇게 또 통성명을 마치고 연습실 한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은 그때.
예찬은 그때로 몇 번이나 돌아갔었다.
* * *
그러니까 LEE 엔터 건물 앞에서 꽁꽁 얼어붙은 박마루의 얼굴을 본 것은 리셋을 시작하기 전 딱 한 번뿐이었단 얘기다.
비슷한 상황은 몇 번쯤 있었을지 모르겠다만.
그런데도 입술이 얼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박마루를 보고 있으려니 어째서인지 딱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니, 그보다 이거 현실 도피인가……?’
예찬은 티 나지 않게 입술 안쪽을 꽉 깨물어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레굴루스 멤버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 안에서 예찬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예찬 또한 하루 종일 촬영한 여파가 이제야 나타나는 건지, 피로가 두 어깨를 내리눌렀다.
예찬은 굳이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박마루를 향해 물었다.
“제가 이쪽으로 안 나오면 어쩌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요? 연락도 없이.”
“앗, 제가 예찬 씨 보러 온 거 아셨구나.”
박마루는 쑥스러운 듯 차갑게 식은 뺨을 마구 문질렀다.
“…….”
“제가 아까 무례하게 굴어서 예찬 씨 기분을 상하게 했는데, 또 멋대로 보자고 하면 더 기분 나쁠 거 같아서요.”
“…….”
“……그리고, 진짜 이상한 말이지만 그냥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정말 이상한 말이네요.”
박마루에겐 옛 기억이 없으니 예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무엇이 그에게 저런 이상한 기대를 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생각이 없는 걸지도.’
어쨌거나 박마루는 목표한 대로 예찬과 만났다.
그리고 예찬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이렇게 약속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기다리셨다는 거 자체가요.”
“어, 그, 그런가요?”
예찬의 솔직한 말에 그냥 자기만족으로 기다린 것뿐이던 박마루가 당황했다.
“네, 선배님도 누군가 선배님을 이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생각하면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괜히 제 책임도 있을 거 같고.”
이번에도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인 예찬은 박마루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했다.
“음, 그렇겠네요.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박마루가 말끝을 흐리더니 냅다 허리를 숙였다.
“그러면 그것까지 합쳐서 전부 사과드릴게요! 예찬 씨! 지금까지 여러모로 미안했어요!”
“…….”
“예찬 씨 기분이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굴어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아, 네.”
갑작스러운 사과라면 사과였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좀 전에 자기 입으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으니.’
또 원래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놈이었다.
‘세상엔 숙이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놈들도 있지만, 얘는 그런 걸로 자존심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푹 숙인 허리 덕분에 박마루의 뒤통수가 훤히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박마루를 내려다보던 예찬이 대답했다.
“이거 앞으론 안 그러시겠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당연하죠!”
박마루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 사과 받아 주시는 거죠?”
‘그거랑 이거는 별개지.’
생각난 것을 그대로 내뱉는 대신, 예찬은 머리를 굴렸다.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선을 그을 건지, 아니면 적당히 좋게 좋게 받아 줄 것인지 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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