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60)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60화
예찬은 종이와 펜을 앞에 내려놓은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다짜고짜 스파이 이름을 적어 내라는 말만 남기고 스태프가 떠나갔기에 알아서 추리해야 할 게 많았다.
‘눈썰매는 개인전이라 스파이가 활약할 만한 배경이 아니었어.’
썰매끼리 충돌 사고라도 내서 동귀어진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예능 프로그램 스파이가 쓰기엔 너무 살벌하지 않은가.
실제로 예찬을 포함해 홀로 침몰한 놈들은 많았지만 다른 놈을 물고 늘어진 녀석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 후로 마주친 적 없는 팀에 있는 스파이를 고르라고 할 리는 없고.’
그렇다면 스파이는 팀마다 한 명씩 있을 확률이 높았다.
‘각자 자기 팀의 스파이를 찾아내는 거라면, 스파이 후보는 나를 제외한 네 사람.’
예찬은 빠르게 우휘겸과 유피테르의 세 사람이 오늘 보였던 행동들을 복기했다.
‘우휘겸도 연기가 젬병일 거 같으면서 은근히 할 땐 한단 말이지. 이가원이랑 주태현도 미션을 진행하면서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었고…….’
물론 가장 수상한 것은 단연코 유피테르의 비주얼 담당이자 나사가 못해도 세 개 정도는 풀린 것 같은 강연록이었다.
‘라면 골라오기 미션 때 좀 선을 많이 넘었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멍청할 수 있는 건지 좀 놀라웠는데, 스파이라서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티를 팍팍 내다니. 스파이 실격이네.’
빙그르르 펜을 돌린 예찬은 거침없이 이름을 휘갈겼다.
* * *
한참을 홀로 텐트 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자, 마지막 팀까지 도착한 것인지 제작진이 모든 아이돌들을 불러 모았다.
주섬주섬 테디베어를 업고 나오자 마찬가지로 펭귄을 업은 주태현과 마주쳤다.
주태현과 예찬은 씁쓸한 눈으로 서로의 등 뒤에 매달린 버디를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러분, 오늘 친구들과 함께하는 우정의 드라이브 어떠셨나요?”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많이 건진 것이 분명한 MBB 메인 PD가 기쁘게 인사말을 건넸다.
“최악이에요!”
“우정 파괴 드라이브!”
“밥, 밥이 먹고 싶습니다…….”
순식간에 불만이 쏟아지는 걸 보니,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던 것은 예찬의 팀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걸 그나마 덜 억울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PD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는 걸 보면 좋아할 일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여러분께 스파이를 찾아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많이 놀라셨나요?”
“올 게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채은성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리고 외치자 정의탁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과 같은 팀이었던 배새벽 또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고, 선우이경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고 있었다.
‘음, 저긴 거하게 들켰나 보군.’
정의탁이 연기는 좀 아니지.
“스파이…… 총몇 명인가요?”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강해솔이었다.
‘여긴…… 또 엄청난 일들이 있었나 보군.’
무심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흘 정도 철야를 한 몰골로 음울하게 산타 인형을 쓰다듬고 있는 강해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황시우가 벌떡 일어났다.
“강해솔, 형 못 믿냐! 형은 진짜 아니라니까? 마, 우리가 남이가?”
“해솔아, 형은 정말 실수였어. 형이 다 설명했잖아.”
“하하! 해솔이 형! 믿을 게 저밖에 없죠?”
같은 팀이었던 심상록과 범세혁도 한마디씩 거들자 동태처럼 빛을 잃었던 강해솔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범세혁, 네가 제일 의심스럽거든? PD님, 스파이가 몇 명인지는 말씀해 주실 수 있잖아요. 둘인가요, 아니면 셋인가요?”
스파이가 절대 한 명일 리는 없다는 확신으로 불타는 강해솔에게 PD가 팔로 가위표를 그려 보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스파이는 한 팀당 한 명이랍니다, 해솔 씨.”
“정말 믿을 수 없네요.”
강해솔의 눈이 다시 동태화되었다.
“그러니까요! 나랑 해솔이 빼고 이 둘은 어떻게 봐도 스파이였는데! 아니면 그게 말이 됩니까?”
“솔직히 시우 선배님이 제일 의심스러웠죠. 저도 선배님이랑 세혁이 두 사람이 스파이라고 생각했어요.”
“하하! 다들 연기 되게 잘하신다!”
스파이 후보 셋이 다투는 것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PD가 이번엔 예찬을 포함한 경차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3팀은 어떠셨나요?”
“조금 고민되는 점이라면, 얘가 평소에도 바보긴 한데, 오늘은 그보다 좀 더 바보였거든요. 이게 그냥 더 바보가 된 건지, 스파이라서인지는 살짝 헷갈렸습니다.”
“주태현, 말이 좀 심하다?”
“바보긴 한데 양심은 있는 바보예요. 자기 얘기인 거 바로 알아듣는 거 보세요.”
주태현과 강연록이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이가원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끼어들었다.
“해도 너무해서…… 그렇죠, 예찬 씨?”
“음, 그랬죠.”
예찬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강연록이 양팔로 제 몸을 끌어안으며 훌쩍거렸다.
“다들 너무해! 난 모두를 친구라고 믿었는데!”
“그러면 모두를 친구라고 믿은 연록 씨부터 스파이를 적은 쪽지를 공개해 주시죠.”
“네, 제 쪽지는 이겁니다.”
PD의 말에 강연록은 언제 울었냐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늠름하게 쪽지를 들어 올렸다.
“회복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제 생각에 스파이는 바로바로바로…… 주! 태! 현! 입니다!”
“나라고?”
빠른 태세 전환에 경악하고 있던 주태현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라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한 문제도 안 틀렸는데?”
“태현이가 펭귄을 챙긴다고 너무 시간을 끌었어요. 스파이가 분명합니다.”
“와, 억울해!”
“네, 일단 연록 씨는 스파이로 태현 씨를 지목하셨네요. 그러면 여기서 스파이에게 전달된 규칙을 여러분께도 공개하겠습니다.”
PD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리 짜 둔 것인지 스태프들이 커다랗게 인쇄한 패널을 들고 들어왔다.
“여기 적혀 있는 것처럼 스파이가 승리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전부 완수해야 합니다. 첫 번째,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특정 단어를 스무 번 이상 말해야 한다. 두 번째,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저녁 7시를 넘겨야 한다. 세 번째, 단 한 사람에게라도 스파이로 지목당해선 안 된다.”
‘특정 단어? ……아.’
짚이는 것이 있는 예찬은 파트너 테디베어의 손을 꼭 쥐었다.
‘우리가 7시 반쯤 도착했으니 두 번째 조건은 달성됐군.’
“자, 다 읽으셨나요? 우선 안타깝게도 1팀의 스파이는 두 번째 조건을 실패했기 때문에 스파이 실격입니다!”
자연스럽게 거실 안 모두의 시선이 정의탁을 향했다.
정의탁은 부정할 기력조차 잃고 그저 허탈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잠시 순서를 바꿔서, 이미 스파이가 패배한 1팀 여러분부터 쪽지를 공개해 주시죠!”
정의탁을 포함한 1팀의 네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빠르게 쪽지를 펼쳐 보였다.
“정의탁, 정의탁, 정…… 의탁, 이라고 쓰신 거 맞죠, 이경 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가 나왔습니다! 의탁 씨도 자기를 썼군요?”
“네, 이미 실패했으니 뭐…….”
“덧붙이자면 미션 단어는 뭐였죠?”
“‘수상해’였습니다. 이건 오십 번은 말한 거 같은데, 그 배로 들으면서 왔네요.”
해탈한 표정의 정의탁이 대답하는 사이, 완벽하게 스파이를 검거한 배새벽과 채은성, 선우이경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해 냈다, 해 냈어!”
“이겼다, 이겼어!”
“스파이, 잡았다!”
세 사람은 아예 즉석에서 지난 앨범 수록곡 가사를 개사해 기쁨을 표현했다.
강연록이 눈을 반짝였다.
“저거 좋은데? 우리도 하자!”
“너는 혼자 해야지. 스파이잖아.”
“스파이는 너지!”
“PD님, 이기면 뭐가 좋나요!”
주태현과 강연록이 또다시 끝나지 않는 싸움을 시작하려 하기에 예찬은 큰 목소리로 PD를 불러 관심을 끌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예찬 씨! 스파이를 찾아낸 팀에겐 육해공의 산해진미를 전부 담은 근사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물론 스파이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식사는 스파이의 몫이 되겠지만요!”
“육해공! 육해공!”
어느새 1팀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육해공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다음으로 2팀의 쪽지를 공개하겠습니다! 먼저 해솔 씨!”
“하아…….”
한숨을 푹 내쉰 강해솔이 반듯하게 접은 쪽지를 펼쳤다.
예찬은 고개를 쭉 빼서 흰 쪽지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심상록]“해솔이 너……!”
심상록이 상처받았다는 듯 입을 가렸다.
“그러면 상록 씨는요?”
“전 세혁이요.”
“형, 근데 저는 진짜 아니에요! 오늘 운이 없었던 건데.”
심상록의 지목을 받은 범세혁이 호쾌하게 웃었다.
PD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이번엔 범세혁에게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세혁 씨는 누구를 지목하셨죠?”
“저 시우 선배님이요!”
“나 아니라니까? 나는 너 썼어! 이미 들켰으니까 우리 이제 솔직해지자!”
지목받은 세 사람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결백을 주장했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강해솔이 PD를 불렀다.
“PD님, 저 중 누가 스파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셋 다 지목받았으니까 실패한 거 아닌가요? 이제 누군지 알려 주세요.”
2팀의 네 사람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살피던 PD의 얼굴이 이내 빨갛게 상기되었다.
“어, 정말 놀라운 결과네요. 2팀의 스파이는 훌륭하게 미션을 전부 성공했습니다!”
“네?”
“아니, PD님. 지금 이름이 다 나왔는데…….”
“안 나온 이름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안 나온 이름이라니…… 설마?”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유일한 이름을 떠올린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예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지금까지 했던 게 다 연기라고?
그 사람이 그런 미친 연기가 가능하다고?
“네, 2팀의 스파이는 해솔 씨였습니다!”
거실에 있는 전원의 시선이 2팀에서 스파이로 지목받지 않은 단 한 사람인 강해솔에게 향했고, 동시에 PD가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시선을 받은 주인공은 모두를 완벽하게 속여 넘겼다는 기쁨에 취해……!
“……네?”
그러나 강해솔은 기쁨에 취해 있기는커녕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벙찐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PD가 벙찔 차례였다.
“해솔 씨, 혹시 깃발에 붙어 있는 쪽지 못 보셨나요? 그, 눈썰매장에서 뽑은…….”
“쪽…… 지요?”
누가 봐도 전혀 본 적 없다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어, 잠깐. 임 작가, 해솔 씨 미션 단어도 스무 번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
“네, 제가 정확히 셌는데 서른두 번 말했습니다!”
“……미션 단어가 뭐였는데요?”
PD의 부름에 앞으로 나온 앳된 작가가 바짝 기합이 든 채로 대답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그 단어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뭔가 있어’였습니다!”
“아…….”
“해솔 씨, 정말 모르고 그 말을 계속하신 건가요?”
“네, 정말 뭐가 안 풀려도 너무 안 풀리길래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
‘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하군.’
짝짝짝.
홀로 상황을 정리한 예찬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박수를 쳤다.
하나둘 늘어난 박수 소리는 이내 거실을 뒤덮을 정도로 커졌다.
어쩔 줄 모르는 강해솔을 지켜보며 예찬은 생각했다.
‘방송 꼭 봐야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