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90)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90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 같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거실에 둘러앉아 간간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각자 할 일을 하던 날이었다.
[글로벌 K-pop 인기 그룹 유피테르가 6개월 만에 컴백을 알렸습니다. 오는 12일 정규 6집으로…….]별 의미 없이 틀어둔 TV에서 유명 아이돌의 컴백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던 하경이 예찬을 불렀다.
“예찬아,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뭔데?”
“신곡 발매하는 시간 말이야. 나 학생 때는 거의 자정이었던 거 같은데, 요새는 막 시간이 제멋대로인 거 같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니지?”
“아.”
짧은 감탄사를 뱉은 예찬은 그대로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형 기억이 맞을걸. 몇 년 전에 음원 사이트 차트 반영 방식이 바뀌었다고 들었어.”
“오, 내 기억이 맞았군.”
“시간 말고 요일도 바뀌었을걸? 예전엔 음악 방송 순위를 생각해서 월요일에 발매했는데 최근엔 해외 시장을 노려 금요일에 발매하는 경우가 늘었대.”
“오오, 역시 K-pop 전문가.”
“전문가는 무슨.”
하경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하자 예찬은 정말로 질색이라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형. 난 고작 연습생 나부랭이인걸…….”
“뭐야, 예찬이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예찬이 자화자찬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우울한 티를 내는 경우도 드물었다.
하경과 눈이 마주친 찬양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연습생들이 엄청나게 그만뒀대.”
“데뷔 조로 점찍힌 사람도 있었는데!”
“저런.”
“이런 회사에 더 있어 봐야 아까운 젊음을 낭비할 뿐이라고 했대.”
“나갈 거면 조용히 나갈 것이지!”
“저런.”
탁자에 이마를 박은 채 거칠게 비비적거리던 예찬이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버럭 소리를 쳤더니 조금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한텐 한마디 해 줬어?”
“말을 하면 그게 들리겠어? 데뷔해서 잘 먹고 잘 사는 모습 정도는 보여 줘야 후회하겠지.”
“그것도 그렇네.”
“……으, 나 때문에 형이랑 찬양이까지 괜히 우울해졌네. 미안.”
탁자에 뺨이 꾸욱 눌린 채 건넨 사과에 하경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반성 빠르네.”
그 후 얼마간 예찬의 회사를 주제로 주고받던 세 사람의 대화는 한참을 돌고 돌아 다시 가수의 컴백일로 돌아왔다.
“요일이랑 시간까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면 딱 원하는 날짜에 앨범을 내는 건 어렵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성적을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그건 좀 아쉽다. 생일 같은 기념일에 신곡 내면 멋질 거 같은데.”
“아, 그렇네. 멋있다, 그거.”
하경과 찬양의 말에 예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좋지. 뭔가 의미 깊잖아.”
예찬은 성적에 전혀 연연하지 않거나 아니면 언제 내든 자신이 있으면 지금도 원하는 날짜, 원하는 시간에 발매하는 가수들이 있을 거라 덧붙였다.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듣던 하경이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예찬이 너도 생일 발매 같은 거 해 보고 싶구나?”
“그러면 내가 괜히 득 보는 기분인데. 내 생일이기도 하잖아.”
“찬양아, 너는 그 앨범 최소한 다섯 장은 사야겠다.”
하경과 찬양이 주거니 받거니 떠드는 것을 어디 한번 해 보란 듯 듣고 있던 예찬은 두 사람의 상상이 7월 23일 발매한 예찬의 Happy Birthday 기념 앨범이 3백만 장 팔릴 거라는 데까지 이르자 목덜미를 붉힌 채 손을 내저었다.
“아니,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사람이 부끄러움으로 죽을 수 있는지 실험할 셈이야?”
“유창하게 태클 거는 거 보니 아직 멀쩡하네. 좋아, 역시 4백만 장으로…….”
“그럼 나는 그때까지 열심히 용돈을 모아서 적어도 그중 백 장 정도는 내가 채우는 걸로…….”
“이제 진짜 그만! 그리고 만약 내키는 날에 낼 수 있다면 생일보다는 팀의 기념일에 내고 싶다고. 내가 하려는 건 아이돌이잖아.”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리는 예찬의 목소리는 이어질수록 점점 작아졌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는 마지막까지 잘 들릴 정도였다.
“예찬이 너……! 형이 그쪽 문화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멋있는 말을 했다는 건 알겠어!”
하경이 과장되게 감동한 목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자, 예찬은 괜히 딴청을 피우다 갑자기 우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뭐, 고작 연습생 나부랭이인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응? 뭐지 이 기시감? 왜 이야기가 다시 돌아간 거 같지?”
찬양과 하경이 기운 없는 예찬을 위로하기 위해 손짓, 발짓을 전부 동원하는 모습이 점차 흐릿해졌다.
“…….”
이미 꿈의 그림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정찬양은 감은 눈 위에 팔을 올린 채 오래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잔뜩 찌푸린 눈으로 확인한 스마트폰 화면엔 4월 14일, 금요일 오후 4시란 글자가 선명했다.
왜 하필 이 시점에 꾼 것인지 원망스러운 꿈이 정찬양의 머릿속을 부유했다.
‘의미가 깊다……, 인가.’
토요일은 앨범을 발매하기 애매한 요일이었다.
그렇지만 레굴루스는 보란 듯이 세 번째 미니 앨범을 약 여덟 시간 뒤인 내일 자정에 발매할 예정이었다.
딱 작년의 같은 날, 레굴루스의 멤버를 정하는 츄즈 마이 프린스 99 생방송이 방영했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하나하나 해 나가고 있는 예찬의 행보를 쫓고 있으면,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여러 가지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때로는 기쁘기도 했고, 때로는 슬프기도 했으며, 때로는 기특하거나 분하기도 했다.
‘오늘은…… 짜증 나네.’
정찬양은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침대 밖으로 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바닥에 부딪힌 스마트폰이 꽤 큰 소리를 냈지만 얼마 전 숙소를 나와 따로 살기 시작했기에 정찬양의 침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다.’
자신이 선택한 고요함이 오늘만큼은 사무치게 서늘했다.
예찬이 돌아온 후부터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외로움이 이렇듯 변덕스럽게 등 뒤에 달라붙곤 했다.
그러나 정찬양은 숙소에서 벗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놈들이랑 있어 봐야 이 고독은 채워지지 않아. 그 면상들을 보면서 기분만 더 개 같아질 뿐이지.’
아주 오래전부터 정찬양의 허무를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정찬양은 남은 평생을 빈 채로 살아갈 것이었다.
‘……아예 모레까지 자 버리면 좋을 텐데.’
정찬양은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 * *
“시간 너무 빨리 지나가지 않았어요?! 분명 한참 남았었는데?!”
“의탁아, 너 이번 주 내내 똑같은 말을 한 거 알지?”
“그게 벌써 일주일이 됐다고요?!”
심상록의 지적에 정의탁은 숨까지 크게 들이키며 놀랐다.
“예찬아, 눈.”
거울 너머로 두 사람을 힐끔거리던 예찬은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의 지시에 다시 눈을 감았다.
눈두덩이를 가볍게 스치는 솔이 심장을 울렁이게 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했을 때, 시침이 막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레굴루스는 잠시 뒤인 11시 55분에 라이브로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개화(開花)’의 무대를 처음으로 선보일 예정이었다.
“컨디션들은 다들 어떠십니까?”
그때 대기실 문을 열고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행색으로 들어왔다.
“혹시 졸린 분은 없으시겠죠?”
커다란 스마일 탈을 쓴 남자가 연달아 물었다.
대체 누굴 보고 말을 건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모두가 대답하길 망설이는 가운데, 범세혁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
정말로 모르겠다는 말투와 목소리에 스마일 탈을 쓴 남자가 펄쩍 뛰며 자신의 가슴을 마구 쳤다.
“아니, 세혁 씨! 접니다, 저! PiPiPi!”
“아.”
“아아, 맞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와, 미쳤다. 저 개성적인 탈을 잊고 있었어!”
그제야 여기저기서 알겠다는 듯 감탄이 튀어나왔다.
피대기가 츄마프엔 저 괴상한 탈을 쓰고 나왔었던 것을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다들 맨얼굴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군.’
“아니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으신 거죠?”
피대기의 말대로 무척 인상 깊은 모습이긴 했지만.
맨얼굴의 피대기가 더 인상 깊은 짓, 특히 진상 짓을 많이 했기에 멤버들의 기억에서 꽤 풍화된 모양이었다.
“근데 왜 새삼스럽게 그거 쓰고 오셨어요?”
예찬의 물음에 피대기가 이쪽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원래 방송용으로 만든 겁니다! 신비주의라는 거죠!”
“아, 네…….”
아마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고 있을 것 같지만 스마일 탈이 가로막고 있으니 그냥 웃는 낯으로 보일 뿐이다.
‘그것보다 저 탈의 어디가 신비한데. 차라리 공포물 아니야?’
피대기는 신비주의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크흠!”
예찬의 떨떠름한 시선을 맞은 피대기는 헛기침을 하더니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그, 정말 졸린 분은 없는 거겠죠?”
“없어요.”
“정말로?”
“정말로.”
“…….”
멤버들 컨디션이 좋다는데 왜 죽상인지 모르겠다.
‘아니, 실제론 그냥 웃고 있지만.’
그렇지만 갑자기 축 늘어진 어깨가 지금 피대기가 굉장히 상심했음을 마구마구 나타내고 있었다.
“왜 물어보셨어요?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고요…….”
“저 세 번은 안 물어볼 거예요.”
“읍크흐응…….”
‘뭐야? 염소 우는 소리?’
정말로 피대기에게 신경을 끄려던 예찬은 갑자기 탈 아래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잠시 말을 멈췄다.
“저, 여러분. 혹시 목마르진 않으세요? 작곡가님이 커피 트럭을 보내셨는데…….”
보다 못한 스태프가 피대기와 멤버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커피 트럭이요?”
이 야심한 밤에 웬 커피 트럭?
“이 시간……? 아니, 아니. ……와아! 고맙습니다, 작곡가님!”
예찬과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던 선우이경이 돌연 영업용 미소를 띠고 살갑게 박수를 보냈다.
“와아아―.”
“작곡가님 최고!”
“감사합니다.”
“감동이에요!”
박수 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다른 멤버들도 피대기의 깜짝 선물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해내는 사회인들의 모습이었으나, 접객 대상인 피대기는 그저 만족스러워 보였다.
“크흠! 제가 제일 좋은 옵션으로 신청했습니다. 야간 수당도 드리고!”
거기까지 자랑한 스마일 탈은 슬쩍 예찬의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
눈이 보이지 않지만, 마주친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몸짓이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예찬은 할 말 있으면 빨리하라는 의미를 담아 스마일 탈의 눈을 응시했다.
“……하예찬 씨는, 커피 차에 대해서 할 말 없으십니까?”
“아, 커피 차요.”
‘뭔 말을 하려나 했더니…….’
예찬의 시선이 비하인드 영상용 카메라와 스태프들을 빠르게 스쳤다.
만약 이곳이 레굴루스의 연습실, 혹은 작업실이고 주변에 있는 것이 멤버들뿐이라면 예찬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설마 엎드려 절받기를 시도하신 건가요, 지금?’하고 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선 작곡가 체면을 좀 세워 줘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츄마프 시절에 자주 튀어나왔던 선택지들이 떠오른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려 츄마프에서 함께 했던 작곡가가 지은 곡에 츄마프 마지막 방송일에 맞춰 나오는 앨범이 아닌가.
– 아니 하예찬 그때는 진짜 이상한 애 같고 재밌었는데 요샌 너무 점잖아진 거 아닌가 싶었거든
그리고 얼마 전 황시우가 단체 메신저 방에 올렸던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도화선을 당겼다.
“작곡가님이 우리 레굴루스를 이렇게 사랑하시다니! 저도 하트 뿅뿅이라구욧?”
“…….”
하트 총알을 난사하는 예찬의 얼굴은 아이돌 그 자체였다.
“자… 자, 잘못했습니다…….”
“……작곡가님?!”
PiPiPi의 스마일 탈 아래로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