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dol who has used up all the resets RAW novel - Chapter (391)
리셋을 다 쓴 아이돌입니다만 391화
“운 거 아닙니다. 땀입니다.”
“땀이요? 혼자 사우나 다녀오셨어요?”
“이경 씨 인형 탈 안 써 봤죠? 안 써 봤으면 말을 말아요.”
“와, 대화를 아예 원천 봉쇄했어. 작곡가님, 친구 없으시죠?”
“……고소하겠어요!”
가장 먼저 준비가 끝난 선우이경이 피대기를 상대하는 사이, 예찬과 다른 멤버들도 차례차례 당장 무대에 올라도 괜찮은 상태로 탈바꿈했다.
거울 너머로 선우이경 쪽을 힐끗거리고 있던 예찬은 옆에서 소매를 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범세혁은 예찬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었다.
“예찬이가 총으로 작곡가님을 해치웠어.”
“살아 있잖아?”
“울렸잖아.”
“땀이라잖아.”
“그걸 믿은 거야? 예찬이 순진하네.”
“…….”
그 뒤에 있던 채은성까지 끼어들어 예찬을 한 번 몰아보려고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잠시 두 사람의 기대에 부푼 눈을 바라보던 예찬은 조용히 오른손을 소매 안쪽으로 숨겼다가 엄지와 검지만 세운 채 다시 꺼냈다. 말하자면 총알을 장전한 셈이었다.
“하트 뾰…….”
“잘못했습니다, 리더.”
“용서해 주세요, 리더.”
“…….”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두 사람이 고개를 숙였기에 피를 보지 않고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예찬이 끝!”
“감사합니다.”
헤어스타일리스트에게 OK 사인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예찬은 그새 구석에 처박힌 피대기를 향해 다가갔다.
“땀은 멈추셨어요?”
“네, 음, 뭐…….”
추태란 추태는 이미 다 보였으면서 피대기는 새삼스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예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럴 리 없지만 둥그런 인형 탈이 어쩐지 축축해 보였다.
‘꾹 비틀면 물, 그것도 짠 물이 나올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짠 내도 나는 거 같고…, 아니 이건 그냥 느낌인가?’
“그 탈을 벗고 얼굴 한 번 닦으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여긴 어차피 다 작곡가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인데.”
“…….”
괜히 찝찝해진 예찬이 친절한 목소리로 권유했으나 피대기는 이번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피대기에게 몇 번이고 상냥하게 말을 걸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기에, 예찬은 사람 둘 정도가 사이에 앉을 거리를 두고 자리에 앉았다.
“하예찬 씨는, 무서운 사람이군요.”
“……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해 보려던 차였는데 청개구리 같은 피대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주 무시무시한 사람입니다. 예고도 없이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다니…….”
적당히를 모르는 피대기는 ‘하트 뿅뿅’을 외치는 예찬이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워서 오늘은 잠도 못 잘 거 같다며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피대기에게 사회적 예의를 지키는 것은 진작 때려치운 예찬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흘겨 보며 대답했다.
“작곡가님의 그 땀에 전 탈이 훨씬 무시무시한데요.”
“허, 뭐, 아, 안 절었거든요?! 안쪽 보여 줘요?!”
“아니, 진짜 괜찮아요. 콧물이라도 묻어 있으면 속이 안 좋을 거 같아서.”
“콧물이라니! 전 콧물 같은 거 안납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와, 진짜 하예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앞으론 그렇게 보세요.”
“……!”
“……빵.”
“으악!”
탈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어쩐지 불손한 눈빛이 느껴져 가볍게 손으로 총을 쏴 주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대기가 추접하게 퍼덕거렸다.
두 사람의 대치 아닌 대치를 지켜보던 멤버들이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예찬아, 작곡가님 그만 놀려.”
“작곡가님, 휴지 빌려드릴까요?”
“울지, 아니 땀 흘리지 마세요~!”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이제 무대로 옮길게요!”
“네!”
피대기의 비명 같은 외침은 제작진의 부름에 묻혔다.
멤버들은 실없이 웃으며 피대기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작곡가님, 잘하고 올게요.”
“파이팅!”
그런 멤버들에게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피대기가 마지막으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예찬을 붙잡았다.
행여나 무대 의상이 구겨질까 걱정되었는지 어깨를 잡은 손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하예찬 씨.”
걸음을 멈춘 예찬과 스마일 탈이 마주 보았다.
여전히 저 축축해 보이는 탈이 주는 찝찝함을 떨쳐 내지 못한 예찬은 티 나지 않게 반보 뒤로 물러섰다.
“왜요?”
“……고맙습니다.”
뜬금없는 감사에 예찬은 반보 더 뒤로 빼려던 발을 멈췄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예찬이 말했다.
“……잘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예찬의 대답을 들은 피대기는 스마일 탈 안에서 코웃음을 쳤다.
“하예찬 씨가 못할 수가 있습니까?”
* * *
“오, 5분 남았다.”
11시 50분.
레굴루스의 새 앨범 개(開) 타이틀곡 ‘개화(開花)’의 첫 무대까지는 5분, 음원 공개까지는 10분이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여러 아이돌을 오로지 ‘찍먹’만 반복하며 유목민 생활을 해 오던 회사원 한모 씨는 정말 오래간만의 자정 발매에 설레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불 안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참고로 한모 씨가 레굴루스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시상식 시즌, 레굴루스가 처음으로 대상을 탄 직후였다.
철새 팬, 또는 잡덕이라는 말은 한모 씨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뚝심 있게 한 팀만 좋아하는 게 미친 거 같다고. 아이돌, 아니 인간이란 건 소모되잖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모 씨의 성향은 글로리 헌터(Glory Hunter)에 가까웠다.
한 그룹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그들의 팬이 되어 이루는 업적을 같이 즐기는 것이 재미있었다.
동트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그러면 해가 떠오른 후부터 좋아하면 되잖아.
갓 데뷔해 과연 뜰 수 있을지 없을지 검증되지 않은 신인? 관심 없었다.
영광의 트로피를 거머쥔 뒤,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관록 있는 그룹? 늙었으면 당장 무덤에 들어가라고나 해.
– 지역 축제에 갔었는데 아무도 저희를 몰라보시더라고요. 그래도 벌써 4집 가수인데……. 다들 너무 시큰둥하시고……. 진짜 그만둬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딱 한 분이 저희 플래카드를 흔들어 주고 계시더라고요. 그분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신인 시절, 혹은 잘 못 나가던 시절의 짠 내 나는 경험담 따위 들어 봐야 이쪽의 마음까지 짜게 식을 뿐이었다.
-무대에 올랐는데, 갑자기 무릎이 움직이질 않는 거예요. 네, 수술도 몇 번 했거든요. 그래도 무대에 오르면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는데 그날은 진짜 이상하게 굳어 버려서……. 급하게 도움을 받아 내려가는데 팬분들이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그게 정말, 너무…….
노쇠한 아이돌의 사연? 이건 더더욱 가치가 없고.
한모 씨가 보고 싶은 것은 그냥 한모 씨의 인생에선 볼 수 없는 말도 안 되게 빛나고 영광된 모습뿐이었다.
몇만 명이 모인 공연장에서 공연한다든지, 시상식에서 가장 가지 있는 상을 그 손에 쥔다든지.
‘거기다 보통 그때 가장 젊고, 건강하고, 잘생기기까지 하다고. 나이가 들면 점점 시시해지잖아.’
그렇지 않아도 퍽퍽한 인생사, 왜 굳이 취미 생활을 하면서도 고난과 역경을 찾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덕질은 오로지 즐겁게. 그것이 한모 씨의 철학이었다.
금방 다른 그룹으로 갈아타니 굿즈는 짐이 될 뿐이라 사 모으지 않았고, 이미 잘 나가는 그룹이니 딱히 음원 스트리밍이나 투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상을 타왔다.
앨범 정도만 추억으로 한 장씩 사 모으는 것이 한모 씨의 덕질이었다.
‘세상 참 좋아졌지. 아이돌마다 자체 콘텐츠를 만들고, 라이브 방송도 자주 하고. 콘서트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경우도 많고.’
콘서트 같은 경우엔 인기 절정의 그룹만 좋아하다 보니 티켓팅 도전도 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딱 하나, 아이돌을 덕질하며 이전보다 아쉬워진 것은 대부분 한모 씨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에 음원이 발매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지옥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쯤엔 이미 몇 바퀴 감상회가 돈 후란 말이지.’
이미 남들은 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콘텐츠를 홀로 감상하는 거 같아 조금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정에 발매되는 이번 레굴루스 앨범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성적 신경 안 쓰냐, 회사 미쳤냐, 로망 찾다가 뒤지겠네, 스밍 죽어라 하자, 뭐 이런 말도 많은 거 같지만.’
그냥 음원 사이트에서 한 번씩 곡을 다운로드하는 정도로 끝내는 한모 씨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전처럼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그냥 다른 팀으로 갈아타면 되니까.
그와 반대로 레굴루스의 근원인 츄즈 마이 프린스 99의 마지막 방영일에 맞춰 앨범을 내는 것이 감동이라는 의견도 꽤 보였지만 이 또한 한모 씨에겐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멤버들이 보내는 러브 레터라나 뭐라나. 그치만 나는 츄마프 안 봤는걸. 가끔 떠도는 짤은 몇 개 봤지만.’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니. 생각만 해도 땀과 눈물투성이일 것 같아 숨쉬기 괴롭다.
그런 걸 만드는 사람도, 참여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서바이벌을 좋아하지? 다들 변태인가…….’
검증된 팀을 좋아하는 쪽이 훨씬 정신 건강에 이로울 텐데.
한모 씨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분침은 어느새 5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작하겠다.’
생각을 털어 낸 한모 씨의 시선이 태블릿으로 고정됐다.
라이브 무대에 제대로 치인 한모 씨가 츄즈 마이 프린스 99시절부터 레굴루스의 기록을 샅샅이 훑으며 ‘왜 좀 더 일찍 좋아하지 못한 건데!’하고 눈물짓기까지 약 하루 남아 있었다.
* * *
관객이 없는 무대 위는 고요했다.
연습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이, 계절은 완연한 봄이 되어 뺨에 닿는 밤공기가 차갑지 않았다.
예찬은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멤버들의 얼굴을 살폈다.
누구라고 말할 것 없이 다들 츄마프 시절보다 단단한 표정이다.
예찬의 시선을 느꼈는지 범세혁이 깍지 낀 손을 세게 쥐어 왔다.
미간을 구긴 예찬이 무슨 짓이냐고 타박하듯이 노려보았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씩 미소 지을 뿐이었다.
‘까부네.’
되갚아 주듯 손을 꽉 쥔 예찬은 등에 닿아 있는 강해솔의 무릎에도 조금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다. 긴장된 무릎에선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해솔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무대에 자리 잡은 모두가 똑같이 흥분하고 있었다.
모두 똑같이 준비한 곡을 당장 세상에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 그 하나로.
무대 위 멤버들도, 무대 아래 스태프들도, 그리고 저 구석에 보이는 스마일 탈도 숨을 죽인 가운데 마침내 한줄기 스포트라이트가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멤버들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동시에 카메라 렌즈 너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면 속에 ‘개화(開花)’가 시작되었다.
오