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87)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87화
“자, 처음부터 한 번 가 보자. 다들 집중!”
“집중!”
선우이경의 지시에 멤버들이 곡을 시작할 때 서 있어야 하는 위치로 움직였다.
무릎 한쪽을 바닥에 대고 앉은 예찬은 옆을 보지도 않은 채 손을 뻗어 범세혁과 손을 잡았다.
레굴루스의 매일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싱글 3집 발매 준비로 한창이었다.
앨범에 들어갈 곡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단순한 수록곡이라면 작곡, 작사, 편곡 정도로 단출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타이틀곡, 혹은 활동곡이라면 필수적인 요소들만 챙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딱 기본만 해도 안무에 뮤비, 콘셉트 포토는 해야 하니까.’
레굴루스는 같은 경우엔 지금까지 작업을 할 때,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 투입한 편이었다.
지금까지 낸 세 앨범의 타이틀곡과 활동곡은 작곡과 편곡은 예찬과 강해솔 선에서 끝내고 작사와 안무 또한 멤버들이 자체 제작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준비하는 앨범은 평소와 결이 달랐지만, 참여하는 인원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작곡가나 편곡가 항목에 대여섯 사람의 이름이 나열되는 것이 흔해진 지 오래인 음원 시장이었으나 타이틀곡의 작사 및 편곡, 그리고 작사까지 맡은 PiPiPi는 고집스럽게 혼자서 전부 다 하는 것을 선호했다.
자신의 곡은 자신만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나브로 때 재편곡을 듣고 눈이 돌았던 거지.’
그 당시엔 개성적인 탈을 쓰고 있어서 실제로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표정이었을지 훤히 보였다.
세상일이란 참 얄궂었다.
리스피릿 시절 PiPiPi와 작업해 본 경험이 있는 예찬은 PiPiPi가 자신이 만든 곡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츄마프에서 앞으로 PiPiPi와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단 결심을 하고 ‘시나브로’를 과감하게 편곡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날 했던 편곡은 PiPiPi의 마음 속 도화선에 불을 질렀고., 활활 타오른 그 불길은 지금까지도 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은 PiPiPi를 한층 더 성장시키기도 했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곡을 완성하는 것으로 작곡가로서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던 PiPiPi는 이제 그 너머를 살폈다.
– 이번 곡 의상은 어떻게 할 겁니까? 포인트 안무는요?
– 무대 장치는 혹시 특별히 생각해 둔 거 있습니까?
그 곡이 오를 무대와 안무, 그리고 의상까지 PiPiPi의 고려 대상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시나브로 땐 무대 의상과 콘셉트에 대해 듣지 못해서 그와 어울리게 편곡한 나와 해솔이 형 버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게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나 보지?’
어쨌거나 퍼포먼스가 큰 축을 담당하는 K-pop 작곡가로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듯 자기 곡을 자기 손으로 완벽하게 빚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PiPiPi는 녹음 현장에서도 원하는 바를 쉴 새 없이 지적했다.
– 거긴 좀 더 속삭이듯 불러야 해요.
– 목소리에 좀 더 숨을 섞어서.
– 소리가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해 주세요.
– 그 부분은 말하는 것처럼 불러 주세요.
다소 추상적인 요구가 날아오는 경우도 잦았으나, 레굴루스의 멤버 중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PiPiPi가 좀 얄미운 짓을 자주 하긴 했지만, 같이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곡가로서는 인정하게 되었다.
‘인간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런 작곡가의 머릿속에 있는 곡을 완벽하게 재연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진지하게 녹음에 임했다.
– 흠흠 흐으으음―, 이런 식으로 부르면 될까요?
– 새벽아, 일단 형이 하는 거 들어 봐. 탄탄, 타다다단, 탄타다다안. 이 박자 기억할 수 있겠어?
– 은성이 거기서 딱 반 호흡만 빠르게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 이거 말씀하신 거 맞죠, 작곡가님?
자신의 파트가 아니어도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PiPiPi의 지시를 해석했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이어진 녹음 중에서도 PiPiPi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작곡가님, 이 부분은 여기서 숨을 뱉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강해솔이 흘러넘치는 의욕을 참지 못하고 PiPiPi에게 의견을 내놓은 순간, 예찬은 PiPiPi가 매섭게 눈을 흘길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완벽한 답안지가 있는 사람이니.
일단 생각난 대로 입을 연 강해솔도 벌써 후회하는 눈치였다.
– ……흐으음. 잠깐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 ……!
그러나 PiPiPi는 악보에 체크를 하고 넘어갈 뿐이었다.
그 후로 멤버들은 자신의 의견을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PiPiPi는 우선 체크를 하고, 후에 그 부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답을 주었다.
– 그 부분은 2절의 같은 파트와 다른 느낌으로 부르도록 짠 거라서요. 원래 지시대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반 박자는 너무 빠르고 그 반 박자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 여기는 넣고 싶은 게 따로 있어서……. 노래는 이대로가 좋을 거 같아요.
물론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PiPiPi의 대답엔 계속 성의 있는 설명이 따라 붙었다.
‘……사람 됐는데?’
자기 지시를 어기고 숨을 쉬었다고 작업실 벽에 머리를 박아 대던 PiPiPi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피로 물들었던 리스피릿의 작업실 벽지를 머릿속에서 지운 예찬은 조용히 가슴 위에 손을 올렸었다.
‘내가 사람 하나 만들었다!’
정말로 보람찬 일이지 않은가.
‘……그나저나 슬슬 때가 되었는데.’
안무를 충실하게 소화하면서 지난 일정을 돌이켜 보던 예찬이 생각을 미처 끝맺기도 전의 일이었다.
“여러분!”
연습실 문이 힘차게 열림과 동시에 PiPiPi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 작곡가님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등장임에도 멤버들도, 그리고 같이 연습실을 지키고 있는 스태프들도.
누구 하나 놀라는 이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 PiPiPi는 안무와 무대 연출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여러분! 제 말 좀 들어 보시죠!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와아.”
바로 지금처럼.
상기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PiPiPi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펄떡거렸다.
‘PiPiPi가 오면 쉬니까 이제 쉬는 시간을 따로 정해 둘 필요가 없군.’
달라붙은 PiPiPi를 밀어내며 예찬이 눈짓을 보내자 우휘겸이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을 껐다. 이제는 숨 쉬듯 자연스러워진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저번에 말했던 파트에서 새벽 씨가 이경 씨를…….”
“네에, 1분 13초 말씀하시는 거죠?”
PiPiPI는 작곡과 달리 이 분야에선 아마추어였고, 내는 의견 중 열의 아홉은 써먹지 못할 것이었다.
“그건 동선이 생각하신 것처럼 예쁘게 안 나올 거예요. 너무 겹쳐서.”
“그런가요…….”
그렇지만 예찬과 레굴루스 멤버들은 PiPiPi의 넘치는 열정에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언제든 연습실에 드나들 수 있도록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아 주는 것을 택했다.
작곡가가 자기 곡에 애착을 느끼고 더 나은 무대를 위해 아이디어를 낸다는 것 자체가 기꺼웠기 때문이었다.
“이왕 오셨으니 오늘 연습한 거 보고 가실래요?”
“그럴까요?”
예찬의 제안에 솟아난 아이디어를 반려 당하고 축 처졌던 PiPiPi의 어깨가 순식간에 펴졌다.
새삼스럽지만 참 알기 쉬운 사람이다.
구석에 놓여 있는 방석을 챙겨 든 PiPiPi는 익숙하게 음악을 다시 틀고 자신의 지정석에 가 앉았다.
빛나는 두 눈이 그의 직업 만족도가 최상임을 대신 말해 주었다.
“얘들아!”
전주가 끝나고 멤버들이 막 발 한쪽을 들어 올린 순간, 연습실 문이 또다시 벌컥 열렸다.
전주만으로도 어깨춤을 들썩이고 있던 PiPiPi의 얼굴이 흥이 깨졌다는 듯 굳었다.
‘아니, 피대기 당신도 똑같이 등장했잖아.’
이 무슨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인가.
“타임 테이블 올라왔어!”
“타임 테이블!”
그러나 이어진 스태프의 말에 PiPiPi는 연습실 안 누구보다 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예찬과 멤버들도 각자 대충 던져두었던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집어 들고 공식 SNS에 접속했다.
몇 번의 외주 작업 이후 아예 NJ로 스카우트한 아트디렉터 곽진아가 제작한 타임 테이블이 화면을 꽉 채웠다.
“……아름답네요.”
조금 젖은 것 같은 목소리가 PiPiPi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겨우 타임 테이블 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냐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잘 만들긴 했네.’
한국의 정취가 듬뿍 느껴지는 작업물은 예술 작품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면에 무심하게 흩날리는 꽃잎 하나하나마저 곽 디자이너가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것이 느껴졌다.
늘어진 꽃가지와 막 피어날 것처럼 맺힌 꽃망울, 부드럽게 흐르는 서체로 쓰인 스케줄들도 모두 하나로 어우러졌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찬과 앨범 관계자들은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발매될 PiPiPi의 곡과 그 뒤를 이을 강해솔의 곡까지 어우르는 디자인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완전했다.
‘PiPiPi도 그것을 느꼈기에 저렇게 감동한 거겠지. 다른 건 더 기대되는데?’
아직 타임 테이블만이 공개되었을 뿐이지만 예찬은 이번 앨범의 모든 디자인이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너무 바빠서 확인을 못 하고 있었는데, 조만간 좀 보러 가야겠군.’
팬들 앞에는 서프라이즈로 짠, 하고 꺼내는 것이 좋지만.
만드는 쪽은 몇 번이고 미리 확인해서 아주 작은 문제라도 있지 않은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예찬은 그런 지난한 작업 또한 아주 좋아했고, 아주 잘했다.
물론 그보다 앞서 더 잘해야 하고, 더 잘하는 일이 있었다.
“이제 정말 우리만 잘하면 되겠네요, 그렇죠?”
예찬이 입꼬리 한쪽을 비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예찬과 PiPiPi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고 있는지 멤버들은 뭉클한 얼굴을 하고 있던 멤버들이 빠르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오오오오! 힘이 솟아난다아아아―!”
“당장 다시 연습 시작하죠!”
“얘들아 살살해, 살살~.”
도발하는 것 같은 미소에 기다렸다는 듯 여럿이 낚였다.
예찬은 눈물을 훔치는 PiPiPi를 못 본 척하고 처음 안무를 시작할 때 위치에 가서 섰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자 이미 예찬 쪽으로 뻗어 있는 범세혁의 손이 보였다.
예찬은 고개를 숙이며 범세혁의 손을 잡았다.
“…….”
평균보다 한참은 차가운 범세혁의 손이 닿아도 이제 놀라지 않았다.
그만큼 예찬과 멤버들은 이 곡과 시간을 쌓아 왔다.
가야금 소리가 울리고, 맞닿은 손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바야흐로 개화(開花)의 시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